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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아마에비 리코, <종이봉투 씨는 사랑을 하고 있다 01>

 

 

⚠️ 아래 서평은 아마에비 리코의 <종우봉투 씨는 사랑을 하고 있다 01>의 스포일러를 살짝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당히 만화적인 발상의 만화이다. 위 겉표지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종이봉투를 쓴 남자(왼쪽)와 그가 좋아하는 여자(오른쪽) '우미'이다. '종이봉투 씨'라 불리는 남자는 여주인공 우미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데다 부끄러움을 잘 타기 때문에 종이봉투를 쓰고 우미에게 고백한다. 우미는 종이봉투 씨와 친구부터 되기로 하고, 점차 그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에 대한 호감을 키워 나간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사실 이토록 만화적인 발상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말인즉슨, 자기 이름이나 얼굴도 밝히지 않은 남자가 좋다고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데 그것을 차분하게, 기쁜 마음으로 '그렇구나' 하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거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 한 스무 명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스무 명 전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도나 표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그 상대를 무섭다고 여기지 않을까? (굳이 여기에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통계를 가져와야만 이 여성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니, 만약에 그래야 한다면 남녀의 기본적 신체적 차이와 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젠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일 테니 말해 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

저자도 그런 점을 의식은 하는지 종이봉투 씨가 다짜고짜 우미에게 반지를 들이밀며 나타나는 첫 등장에 이미 우미의 친구가 그를 '변태'라고 부르며 난리법석을 벌인다(사실 종이봉투 씨는 '좋아한다'라는 말의 첫 음절밖에 꺼내지 못했는데). 상황이 어찌저찌 마무리된 후에 우미는 그를 신고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아마 그냥 부끄럼을 사람일 테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미의 친구는 우미에게 최근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예컨대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물건이 없어지는 일들이 다 그의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공평하게 그를 변론하자면, 그건 그가 저지른 짓은 아니었고 어떤 스토커의 짓이었다) 우미는 "시선은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라며 그 이상한 일들을 대단치 않게 여기려 한다. 우미의 친구는 우미에게 "우미! 너는! 길 위의 꿈꾸는 뮤지션이나 개성 넘치는 패션 감각을 가진 사람처럼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듣는 애들까지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굉장~히 멋진 성격의 소유자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진짜 나쁜 사람에게 걸려서 휘둘리지 않게끔 위기감을 가지라고!"라며 조언한다. 친구가 우미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보시라.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라는 말을 듣는 애들까지 순순히 받아들여 주는 굉장히 멋진 성격의 소유자'?

하지만 좀 독특하게, 개성 넘치게 옷을 입는 사람이나 '홍대병'처럼 튀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친구나 지인이 되는 것과 '진짜 나쁜 사람에게 걸려서 휘둘'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전자는 기껏해야 짜증이나 오글거림, 대리 수치를 유발할 뿐이고 정말 심해 봤자 네이트판에 글을 쓰는 것 또는 그럴 만한 글감을 얻는 것 이외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본인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 신체적으로 폭력을 당하거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친구가 우미에게 가지라고 하는 "위기감"은 다시 말해 현실 감각을 가지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을 다 착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친절을 오해하고 자신에게 흑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는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만, 적절한 선에서 행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여자의 경우 그렇다는 얘기다. 남자들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호감을 사더라도 신체적으로 안전이 위협받을 가능성은 적으니까).

