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오찬호,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예전에 <스펀지>에서 사투리는 쓰는 아이도 소꿉놀이를 할 때면 표준어를 쓴다는 흥미로운 현상을 다룬 꼭지를 본 적 있다(’스펀지 사투리 소꿉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와 같은 방송을 본 이들의 글이 여럿 나온다). 아이가 평소에 사투리를 쓸지라도 소꿉놀이를 할 때만큼은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 하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표준어를 쓴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결혼과 육아도 소꿉놀이처럼 정해진 ‘각본’을 따라 행해지는 듯하다. 예전에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을 읽을 때 (내가 쓴 후기는 여기) 저자는 (적어도 영어권 국가들에선) 결혼 때까지만 해도 남녀가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는 등) 꽤 평등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육아가 시작되면 그 ‘남녀 평등’은 무너진다고,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게’ 여자의 역할이 되어 버린다는 게 진정한 문제이지만.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해서 애 낳기 전까지의 시기도 평등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제목 그대로 결혼과 육아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는 저자가 ‘평범한’ 결혼 생활의 예로 드는 서른두 살 박지윤 씨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너무나 흔해서 <82년생 김지영> 속 한 장면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이야기이다.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결혼한 지윤 씨는 “상대가 한국의 보통 남자들보다 성 평등 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나름 결혼생활이 순항할 것이라고” 믿었다.
(…) 남자는 “남자니까~”, “여자답게~” 등의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연애할 때도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구속하지 않았다. 남자는 가부장적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상대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
그런데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와 양가 인사를 마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첫날”, 지윤 씨가 출근하려고 부랴부랴 씻으면서 준비를 하는데 늦어도 7시에는 출근해야 하는 남편이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밥 안 줘?” 하는 게 아닌가.
여기에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남이 차려주는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하는 건지, 왜 결혼의 ‘로망’으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을 꼽는지. 여자는 그저 ‘같이 장보기’가 1순위라던데. 저자 말대로 “남자는 로망 자체가 ‘대접’이다. 그것도 자유, 평등, 개성을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다는 지금의 미혼남녀들이 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예비 부부가 자신들만의 힘으로 신혼집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어려우니 거의 필연적으로 부모의 힘을 빌리게 되고, 남자 쪽에서 경제적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보태면 예비 아내는 빚진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아이까지 생기면? “’엄마’로서 잘 살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여자는 자존감이 무너질 것이고, 이는 자연스레 ‘엄마의 자존심을 건’ 육아의 세계로 그를 인도하게 되리라.”
나는 살면서 아이가 귀엽다거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알게 되기 훨씬 전부터 ‘모성’이나 ‘모성애’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것이나 이미 낳아서 키우는 것을 비난하거나 우습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결정이니까. 하지만 이 사회는 왜 여성에게 임신과 육아를 강요하는가. 나는 늘 그것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물론 이제는 이유를 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어머니를 성모마리아로 포장하고 이 규격에 모든 여성을 집어넣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여성의 노동력을 도움 삼아 남성들이 ‘원래의 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정이 가정에서 억압적으로 강요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민주적인 토론을 거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전통적인 방식대로 분류한다. 화목하게 불평등을 인정하는 형태다. 물론 한계는 명확하다. 부엌에서 밥그릇에 담뱃재 터는 남자들은 사라졌지만, 달라진 건 그런 무시무시한 몇몇 폭력들뿐이다. 단칼에 경력 단절이 되어야 했던 A를 생각하면 된다. 그녀는 이제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처럼 존재했던 ‘어머니 노릇’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다. 남편은 ‘원래의 일’을 계속 잘할 것이고.
