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박태하, <전국축제자랑>
내가 좋아하는 김혼비 작가와 그 남편분이신 (역시나 작가인) 박태하 작가가 공동 집필을 한 에세이다.
(김혼비 작가가 얼마나 재미있는 작가인지 아직 모르신다면 아래 리뷰를 참고하시라!)
2020.02.19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아무튼, 술>
이 부부가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지방 축제들을 보고 난 감상을 쓴 게 문학 잡지 <릿터>에 실렸고, 이건 그 연재분 열두 달어치를 모아서 낸 것이다.
부부가 같이 책을 쓴 방식도 참 신기한데,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초고를 쓰고, 다른 사람이 여기에 자기 말을 덧대고, 뺄 건 빼는 식으로 돌아가며 2고, 3고, 그리고 4고까지 써서 완성했단다. 저자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글을 아예 하나의 글로 합치기로 했다. 책의 서두에 우리의 작업 방식에 관해 (지금처럼) 미리 설명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 서효인 편집자가 "정말 비효율적인데 두 사람 다 기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인간이라 둘에게는 가장 효율적인"이라고 말한 바 있는 방식으로. 일단 한 사람이 초고를 쓴다. 그걸 받아 다음 사람이 2고를 쓰는데, '이 얘길 뭐 이렇게 길게 썼어?' '그 장면은 왜 안 살렸지?' 하며 뜯어 고치다 보면 애초의 원고에서 절반 이상이 바뀌고 또 재배치된다. 초고의 절반을 잃어버려 망연한 초고 작성자는 상처를 애써 추스르며 '그래, 고치니 낫네.' '여긴 원래 쓴 게 훨씬 낫거든! 되돌려야지!' 하며 30~40퍼센트가 새로 바뀌는 3고를 쓴다. 이를 되돌려받은 사람이 또 나름의 상처를 다독이며 '이걸 꼭 써야겠단 말이지? 져 주마.' '기가 막히게 섞었군!' 하며 4고를 완성한다. 그런 다음에 나란히 앉아 최종 수정과 조율을 거쳐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식이다. (단, '젓가락페스티벌' 편은 박태하 혼자 다녀와서 혼자 썼다.)
저자들이 방문하고 체험해 본 축제들은 (아마 강릉단오제 하나 빼고) 이름조차 생소하다. 목차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축제의 힘을 믿든 말든 -의좋은형제축제 13
학구 많은 축제 중에서 -영암왕인문화축제 33
어쩔 수 없이 그럴싸하게 -영산포홍어축제 51
의령의 진짜 유령은 -의병제전 71
이런 나를 좀 보라고 -밀양아리랑대축제 91
에헤라 품바가 잘도 논다 -음성품바축제 113
어느 천년에 그거 다 했어 -강릉단오제 137
갈라져야 쓰것네 -젓가락페스티벌 161
이건 먹고 들어가는 콘셉트 -완주와일드푸드축제 185
이제 그만 거꾸로 거슬러 올라야 할 -양양연어축제 209
제철은 아니지만 제 길을 찾아 -벌교꼬막축제 235
작지만 맞춤한 것들을 만나기 위해 -지리산산청곶감축제 261
열두 개 항목 중 첫 번째 꼭지이자 축제인 '의좋은형제축제' 첫 문장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그래서 나는 이걸 사 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좋은형제축제'라는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의좋은 형제? 밤마다 쌀가마니를 서로의 집에 몰래 옮기다가 달빛 아래 딱 마주쳤다는 그 동화 속 형제? 근데 이걸로 축제를, 그것도 사흘씩이나 한다고? '의좋은 형제'와 '축제'라는 이 터무니없는 조합(누군가에게는 '의좋은'과 '형제'의 조합부터가 터무니없겠지만) 앞에서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 쌀 봉지만 봐도 피식거리며 축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전국의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축제들을 찾아다닌 건, 그 안의 'K-스러움'을 발견하기 위함인데, 이 '의좋은형제축제'에서 만난 광경이 앞으로 저자들이 직면하게 될 'K-스러움'을 잘 보여 준다 하겠다.
분위기를 그나마 끌어올린 건 EDM(Electronic Dance Music) 파티였다. 그것도 그냥 EDM이 아니라 '어린이 EDM'. 토끼가면을 쓴 DJ가 나와 뽀로로 주제가, <상어 가족>, <올챙이와 개구리> 같은 동요를 현란한 전자음에 실어 귀가 찢어질 듯 틀어 댔고 그만큼 현란한 LED 조명이 번쩍번쩍 행사장을 물들이자 어린이집과 클럽의 융복합 같은 요상한 시공간이 만들어졌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들썩들썩하기 시작했고, 소극적인 아이들은 부모의 등쌀에 일어났으며, 아이가 없는 어른들도 무의식중에 그루브를 타기 시작했다. 이 비현실적인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혼비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은 홍대와 이태원에서 불타는 핼러윈을 보낼 이 시간에 자기는 의좋은형제공원에서 핑크퐁의 <상어 가족> EDM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다는 것이 핼러윈의 거대한 장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인생 최고의 핼러윈이야!") 그 와중에 박태하는, 홀로 무대를 등지고 서서 스마트폰의 전광판 앱으로 쓴 '대흥면 최고'라는 문구를 관객들을 향해 흔들며 춤을 추는 한 아주머니의 끝 모를 애향심에 숙연해졌다. (축제가 끝나고 편의점 앞에서 그분을 다시 마주쳤는데 "대흥면 최고!"라고 직접 외쳐도 주셨다.)
