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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한승혜, <다정한 무관심>

by Jaime Chung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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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한승혜, <다정한 무관심>

 

내가 호주에 와서 들은, 나에 대한 피드백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곁을 잘 안 준다는 것이었다. 아니,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점이긴 한데, 내 남자 친구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내가 남에게 안부를 잘 안 묻는다는 거였다. “How are you?” “How’s it going?” 같은 것.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상대방의 안부를 정말 자주 묻는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안부를 묻는 일 또는 과정 중에서 내가 제일 이해하기 힘든 건 이거다. 예컨대 내가 어떤 자리에서 한 학생을 만났으며, 나는 그가 저번주에 시험을 치렀다는 걸 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분명히 그 사실을 아는데도 굳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 그냥 다른 얘기만 한다.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자기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먼저 하겠지’ 생각하고서. 근데 남자 친구 말로는, 상대가 시험을 봤다는 걸 안다면 왜 그거에 대해 안 물어보냐는 것이다. 왜냐니! 그거야말로 ‘다정한 무관심’이잖아! 만약에 상대가 나처럼 성적에 목숨을 거는 사람인데 시험을 못 본 거 같아 스트레스 받고 기가 죽은 상태면 굳이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상대에게는 괴로운 일 아니야? 그냥 일부러 모르는 척해 주는 거지! 남자 친구 말로는, 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예의이고 친절이란다. 나 참.

평소와 달리 내 이야기를 좀 늘어놓았는데, 이 책의 제목인 <다정한 무관심>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승혜의 이 책은, 우리가 좀 더 다정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책 내용은 아주 좋은데,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와 ‘개인주의(자)’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책에서 저자는 여성과 아이뿐 아니라 소위 3D 직종이라고 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나 장애인처럼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필요하다면 사회적﹒법적 제도 변화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건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자율성, 독립성을 존중하는 태도인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에 해당하는 것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뭐, 제목은 개인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내용으로 넘어가겠다. 위에서 간단히 언급했듯 내용은 대체로 ‘주변화된(marginalised)’ 이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이것만큼은 꼭 이야기해야겠다 싶었던 꼭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성적인 작가, 여성적인 작가>는 어떤 특정한 문체 또는 특징이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굉장히 쉽게 말하곤 한다. 여성 작가는 어떻고 남성 작가는 어떻다고. 여성 작가들은 너무 섬세해, 예민해, 징징거려, 소심해, 내면세계에만 집중해,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만 다뤄, 사랑 타령만 해, 기타 등등. 심지어 소설가 박범신은 정유정의 <7년의 밤>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이런 ‘칭찬’을 하기도 했다. “여성 작가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여러 문학적 함정들을 너끈히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넓고 다양한 작품을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건설적인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실제로 여성 작가들이 저런가? 저것이 여성 작가의 특징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설 <레베카>를 비롯하여 다수의 작품을 쓴 고딕 소설의 대가 대프니 듀 모리에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비롯하며 <리플리>로 대략 세계적인 작가로 올라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해 여성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앞서 정유정이 “여성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문학적 함정을 너끈히 비껴간다”고 ‘찬사’를 들었듯이, 이들은 대담하고, 카리스마적이며, 공격적인 문체로 특징지어졌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작가들이 ‘여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 작가의 작품 중에도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다루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공존함에도 전자의 경우 여성적이라는 딱지가 붙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자의 신체를 이용하여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내용이다. 공포소설의 원형으로 꼽을 수 있을 만한 이 작품을 두고 ‘대단히 여성스러운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메리 셸리에 대해 ‘역시 여성 작가라서 위대해!’라고 성별을 붙이는 사람 또한 없다. 위대한 작품을 쓴 여성 작가들은 작품 앞에서 성별이 소거된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섬세’하고 ‘예민’하며 ‘징징’거리고 내면세계에만 집중’하며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만’ 다루고 ‘사랑 타령만 하’는 게 여성 작가라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걔는 게이잖아!’라고 대꾸한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여성 혐오자일뿐 아니라 호모포비아이기도 하시군요! 뭐 하나 더 추가해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실 생각 말고 그냥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엔 사람들이 ‘이 작품은 여성 작가답다(또는 여성 작가답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위에서 언급된 작가들, 그러니까 대프니 듀 모리에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메리 셸리 등은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상대가 “하지만 이들 같은 여성 작가도 있는걸?” 하고 반격하면 그제서야 ‘아차’ 싶을 것이고 그래도 그들은 뭐 아버지랑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거나 남편이 남편다운 의무를 다하지 않아 본인이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억척스러워서 거의 남성에 가깝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저자는 물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어슐러 르 귄도 언급한다. 어슐러 르 귄은 그 자신도 훌륭한 여성 작가인데, 큰 찬사를 받은 SF 작가이자 자신의 친구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사실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다). 나도 여기에서 고백하지만, 내가 이곳 티스토리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제이미’라는 필명을 고른 것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영향이다. 나는 분명 여성주의적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고 따라서 그런 책에 대한 서평도 많이 쓸 텐데 ‘여자니까 그런 책만 읽고 옹호한다’라는 쌉소리를 들을 것이 우려됐다. 그래서 최소한 그런 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내 글만 보고는 내 성별을 쉽게 짐작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제이미’라는 중성적인 이름을 골랐고, 내 성별을 추측할 수 없도록 나에 대한 정보는 최소한으로 했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넣을 경우에는 부러 성을 드러내지 않는 표현으로 골라 썼다(’친구’, ‘걔’, ‘그분’ 등). 말투도 최대한 중성적으로 들리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블로그를 운영해 온 지 올해로 4년째인데 그 작전이 성공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 나름대로 성 고정관념에 맞서 싸웠다는 뿌듯함은 있다. 아, 생각해 보니까 내 작전은 성공이나 실패를 논하기가 우스울 정도로 큰 인기가 없었다. 그야말로 쉴드들 중 최강이라는 ‘듣보 쉴드’……. 🥲

