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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윤이나, <라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by Jaime Chung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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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윤이나, <라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내가 2권까지만 읽고 나랑 안 맞는 거 같으니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고 했던 그 <띵> 시리즈의 한 권이다.

(그때 읽은 책들 리뷰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라!)

2021.05.1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이다혜,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

2021.05.1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미깡, <해장 음식: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사실 <띵> 시리즈 중 이걸 제일 먼저 알게 됐는데 1권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전했다고 낭패를 봤던 것이다.

2권도 내 취향은 아니어서 포기할까 하다가, 애초에 이게 너무 재밌어 보여서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거니까 이것까지는 읽어 보자고 생각했고, 도전했다.

그 결과는, '재밌는데?'였다. 저자가 드디어 내 취향이랑 맞는 경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라면'이라는 소재를 놓고, 라면 중독자라 부를 만한 저자가 라면 끓이는 법을 각 꼭지의 첫머리로 해서 글을 이끌어 나가는데, 라면과 관련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기 경험을 정말 신기하게 잘 녹여 냈다.

'라면이라는 소재로 이렇게까지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싶을 정도로 놀랐고, 저자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예컨대,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처럼(아니, 저자가 아버지를 닮아서) 라면을 좋아하시는데, 아버지와 라면 이야기를 하면서 부녀간의 사랑으로 옮겨가는 식이다.

딸이 오전에 깨어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ㅅ을 알 생각이 엇는 것인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아무 때나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걸어서 언제 오냐고 묻곤,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한다. 통화의 전후로 내가 라면을 먹었거나 먹게 될 확률은 매우 높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면 아빠는 말한다.

"딸, 사랑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는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절대 아끼지 않는 사람과 나는 닮았다. 특히 입맛이, 가장 닮았다.

나는 이런 글쓰기가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라면 이야기로 시작했고 라면이라는 중심 소재에서 멀어지지 않지만, 라면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이 글에서는 아빠에 대한 사랑, 아빠의 딸에 대한 사랑)도 같이 하는 것.

 

라면을 평가하는 저자의 기준은 사뭇 진지한데, "어떤 음식의 대체제가 아니라, 그냥 라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개장칼쿡수'를 줄인 '육칼'이라는 이름의 인스턴트 라면이 출시되었을 때, 저자는 이를 꽤 괜찮게 생각했지만(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라면 라인업을 짤 때, 후보군 정도에는 언제나 올려줄 만한 균형감 있는 라면"), 리뉴얼 이후 방향이 틀려졌다고 저자는 평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그 육개장 칼국수의 맛을 목표로" 삼았고, 그래서 예전의 그 매력적인 '육칼'이 아니라 '육개장이 되고 싶어 하는 무언가의 번데기 같은 라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육칼'을 먹을 때 저자는 생각한다.

리뉴얼이 된 육칼을 먹으면, 나는 쓸쓸해진다. 그건 더 나은 나, 더 괜찮은 내가 아니라 더 멋ㅅ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누군가를 볼 때의 마음과도 비슷한 것 같다. 1,000원이 조금 넘는 인스턴트 라면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육개장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육개장은 한 그릇에 8,000원으로, 반찬으로 석박지와 김치가 곁들여지고 계절과일 한 조각이 디저트로 함께 나온다. 나는 육개장을 먹고 싶으면 그 가게로 갈 것이다.

지금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라면이다. 라면은 먹고 싶은 어떤 음식을 대체해서 가성비로 먹는 그런 카테고리의 음식이 아니다. 라면은 오직 라면이어서 먹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육칼'에서 다른 누구처럼 되고자 하는 내가 아닌,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꿈꾸는 태도, 다른 누구와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내 개성을 온전히 내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연결해 글을 쓸 수 있다니, 나는 라면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처음 본다.

 

'셋째, 컵라면을 골랐다면'이라는 꼭지에서는 저자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일과 나란 사람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점도 정말 놀라운데, 바로 다음 꼭지인 '넷째, 물을 끓이기에 앞서'에서는 '토지문화관'에서 머물던 시절 겪었던, 납량 특집 뺨치게 스릴 넘치는 여치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도 기가 막히다.

이 두 꼭지가 내 최애 꼭지인데, 후자에서 웃겼던 부분을 조금만 옮겨 적어 보겠다.

그 여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만나는 모두를 그렇게 부르다 보니 입에 완전히 붙어버린 탓이었다. "간밤에 찾아왔다는 멧돼지 선생님이…"라고 문장을 시작하곤 하는 식이었다. 호칭을 선생님으로 통일하고 보니 어디에나 선생님이 있었다. 7월 한 달 사이 여름의 연례행사라는 멧돼지 선생님이 자녀들과 함께 다녀갔고, 포수 선생님도 다녀가셨으며, 어느 밤에는 보름달 선생님도 떴다 지며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고 나서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 '여치' 썰이 진짜 너무 웃긴데 이것까지 공개하면 책 안 찾아보실 거 같으니까 이건 남겨 두겠다. 구입해 보시거나 도서관 또는 서점에서 딱 이 부분만이라도 살펴보시라. 정말 최고다.

 

리디북스에서 '미리보기'로 봤을 때 '이거 괜찮겠는데?' 느낌이 와서 구입해 본 건데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만인이 사랑하는 라면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글솜씨가 참 맛깔나다. 가볍게, 재미있게 읽을 에세이를 찾으신다면, 그리고 라면을 먹을 구실이 필요하시다면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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