(…) ‘만들어진 모성’의 위험성은 여성의 아이 돌봄 의무가 신(神)성하게 포장될수록 정작 돌봄의 당사자는 인(人)간적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모성이 ‘자연스럽다고’ 할수록 결국 여성들에게 자녀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 전가를 가능케 하기에 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자주성은 파괴될 확률이 높다. 아버지는 육아가 서툴러도 격려를 받지만, 어머니는 완벽해도 본전인 세상은 이 배경에서 탄생한다. 예능 프로에서 남자가 기저귀만 갈아도 자상한 이미를 얻을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행여 실수라고 해도 그저 ‘아빠에게 애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면서 유머 게시판에 떠돌 뿐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아니 엄마가 저러면 되나’라는 제목의 글들이 순식간에 퍼져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이렇게 엄마들을 이용해 먹는 사회에서는 육아법도 제각각이다. 스킨십을 자주 해 주어야 한다, 목욕을 같이 해 주면 좋다,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 등. “마냥 좋아 보이는 지침들을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한다고 긍정적인 가정환경이 조성되는 것이 아닌데, 이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는 육아서에 나오는 내용을 따라 할 때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스킨십이 많으면 좋다’는 것에는 전제가 있다. 아이가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부모로부터 일상적으로 느껴야 그 연장선에서 목욕이라는 도구가 시너지를 낸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는 부모들이 아이와의 수평적 소통을 위한 노력을 일관되게 하기란 무리다. 파편적으로는 아이와 좋은 추억이 있겠지만 일상의 누적된 경험은 부족하게 마련이다. 이런 가정에서 ‘스킬’만 흉내 내는 건 별 소용이 없고 부작용이 있을 뿐이다. 아빠와 딸이 놀이동산에 같이 오기는 왔는데 영 따분해하는 딸의 표정이나 키즈카페 한쪽에서 졸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게 좋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사람 사이의 응어리가 몇 시간 나들이로 전화위복 될 리 없다. ‘평소’가 우여곡절인 사람의 ‘일시’ 이벤트는 효과가 없다. 육아서를 읽고 실천한 아빠는 “놀이동산, 키즈카페도 함께 가줬는데 너는 왜 그러냐!”라면서 항변하겠지만 그럴수록 자녀와 부모 사이는 멀어진다. 그 이유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를 포함해 여러 요소가 얽혀서 나타난 육아의 고충이 도깨비방망이 한번 휘두른다고 말끔해지지 않음은 분명하다.
육아서들은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를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은 사람들이 가정교육에 집착해도 문제는 지속된다. 이는 가정교육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보다 큰 ‘사회구조적’ 측면이 육아의 현장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중산층 되기조차 버거워진 이 시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러한 요인들이 개인에게 끼치는 차이를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 사회 환경이라는 변수를 배제한 채 ‘육아 비법’이 강조되면, 이런 비법이 무용한, 다수의 부모들을 짓누르고 있는 요인들이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 심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이런 육아서는 단연코 반사회적이다.
그중 하나가 ‘친구를 만들어 주는 방법’으로 외모가 단정해야 한다, 아이가 비만이거나 몸에 냄새가 나면 아이와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필요할 경우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육아서다. 살아가는 데 사회성은 중요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사회성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저자 말마따나 “주변에 사회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중에는 어색한 분위기 풀어보겠다면서 저질 농담을 유머랍시고 일삼는 부류가 있다.”) 누구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놀리는 아이야말로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비만은 ‘개인의 질병’이지 타인에게 놀림이 될 소재가 아니다. 병원은 뚱뚱하고 냄새나는 친구를 따돌리는 아이가 가야 한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왕따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아이에게 남을 따돌리지 말고 놀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맞다.
우리의 부모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법 - 육아 실전편’을 집어들었을 뿐이다. 이들에게 육아서는 ‘가운데(평균)는 당연하고 더 노력해서 더 위로’ 진입할 비법을 어쨌든 효과를 본 사례를 근거 삼아 제공한다. 이걸 따라 하는 가정이 과연 행복해질지 의문이다. 아니 가정은 행복해질지 모르겠는데, 그런 가정들이 모인 사회가 얼마나 괴기스러워질지 걱정이다.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회의 면면이 다 내가 알고 보았으며 이미 익숙한 것이라 읽는 내내 공감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후기를 더 이상 길게 쓰면 가독성이 떨어질 것 같아 이쯤 해 두겠지만, 이 말만큼은 꼭 공유하고 싶다.
사랑이 넘치는 불평등한 우리 집.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 표현한 우리 집의 모습이다.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만 결국에는 기울어진 성별 불평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 사랑이 넘치든 말든 불평등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어찌 사회적으로 권장할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별 불평등도 물론 문제이지만, 권위적인 부모에서 억압받으며 자란 자녀들이 보는 가정의 모습 또한 같은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표현에 공감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몇이나 될까? 결혼이 더 이상 ‘인륜지대사’가 아니게 된 시대에, ‘기껏 결혼했는데 억울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중산층 진입을 위해 아이에게 엄마를 갈아넣어 투자하고 아이를 몰아붙이는 괴이한 육아법을 따르는 부모들은, 그리고 이 사회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주 흥미롭고 잘 쓴 책이다. 저자 본인도 “부귀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인 사교육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학원을 보내고 구몬학습을 시킨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점이 이 책에서 보여 주는 사회 분석에 더 힘을 싣는다. 결혼과 육아를 현재 하는 중이든 아니든, 미래 세대를 보호하고 같이 키워 나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다들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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