어쨌거나 내가 늘 생각해 오던 점을 저자가 짚어 줘서 어찌나 개운하던지. 간지러운 등을 긁은 느낌이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느낌이었다. 또 하나 속시원한 건 <낙태의 ‘남용’이 가능해?>라는 꼭지였다.

낙태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말한다. 낙태가 허용되면 부도덕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로 인하여 무책임한 임신이 증가할 것이라고. 한편으로는 배 속 태아를 간단히 없애려는 시도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임신 중절도 일종의 수술인데 여성 몸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그 수술을 받은 여성은 당연히 신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충격을 겪을 것이다. 그래도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받는 게 임신 중절 수술인 거다. 저자 말대로,

(…) 낙태가 허용된다고 하여, “어라 임신이네, 낙태해야지” 하면서 단숨에 병원으로 향하여 수술을 받고 상쾌한 기분으로 나올 여성은 없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쨌든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나는 이게 여성 혐오자들이 여성은 몸을 팔아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인생 쉽게 산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그치들은 정말 자기 성을 팔아서라도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기꺼이 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들도 그럴 거라고 착각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차라리 간신히 최저 시급만 쳐 주는 알바를 찾아봤으면 찾아봤지 몸을 파는 일은 쳐다도 안 보는데 말이다. 자기네들이 임신을 한다면 그렇게 쉽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해치울 거니까 여자도 그럴 거라 생각하니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이야기는 더 하면 나만 빡칠 테니까 이만 하겠다.

이 외에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검열’하는 일인 ‘커버링’이라는 개념을 다룬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이나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등을 비롯해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언급해서 내 ‘읽을 책 목록’과 ‘볼 것 목록’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 여성에 대해 한 장이 할애되어 있지만 여성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고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고루고루 있어서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책이고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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