근데 그 'K-스러움'이 뭐냐고? '의좋은형제축제'에서 저자들이 발견한 "때로는 어설프고, 때로는 키치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혼잡한 열정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두 번째 '영암왕인문화축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여행은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갈 생각이 없던 축제였다. 학창 시절 '아직기'와 짝을 이루어 배운 기억밖에 없는 '왕인'이라는 학자에게 딱히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홈페이지는 한번 둘러나 보자는 마음으로 들어가 별생각 없이 '환영사' 메뉴를 클릭했다가 첫 문장에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1억 3000만 일본인들의 영원한 스승 왕인박사를 아십니까?"
와, 지금 왕인이 백제 시대에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파했다고 해서 21세기 1억 3000만 일본인들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거야? 이 짧은 한 문장에 녹아 있는 몇 시대를 건너뛴 비약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문화적 우위를 단번에 거머쥐려는 웅대한 포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나아가 왕인을 "한류의 원조"(!), "아스카 문화의 시조"(!!), "동아시아 문명화의 선구자"(!!!)로 추켜세우는 지역 언론들의 크레셴도 찬가까지 접하고 나니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그래 이거다, 이 축제는 가야 한다. 전국적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16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끝에 찾아낸 고장 출신 최대 스타, 그것도 마침 '국뽕'으로 흐르기 쉬운 인물, 그 인물로 만든 축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감성 아닌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후 가장 임팩트 있는 그 첫 문장에 오늘, 우리가 좋아 죽었다.
벌써부터 감이 오지 않는가, 이 축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저자들이 'K-스러운' 축제의 한 단면을 이 축제를 통해 짚어 준 게 좋다. 말인즉슨, 어떤 축제든 자녀들을 동반하고 참여하는 부모들을 위해 그들의 교육열을 채워 줄 만한 '교육적' 면모를 끼워넣으려고 한다는 거다.
70~80대의 이글이글한 향학열을 보고 지나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면 이제는 어린이들의 등 떠밀린 향학열을 볼 차례다. '어린이 왕인스쿨'이라는 이름의 체험 프로그램장, 대개 아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들이 데스크에 가서 참가 신청을 한다. 1교시 입학식을 거친 아이들의 2~4교시에 왕인의 생애, 천자문과 논어(이 두 가지가 왕인이 일본에 전해 준 것들이다.) 관련 수업을 들은 후 5교시에 출제되는 퀴즈의 정답을 맞히면 오경 박사에 등극하여 상장을 받는다.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아이들이었지만(이해한다. 축제까지 와서 설마 공부를 하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진행자와 훈장님들의 고군분투로 어느 순간부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복창했고, 보호자들은 그제야 한숨 돌린다는 듯 지친 얼굴로 그늘에 들어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이들을 잠시나마 맡겨 둘 수 있으며 교육적인 효과도 얻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이곳에서 에듀테인먼트의 단면과 육아의 단면을 함께 본 우리는 슬슬 이 축제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고 축제장 여기저기에 공들여 심어 놓은 어떤 학구성들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곳은 계단마저 학구적이었다! '천자문 계단'이라니. 계단 한 칸마다 천자문이 네 글자씩 새겨진, 그러니까 250개나 되는, 한 칸을 한 걸음으로 가야 하나 두 걸음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애매한 설계로 학문의 고된 길을 암시하기까지 하는, '팔만대장경 계단'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인 계단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내려오니 진이 빠졌다. 도로변의 장식용 깃발에도 천자문이 한 자씩 쓰여 펄럭였고, 군내 고등학생들은 깃발마다 '수능 대박'이 주를 이루는 소원을 적어 두었다. ('욕할 욕'을 배정받은 운 없는 친구는 한자 아래 '재수 없다'라는 감상을 남겨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 가지 상반된 정신을 갖춘 게 바로 'K-축제'의 현주소임은, 굳이 가 보지 않아도 저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절로 느끼게 된다.
그 와중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와 폭소는 덤. 두 작가가 글을 너무 재미있게 잘 써서, 솔직히 축제 따위에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는 나도 너무 유쾌하게 잘 읽었다.
코로나가 물러가고 난 다음에는 이 책을 가이드 삼아 전국 축제 '도장 깨기'에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ㅎㅎ
너무 웃긴 책인데 재미있는 부분을 다 보여 드릴 수가 없어서 아쉬울 정도다. 웃음을 찾는 분이시라면 꼭 읽어 보시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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