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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애나 위너, <언캐니 밸리>

by Jaime Chung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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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애나 위너, <언캐니 밸리>

 

 

IT 스타트업 두 곳과 오픈소스 스타트업(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깃헙(GitHub)’)에서 일한 저자가 IT계에서 흔한 성차별과 맹목적이고 자본적인 돈의 추구, 그리고 그것이 도시와 사회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폭로하는 논픽션이다.

나도 IT 전공자이자 여성으로서 이 업계에 성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수업에 20% 정도만 여학생이어도 ‘오, 웬일로 여학생이 많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바로 이 바닥이니까.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즉 과학·기술·공학·수학)계의 여성들은 나름대로 그룹을 만들어 꽁꽁 뭉치려고 노력하지만, 절대적인 수가 부족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하다.

본인이 인정하기에도 ‘실리콘 밸리에 문외한’이었던 저자는 원래 출판계에서 박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전자책과 관련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서 실리콘 밸리와 IT 업계의 문화에 발을 들이게 된다. 물론 저자는 프로그래머가 아니므로 고객 관리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프로그래머와 비(非)프로그래머 사이의 연봉 차이나 스톡 옵션 여부 같은 차별도 경험한다. 그러면서 테크 업계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책 초반에 나오는 이 말, “몰랐던 사실이지만, 테크 업계는 숨 막히는 경쟁을 지향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로 평가하는 그 쇼핑몰의 기업 문화[아마존-인용자]를 숭배했다.”가 바로 그것이다.

기업 또는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더 하기를 바라는 건 비단 한국의 이야기만이 아닌 듯하다. 애나 위너도 처음 일하게 된 스타트업에 대해 이렇게 썼으니까.

일일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할 일을 하는 게 창업자들이 내게 바라던 모습이란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알아서 일하는 적극성이야말로 진정한 스타트업 정신에 걸맞았으며 쓸모없는 자리도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러한 전략은 테크 업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했는데, 내게는 영 어색하기만 했다. 내 상상력의 한계는 여전히 출판업계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자책 스타트업으로서 독서 모임을 열어 독자들과 직접 만나볼 것을 제안했다. 독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어떨까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는 요즘 유행하는 커피 트럭을 출판 관련 행사장에 보내 공짜 에스프레소와 빵을 나눠 주는 선택을 했다. 보통 그런 행사에서는 증정용 에코백이나 소설가의 데뷔작 비매 판본만 나눠 줘도 반응이 뜨거웠다. 나는 큰 그림을 바라보며 전략을 짜지 못하고 있었다.

’애나는 배우려고만 하고 행동하질 않아.’ CEO가 뜬금없이 단체 채팅방에 이런 메시지를 띄웠다. 창업자들끼리만 있는 채팅방에 쓰려던 걸 잘못 보낸 사고였다. CEO는 곧바로 회의를 열어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는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나는 언제나 뭔가를 배우고 싶어 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왔다. 배우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창업자들처럼 뭐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담력이 내게는 없었다. 그들이 지닌 자신감과 권리 의식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뭐든지 시도하고 ‘소유’하는 것이 스타트업계의 불문율이란 것도 나는 미처 몰랐다. 테크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허락이 아닌 용서를 구하라’라는 명언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부하는 심정으로 스타트업 정신에 관한 블로그 글들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려 노력도 해보았다. 알고 보니 CEO도 1년 전 자기 블로그에 <스타트업에서 한 달 만에 존재감 남기는 법>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사무실 벽에 붙어 있던 그 글을 이제껏 발견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그의 조언은 다음과 같았다. 주인 의식을 가질 것, 긍정적으로 행동할 것, 그리고 자기 의견을 낼 것.

 

물론 이래 놓고 이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은 “고통스러운 일대일 면담”을 진행한 후 그녀를 해고한다. 다른 일자리를 연결해 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도대체 ‘주인의식’이란 게 뭔지. 본인이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좀 더 나가면 월권이자 정신 착란 아닌가?

저자가 두 번째로 입사한 곳은 데이터 분석 회사인데, 고객 상담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일을 잘하려면 “고객사의 코드와 대시보드를 직업 볼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을 ‘갓 모드(God Mode)’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고객사의 거래 내역이나 연락처, 조직망 같은 정보를 필요하다면 언제든 열람할 수 있었고, 고객사가 수집한 회원들의 정보도 통째로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는 민감한 프라이버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는 회사 내부적으로 고객사 데이터 열람을 제한하는 방침이 세워지리라고 다들 예상했다. 그러나 적어도 당분간은 그것이 회사의 우선순위가 아니란 것도 알았다. 직원에게 이 정도로 데이터 열람 권한을 주는 것은 테크 업계에서 예삿일이었다. 규모가 작아 엔지니어들이 여러 업무에 두루 관여하는 신생 회사일수록 특히 그랬다. 차량 공유 스타트업의 직원들은 플랫폼 사용자의 승차 이력을 조회해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이동 경로를 캐낼 수 있다고 했다. 모두가 싫어하는 그 소셜 네트워크[페이스북-인용자]에도 갓 모드가 존재했다. 초창기 직원들은 회원의 개인 활동과 비밀번호에 접근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직원에게 고객 데이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허용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통과의례,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초창기 직원들은 가족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직원이 고객 데이터를 열람하는 것은 필요와 요청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로 여겨졌다. 데이트 앱이나 쇼핑 서비스, 피트니스 트래커, 여행 예약 사이트에 저장된 연인, 가족, 동료의 개인정보를 훔쳐보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동네 안전 지킴이 플랫폼이나 크리스천 남성을 위한 자위 끊기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구경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고객의 정보를 염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기업들은 자신이 자리한 도시와 사회의 생태계를 바꿔 놓는다. ‘실리콘 밸리’와 가까운 샌 프란시스코에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누구나 알 만한 테크 대기업들의 본사와 우버, 에어비앤비, 슬랙 등 잘 알려진 스타트업들도 자리해 있지만, 노숙자 문제도 심각하다. 돈이 그곳에 모여 집값이 오르니 일자리를 잃거나 월세가 오래 밀리거나 하면 바로 길거리행인 것이다. 물론 약물 중독 문제도 원인 중 하나지만.

