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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Ten Little Mistresses(텐 리틀 미스트레시스)>(2023)

by Jaime Chung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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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Ten Little Mistresses(텐 리틀 미스트레시스)>(2023)

 

 

⚠️ 아래 영화 후기는 <Ten Little Mistresses(텐 리틀 미스트레시스)>(202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준 라나(Jun Lana)

살다 보면 때때로 내 세상을 넓혀 주는 일이 일어난다. 예컨대 내가 이 필리핀 영화를 본 게 그렇다. 나는 그저 아마존 프라임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찾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고, ‘필리핀 영화네? 필리핀 영화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한번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클릭했다. 그리고 나는 약 2시간 후 영화가 끝났을 때 울려퍼지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이 영화 재밌겠는데?’라고 생각하게 만든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돈 발렌틴(존 아실라 분)이라는 백만장자는 얼마 전 팬데믹으로 아내 차로(체리 파이 피카체 분)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60번째 생일날, 열 명의 정부(情婦)를 모두 자신의 집에 불러모으고 선물을 잔뜩 안긴 뒤, 그들 앞에서 큰 발표를 하겠다고 계획한다. 돈 발렌틴의 아내가 살아 있을 때부터, 몇십 년 전부터 그와 바람을 피워 온 정부들은 이 발표가 ‘너희들 중 한 명과 결혼하겠다’라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사실 돈 발렌틴을 모셔 오던 하녀장 릴리스(유진 도밍고 분)와 결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사실을 발표하기 직전, 그는 늘 챙겨 먹던 식이 보충제를 먹다가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독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데! 트레일러가 요약하듯, 이 영화는 ‘치정 살인 미스터리(정확히는 ‘정부 살인 미스터리murderous mistress mystery’인데 두운이 맞는다)’이다.

한 명의 남자가 죽고, 이와 관련된 여자들이 한 다스(정부 열 명+시녀장 한 명+ 시녀장의 말을 충실히 잘 듣는 하녀 한 명 = 12명) 모여서 서로를 의심하고 누가 범인인지 찾아나가는 이야기라니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는 중에도,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8 Femmes(8명의 여인들)>가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필리핀 영화를 접할 일이 어디 흔한가? 이색적인 경험을 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 영화는 의외로 재미있기까지 했다.

내 생각에 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일단 제각기 개성을 가진 열 명의 정부들이다. 한 명 한 명 소개하기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나름대로 짤 한 장으로 정리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든 건 바벳(포쾅 분)이다. 제일 기 세고 드세며 (내가 이 표현을 긍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점을 알아봐 주시라) 필터링 없이 거친 표현도 서슴없이 내뱉는 게 딱 내 스타일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레이디 G(크리스티안 배블스 분)는 레이디 가가 짭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남자다. (여동생인지 누나인지는 모르겠지만) 누이가 돈 발렌틴 때문에 원래 좋아하던 노래 부르기도 그만두고 자살해서 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여장을 하고 이 모임에 온 것이다. 어쩐지, 첫 등장부터 ‘엥, 여자의 골격이 아닌데?’ 싶더라니 ㅋㅋㅋㅋ 디바(크리스 베르날 분)는 헬가(아고트 이시드로 분) 밑에서 일하던 미용사였는데, 헬가에게 성형 수술을 받았고 그 얼굴로 돈 발렌틴을 유혹한 듯하다. 대화를 보면 디바는 계속해서 헬가가 한 말을 따라 하고 행동도 따라 한다. 문영(샬린 산 페드로 분)은 K 드라마 광팬이라 한국어로 몇 마디씩 끼워 넣기 하는데, 비코즈(아드리아나 소 분)가 한국인이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한마디로 패션 한국인 ㅋㅋㅋㅋㅋㅋ 릴리스는 파란 눈이다. 안 그래도 극 중에서 정부들 중 한 명이 렌즈 낀 거 아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릴리스 주장에 따르면 진짜 본인 눈 색깔이라고.

어쨌든, 열 명의 정부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돈 발렌틴이 죽은 이후 예를 갖추기 위해 상복을 입은 장면까지, 정부들의 의상이 하도 화려해서 무슨 ‘미스 필리핀’ 뽑는 자리인 줄 알았다. 상복이란 것도 그냥 옷이 검은색이다 뿐이지 전혀 소박하거나 노출이 적지 않다. 이쯤 되면 돈 발렌틴은 패션쇼를 위해 이용당한 수준. 열 명의 화려한 의상 (옷+머리 장식 포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열 정부들이 첫 등장할 때 모습.