도대체가, 자기 얼굴도, 이름도, 어디에서 나를 만났는지, 어떻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말해 주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연인 관계는 둘째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특히 본인이 여자라면, 직관적인 느낌이자 처음으로 가져야 할 생각은 '아, 이거 좀 위험한데?'일 수밖에 없지 않나.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수줍어서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겠다는 것은, 뭐 인기 있는 유튜버와 그 팬의 관계처럼 준사회적(parasocial)한 관계 아닌가? 다시 말해, 나(=팬)는 그 유튜버의 존재를 아는데 그 유튜버는 나의 존재를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유튜버의 영상을 많이 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등을 안다. 그래서 그를 마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실제로 오래 알아 온 사람처럼 친근감을 느낀다. 실제로는 그 유튜버를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준사회적 관계다. 우미와 종이봉투 씨의 관계는 준사회적 관계에 불과하다. 우미가 종이봉투 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예컨대 우미와 종이봉투 씨가 온라인 상에서 만났다고 치자. 그러면 우미가 종이봉투 씨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내가 온라인 게시판이나 채팅방에서 닉네임을 연예인 이름으로 쓴다고 해서 내가 진짜 그 연예인일 리가 없지 않은가(일부러구체적인 연예인 이름은 예시로 들지 않았는데, 원한다면 아무 한국/해외 연예인 이름으로 대체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똑같다). 어쨌거나 적어도 그런 상황이라면 우미가 상대를 잘 모른다 해도 그건 완벽하게 말이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대놓고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사기꾼이 누구를 속이려고 들면 이름이나 사는 곳, 소속(학교나 회사 등)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알아야 적어도 상대가 나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시작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걸 정말 눈곱만큼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미처럼 '일단 친구부터 되자'는 식으로 차분하고 젠틀하게 상대를 받아들일 수가 있나? 우미는 (조금 점잖게, 순한 맛으로 표현해서) 얼빠진 녀석임에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이 자라면서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바를 통해 낯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갖는 건 너무나 정상적이고 자기 보존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특히 요즘 한국처럼 여성 혐오와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에 사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읽어도 읽어도 우미가 '얼빠진 녀석'이라는 것 외에는 정말 이 이야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두 사람이 생존이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예컨대 전쟁)에 처해 있다면, 그래서 상대를 알아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면, '생존을 위해 협력하겠다'라는 합의만 하고 서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둘이 협력해 어떤 공동의 목표(적에게 들키지 않고 도망가기, 식량 구하기, 적을 처치하기 등)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당장 내가 정글 한복판에 떨어져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라면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힘을 합쳐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 게 조금이나마 생존 가능성을 높여 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난 우미가 어떻게 그렇게 경계심 없이 종이봉투 씨를 받아들이고 '친구부터 되자' 같은 하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이 만화책의 이야기 진행에 따르면, 우미의 친구가 종이봉투 씨의 짓이라고 오해했던 일들은 어떤 스토커의 짓으로 밝혀지고, 마침(이 아니라 당연히 우미 주변을 따라다니던) 그걸 목격한 종이봉투 씨가 우미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스토커로부터 우미를 구해 줘서 우미는 그를 완전히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우미 친구 말대로 "만약 내가 우미를 노리는 남자 범죄자라면, 똑같은 종이봉투를 쓰고서 댁 흉내를 내며 우미에게 다가갈 거야. 그럼 얼굴도 안 들킬 테고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겠지. 그래서 댁이 얼쩡거리는 건 위험해." 스토커를 처치해 주었을지언정 아직 우미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하나도 정보를 밝힌 게 없는데 어떻게 그를 믿으란 말인가? 그가 수퍼히어로라서 정체를 밝히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하다못해 이름을 "-----(삐)" 처리 하고 우미만 알아들었다 친 후에 '그래도 별명으로 종이봉투 씨라고 부를게요' 뭐 이러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우미는 종이봉투 씨에 대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는 것 외에 개인적으로 아는 게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사람과 어떻게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알라딘의 책 분류 방법에 따르면 이 책은 '순정만화'이고 '레이디스 코믹'인데, 내 생각엔 '호러'나 '스릴러'쯤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자신에 대해 하나도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호감,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받아낼 수 있을까? 상대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있지?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긴 하지만,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부끄럽다면 솔직히 부끄럽다고 인정하되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 주어야 상대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끄럽다고 얼굴을 가리는 게, 자기 정체를 숨기는 게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이 만화의 분류를 '호러'나 '스릴러'로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순정만화'나 '레이디스 코믹'이라는 딱지는 떼고 오히려 남성향 만화라고 분류하는 게 더 적절할 거 같다. '내가 상대를 이만큼 좋아하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가 표현하면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며 몸통박치기를 하는 건 너무나 연애를 잘 모르는 남성들이 할 법한 생각이지 않은가. 종이봉투를 쓰고 다가가면 대체로 여자들은 '어머, 저 사람 부끄러움이 많은가 봐'가 아니라 '뭐야, 무서워'라고 생각한답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종이봉투 아래의 숨겨진 얼굴이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얼굴이 잘생겼다고 해서 그런 게 용납되는 게 아니니까.

종이봉투 씨는 내내 우미를 좋아하는 이유로 우미가 "예전부터 다정해서"라는 점을 꼽는데, 아니 그 다정한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요. 어떨 때 다정한지 네가 어디서 봤어? 근데 너는 왜 너를 안 밝혀? 그리고 "예전부터"라니, 그 말인즉슨 우미를 안 지 꽤 됐다는 얘기인데 이건 그냥 보통 여자로 하여금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하기에 충분하다. 꽤 오랫동안 나 몰래 나를 관찰해 왔다? 우미의 물건을 훔쳐가고 우미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스토커랑 종이봉투 씨가 진짜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만화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놓아야, 그렇게 해야지만 '순정만화'로, '로맨스(또는 로맨틱 코미디)'로 보인다. 아니, 차라리 엘프가 나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오면 '이게 상상의 산물이구나' 하고 직관적으로 바로 알아차릴 수나 있지, 이건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서도 이렇게나 젠더 감수성이 바닥을 쳐야만 할 수 있는 상상을 현실과의 경계가 흐릿하게 그려 버리니 독자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의식적으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깜빡 속기 쉽다. 자신의 정체를 조금도 밝히지 않고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상상, 또는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상상, 상대를 좋아해도 상대의 상황이나 마음을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상상 등등. 이 책을 읽으려면 독자 여러분들의 비판적이고 의식적인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은 상상과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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