한편 쌓여가는 부의 그늘 속에서 노숙촌은 점점 커져갔다. 노숙인들은 지하철역에서 잠을 자고 용변을 보고 마약 주사를 놓았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와 생산성 앱을 홍보하는 간판 바로 아래에 드러누운 그들을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우아하게 피해 다녔다. 하루는 이른 아침 누군가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적이 있다. 길모퉁이에서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가전제품을 만드는 자국적 회사의 로고가 찍힌 찢어진 티셔츠 한 장만을 달랑 걸친 채.

타인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낯설고 불편한 경험이었다. 적나라한 고통과 넘쳐나는 희망이 이 정도로 딱 붙어 존재하는 것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격차를 익히 들어보았음에도 직접 목격하니 상상 이상이었다. 뉴요커였던 나는 당연히 이러한 일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었다. 볼 만큼 다 봤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알고 나자 겸허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테크 업계에 만연한 성차별은 깃헙에 입사한 저자가 콘퍼런스에 참석한 꼭지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정말이지, 이게 픽션이 아니고 논픽션이라니….

‘남성 동지 패널 총회’ 행사장에서 여성 엔지니어 무리가 참석자들에게 직접 만든 빙고 종이를 나눠 주었다. 빙고 칸에는 남성들의 꼴불견 언행이 적혀 있었다. ‘자기 엄마 얘기하기’, ‘우리 회사는 안 그래, 같은 소리 하기’, ‘웨어러블’, ‘남성 임원이 선의로 그런 것이라고 두둔하기’, ‘페미니즘 운동이 테크 업계에 진입하려는 여성을 겁준다고 주장하기’ 등등. 빙고의 정중앙 칸에는 ‘파이프라인’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파이프라인 이론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STEM 분야의 여성과 소수자 인구가 애초에 몇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업계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실제 채용 과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믿기 힘든 소리였다.

같은 줄에 앉아 있던 여성 엔지니어에게 빙고에 적힌 ‘웨어러블’이 무슨 의미냐고 묻자, 그녀는 무지개색 커튼이 드리운 무대를 대충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스마트 브라, 테크 주얼리 같은 거. 남자들은 여자들이 그런 종류의 하드웨어에만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죠.” 스마트 브라라니? 나는 브라 와이어를 매만지며 상상에 빠져들었다.

남성 동지 패널들은 하나같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백인 경영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내 차별에 대응하는 방법에 관해 저마다 조언을 내놓았다. “최고의 방법은 누구보다 일을 잘하는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을 밀어내면서 탁월함을 발휘하세요.” 스카이다이빙이 취미인 걸로 유명한 거대 검색 엔진 회사의 부사장이 말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계속 최선을 다하세요.” 다른 남자가 읍소하듯 말했다. 행사장에는 빙고 칸을 채우는 연필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자신감을 키우세요. 모두에게 들리도록 자신 있게 요구하세요.” 세 번째 남자가 말했다.

”엔지니어들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파이프라인 이론처럼요.” 스카이다이빙이 취미한 남자가 또다시 말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연필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빙고!”

 

책을 읽으며 과연 이게 내가 경험하게 될 IT 업계인가,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게임업계에서 대기업에 속하는 ‘블리자드’도 아주 지독하게 역겨운 방식으로 여성 직원들을 차별하고 성추행을 가했으니까 (참고). 그래도 피할 수는 없다. 변화가 필요한 곳이라면 내가 변화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테크 업계를 비롯해 성차별이 만연한 곳은 더 널리 알려져서 자정 노력이 지속되도록 눈치라도 줘야 한다.

책에 옮긴이 각주가 꼼꼼하게 달려 있어서 아주 좋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지역명이라든지, 저자가 대놓고 이름을 대지 않는 IT기업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 옮긴이가 각주를 달아 놓은 게 어찌나 고맙던지. 이 정도로 열심히 일하신 옮긴이가 옮긴 책은 믿고 볼 수 있지! 이렇게 훌륭한 책을 써 준 저자에게도 감사하다.

극한으로 이익만 추구하면서 그 이윤 추구 행위가 지역이나 사회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현대 기업의 모습을 잘 보여 주어서, IT나 테크 업계 관련한 이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참고로 제목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는 로봇처럼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을 너무나 닮아 불쾌하게 느껴지는 지점 또는 그런 현상을 가리킨다. 또한 여성 게이머에게 가해지는 온갖 성차별적 행위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딜루트의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를 읽어 보시라. 이 책은 나도 서평을 쓴 적 있다.

2021.06.28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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