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Babette’s Feast(바베트의 만찬)>(1987)
⚠️ 아래 영화 후기는 <Babette’s Feast(바베트의 만찬)>(1987)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가브리엘 엑셀(Gabriel Axel)
19세기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황량한 서해 해변가의 작은 마을에는 청교도인인 마르티네(버짓 페더스 피엘 분)와 필리파(보딜 카이어 분)가 산다. 청교도의 한 종파를 이끌었던 목사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 두 자매는 아직 아버지를 기억하는 신도들과 예배를 올리며 소박하게 산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시절, 그러니까 50년쯤 전, 두 자매는 아주 아름다웠고 그들이 좋다는 남자들도 많았다. 마르티네는 로벤히엘름(자를 쿨레 분)이라는 스웨덴 기병대 장교에게, 필리파는 파리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한 바리톤 오페라 가수 아실 파팽(장-필립 라퐁 분)에게 구애를 받았지만 둘 다 자신의 구혼자를 거절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그러다 35년 전, 바베트(스테판 오드랑 분)라는 한 프랑스 여성이 아실 파팽의 편지를 들고 덴마크의 두 자매 집에 찾아온다. 그녀는 파리 코뮌 때문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실 파팽에게 일종의 추천장을 받아 이곳에 일하러 온 것이다. 두 자매는 바베트를 고용할 돈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임금을 받지 않겠으니 일하게만 해 달라는 이 불쌍한 여인을 돌려 보낼 수도 없었으므로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바베트는 14년간 두 자매의 요리사이자 가정부로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는 자신과 파리의 유일한 연결고리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1만 프랑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잘 대해 준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신도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들의 종파를 세운 아버지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말이다. 두 자매는 이를 거절하려 했지만 바베트의 간절함을 거부할 수 없어서 결국 허락한다. 바베트는 며칠 휴가까지 내고 자신의 조카를 데리고 필요한 재료를 조달해 온다. 마침내 그날, 이제는 장군이 된 로벤히엘름까지 총 열두 명이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바베트는 청교도적이고 금욕적으로 살던 두 자매와 동네 사람들이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화려한 만찬을 차려낸다. 그 전까지 서로 흠잡고 싸우기 바빴던 신도들은 바베트의 만찬을 먹고 다시 태어난 듯 서로에게 용서를 구한다. 식사가 끝나자, 로벤히엘름 장군은 마르티네에게 정신적인 사랑을 고백하고 떠난다.
손님들이 모두 떠난 후, 두 자매는 바베트에게 아주 훌륭한 만찬을 차려 준 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바베트는 사실 자신이 그 만찬을 준비하는 데 복권 당첨금으로 받은 1만 프랑을 다 써 버렸음을 고백한다. 이에 충격받은 두 자매는 바베트를 걱정하지만, 바베트는 “예술가는 절대 가난하지 않아요.”라며, 오히려 예술가는 자신의 능력을 가능한 한 모두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만을 후회할 뿐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이 만찬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필리파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결국 천국에서 너는 신께서 네가 되기를 의도하신 그 예술가가 될 것이며, 너는 (그 예술성으로) 천사들도 황홀하게 할 거야!’라며 말해 주고 영화는 끝이 난다.
줄거리 요약이 좀 길긴 하지만 아래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할 때 이걸 읽으시는 분들이 헷갈리지 않기를 바라서 좀 자세히 썼다. 영화 자체가 원작인 이자크 디네센(카렌 블릭센의 필명)의 단편 소설 <바베트의 만찬>을 거의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소설만 읽어서는 이야기 흐름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영화를 보는 게 도움이 된다. 딱 한 가지만 소설과 다른데, 원래 소설 속 배경은 노르웨이 피오르 지역의 조그만 산골 마을 베를레보그(Berlevåg)이다. 그런데 가브리엘 엑셀 감독은 실제 베를레보근 황량하고 조용해야 하는 마을 치고 너무 컬러풀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결국 배경이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의 서해 해변가 마을로 바뀌었다. 이것 빼고는 영화를 위해 원래 줄거리를 벗어나거나 크게 바꾼 점이 없다.
이 영화 후기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가 ‘<바베트의 만찬>의 요점이 뭐냐’라는 질문에 바베트의 만찬은 ‘바베트가 두 자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행위’라는 답변이 달린 걸 봤다. 글쎄, 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베트가 두 자매와 신도들, 로벤히엘름 장군에게 삶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두 자매와 신도들은 목사의 가르침에 따라 금욕적으로 살았고, 요리법도 단순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다. 바베트가 두 자매에게 왔을 때 두 자매는 바베트에게 그들의 방식대로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데 재료도 값싼 것이고 요리 방법도 대단하지 않다. 물론 바베트는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카페 앙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으므로 두 자매가 가르쳐 준 똑같은 요리를 해도 더 맛있게 한다(극 중에서는 똑같은 (죽처럼 생긴) 요리인데도 바베트가 해 준 요리는 맛있게 먹으면서 두 자매가 한 요리는 떫다는 듯이 먹는 장면도 나온다). 워낙에 소박한 음식만 먹어 온 터라, 바베트가 만찬에 쓸 바닷거북까지 산 채로 공수해 오자 두 자매들은 혹시나 바베트가 마녀는 아닌지, 감각적 쾌락을 선사하는 요리로 자기네들을 홀리려 하는 건 아닌지 걱정까지 한다.