 

열 명의 정부 외에도 이 영화의 주조연으로 두 명의 여자가 더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위에서 말한 하녀장 릴리스이고 다른 한 명은 릴리스를 잘 따르는 하녀 치클렛(도나 카리아가 분)이다. 치클렛은 ‘셜록 주니어’라는 필리핀 드라마의 팬으로, 드라마 덕질을 하다가 추리를 배우게 되었다. 돈 발렌틴의 시신이 분홍색으로 변한 것으로 보아 청산가리를 먹은 게 틀림없다는 추리를 해낸 것도 바로 이쪽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의외로 우리가 공감할 만한 ‘대중 문화’ 소재가 여럿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돈 발렌틴이 준 선물을 한아름 받고 흥분해서 꺅꺅대는 정부들의 모습을 ‘BTS 공연장에 온 것 같다’라고 표현하거나, 필리핀계 호주 모델이자 미스 유니버스까지 따낸 모델 카트리오나 그레이(Catriona Gray)를 언급하거나, ‘이름점(이름 궁합 테스트)’ 어쩌고 하는 대사까지. 레이디 G가 레이디 가가 짝퉁인 건 말할 것도 없고(레이디 G에게 누구냐고 묻는 한 정부의 질문에 레이디 G가 누군지 맞혀 보라고 하니까 “시아(Sia)?”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대사에 필리핀어(타갈로그어)뿐 아니라 영어와 스페인어가 섞여 있어서 자막을 보면 대충 배우들이 뭐라고 하는지 발음은 대충 들리는데 대부분 거의 그대로 가져왔더라. 자막에 로컬라이제이션(localisation)을 잘한 것도 있겠지만 원래 애초 각본을 그렇게 쓴 듯하다. 필리핀 대중 문화도 꽤 세계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영향받았구나, 하고 느꼈다. 덕분에 문화를 잘 모르는 나라의 낯선 작품을 본다는 어색한 느낌이 크지는 않았다.

위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오종 감독의 <8명의 여인들>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솔직히 이에 영향받은 면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막대한 유산을 탐내어 저지른 살인 사건에서 모든 이들이 다 나름대로 살인할 만할 이유, 즉 원한이 있고 살인할 방법도 있어서 모든 이들이 다 의심받고 또 의심하게 되는 건 이런 ‘살인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기본 설정이나 다름없다. 그런 면에서 <Knives Out(나이브스 아웃)>(2019)를 벤치마킹한 것 같기도 한데, ‘모든 이들이 의심받는다’라는 설정은 그렇게까지 잘 구현된 것 같지 않다. 열 정부들 중 몇몇만 의심받는 느낌. 하기야, 인물이 열 명이나 되니 각각의 이야기를 다 보여 주기도 어렵고 시간적으로 제한이 컸겠지만. 하지만, 결말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하자면, 열 명의 정부뿐 아니라 하녀장 릴리스와 하녀 치클렛까지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추리는 대체로 릴리스와 치클렛이 다 한다는 건 좀 아쉽다. 그래도 릴리스는 어쩐지 등장부터 남다르더니 (하녀장 릴리스가 여러 하녀들과 함께 ’열 명의 정부들아, 남자에게 빌붙어 콩고물 얻어먹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열 명의 정부를 맞이할 수 있게 집을 청소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꽤 비중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영화 후반에 반전이 있는데 그것도 나는 썩 괜찮았다.

<텐 리틀 미스트레시스>는 필리핀 최초로 아마존과 손을 잡아 아마존 프라임에 선보이는 오리지널 영화다. 결말도 나름대로 교훈적이랄까. 이 정도면 세계에 선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라 생각한다. 취향이 탈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아, 괜찮았네’ 하고 넘길 수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고 평한다면 내가 너무 호의적인 걸까? 뭐, 어쨌든 나야 재밌게 잘 봤으니 만족한다. 유튜브에 보면 아래 영상처럼 열 명의 정부를 각각 취조하는 콘셉트로 찍은 짧은 영상도 있는데 각자 개성이 드러나서 재미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아마존 프라임에서 찾아보시라! 추천!

오라가 든 건 수정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수박 아니면 볼링공처럼 보인다. 극 중에서도 저런 걸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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