그 정도로 그들은 삶의 단순한 기쁨조차 거부하며 금욕적으로 살고 있었는데, 바베트가 차린 만찬을 맛보고 ‘진짜 맛있는 걸 먹는 행복함’을 알게 된다. 위에 줄거리 요약에도 썼지만 그 전까지 싸우던 신도들이 바베트의 만찬을 먹고 미안했다 사과하고 서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인다(근데 솔직히 나라도 맛없는 거 먹고 살면 기분 나빠서 틱틱대다가 맛있는 거 먹고 기분 좋아지면 착해질 듯). 소박한 요리에서 맛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는 건 물론 미덕이지만, 쾌락이 자신을 무너뜨릴까 봐 일부러 맛없고 단순한 요리만 먹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내가 보기엔, 자신에게서 (맛있는 식사를 차려먹는 것처럼) 단순한 기쁨, 쾌락을 빼앗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너무 우울하다. 쾌락에 너무 깊이 빠져 나약해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도 아예 쾌락을 전부 빼앗는 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절제나 금욕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은 신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믿음은 있어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쾌락에 너무 빠져 스스로의 힘으로 적당한 균형을 맞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난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쾌락을 빼앗는 식으로 자기를 벌주는 게 어떻게 자기 자신과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나는 이런 류의 사고방식을 보면 안쓰러워진다. 삶은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바베트가 최고로 멋진 만찬을 차리기 위해 1만 프랑을 모두 다 써 버렸다는 점은 예술가가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올인’하는 성향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마르티네와 필리파가 바베트에게 얼마나 잘해 줬길래 1만 프랑어치 만찬으로 보답하는지도 놀랍다). 아실 파팽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아래 인용문 참고). 한번 요리를 할 거면 최고로 좋은 재료로 최선을 다해서 하고, 노래를 해도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모두 보여 주는 게 바로 예술가의 정신이라! 요즘엔 어째서인지 힘을 ‘숨기는’ 게 멋있다고 여겨지는 듯하지만, 나는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왜 숨겨야 하지? 힘을 사용하면 누가 잡아가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고 그 힘으로 타인에게 기쁨이나 어떤 멋진 경험을 선사하는 게 더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에너지를 아끼거나 실력을 일부러 숨기는 거 없이 정말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든 걸 다해 예술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그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걸 보면서 느끼는 감탄이나 경외심, 뭐 그런 것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정말로 그렇게 예술을 한다면 아쉬움이나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자긍심과 만족감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로 행복하게 만든 사람들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를 테니 왜 바베트가 “예술가는 절대 가난하지 않다”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맛있는 요리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맛(美味)을 보여 주었는데 그런 이의 내면이 어떻게 가난할까.
그러자 마르티네가 말했다. “그럼 이제 평생 가난하게 살게, 바베트?”
“가난하게요?” 바베트가 말했다. 그녀는 혼자는 아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저는 절대 가난해지지 않을 거예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씀드렸지요. 마님, 위대한 예술가는 절대 가난하지 않아요. 마님,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 있어요.” Then Martine said: ‘So you will be poor now all your life, Babette?’
‘Poor?’ said Babette. She smiled as if to herself.
‘No, I shall never be poor. I told you that I am a great artist. A great artist, Mesdames, is never poor. We have something, Mesdames, of which other people know nothing.
“무슈 파팽도 그랬어요.” 그녀[바베트]가 말했다.
”무슈 파팽?” 필리파가 물었다.
”네, 마님의 무슈 파팽이요, 우리 불쌍한 마님.” 바베트가 말했다. “혼잣말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도록 권장되거나 박수 갈채를 받는 것은 끔찍하고 참을 수 없다.’라고요. 또 말씀하시길, ‘세상에는 예술가의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긴 울부짖음이 있으니, 내가 최선을 다 하게 해 달라는 것뿐이다’라고 하셨어요.”
‘It was like that with Monsieur Papin too,’ she said.
‘With Monsieur Papin?’ Philippa asked.
‘Yes, with your Monsieur Papin, my poor lady,’ said Babette. ‘He told me so himself: “It is terrible and unbearable to an artist,” he said, “to be encouraged to do, to be applauded for doing, his second best.” He said: “Through all the world there goes one long cry from the heart of the artist: Give me leave to do my utmost!” ”
이 감명 깊은 영화에서 굳이 단점을 하나 찾는다면, 내 친애하는 이웃님 HEY님 말마따나 ‘외모 더치 페이’가 안 된다는 것 정도다. 마르티네와 필리파는 젊었을 적에 뛰어난 미인이었다는 설정이라 배우들도 (지금 기준으로 봐도) 아름답고, 바베트 역의 배우 역시 마찬가지로 단정한 미인이다. 그런데 마르티네를 마음에 품었던 로벤히엘름 장군은 그냥 콧수염 난 근엄한 아저씨고, 필리파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그녀에게 구애했던 아실 파팽은 둥실둥실하고 유쾌해 보이는 아저씨다. 아니, 이렇게 뛰어난 미인들에게 접근하려면 외모가 어느 정도 받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현실이야 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쳐도 이건 영화니까 적당히 미화시켜서 외모 레벨을 비슷하게 맞춰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젊은 여자는 뭐 돈이 많거나 지위 높은 아저씨를 좋아하는 줄 아나… 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젊은 여자들도 젊고 잘생긴 남자 좋아해요^^;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영상 미디어로 옮길 때 분명 현실보다 훨씬 매력적인 배우들을 기용하는 짓은 잘도 하면서 말이다(예컨대 영화 <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나는 악마를 사랑했다)>(2019)에서 테드 번디라는 극악한 살인마의 역할을 매력적인 배우 잭 에프론이 맡았고,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드라마 <Dahmer(다머)>(2022)에서 연쇄 살인마 제프리 다머의 역할은 에반 페터스가 맡았다). 외모 더치 페이 좀 안 됩니까? 😤
바베트가 차려내는 만찬의 요리 하나하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기사가 도움이 될 듯하다. 삶에서 단순하지만 마땅히 사람이 누려 마땅한 즐거움을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바베트의 만찬>을 추천한다. 원작 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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