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개브리얼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 본 책 리뷰는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디오게임을 개발하는 세 친구들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북튜버가 이 책을 먼저 소개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에도 정식 출간됐고, 밀리의 서재에도 들어왔길래 읽게 됐다. 6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에 긴장했지만 읽다 보니까 너무 재밌어서 이 재미가 끝나지 않길 바랐다.
이 이야기에는 크게 세 명의 주인공이 있는데 세이디, 샘, 마크스이다. 세이디는 열세 살 때 언니 앨리스의 백혈병 항암치료 병원을 수시로 방문했고, 그러다가 우연히 샘이라는 한국계-유대계 남자애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같이 게임을 하면서 둘은 친해지지만, 어느 순간 둘 사이는 틀어지고 만다. 이유인즉,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웃지도 않고 말도 없던 샘이 세이디와 놀며 밝은 모습을 보이는 걸 알게 된 한 간호사가 세이디에게 그 애와 같이 놀아 주면서 봉사 시간을 얻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세이디는 그렇게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샘이 그간 나를 동정해서 나랑 시간을 보낸 거냐며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그 둘이 다시 만나고, 다시 우정을 키우고 게임을 만들어 나간다. 마크스는 샘의 룸메이트인데 집도 잘사는 데다가 성격도 좋아서 아픈 발 때문에 다소 뚱하고 괴팍해진 샘을 알게 모르게 잘 도와준다. 세이디와 샘이 개발한 <이치고>라는 게임의 프로듀서가 되어 줄 정도로 주위 사람과 현실적인 면을 잘 챙기는 마크스까지 이 게임 개발 팀에 합류하게 되니 셋은 무적이나 마찬가지. 셋은 ‘언페이 게임’이라는 게임 회사를 설립하는데 모종의 이유로 이들 사이는 우정과 오해, 사랑 등이 뒤섞이게 된다.
대략 요약하자면 이 정도일 것인데 당연히 이건 엄청 압축한 거고, 실제 이야기는 이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일단 나는 게임을 개발하는 이야기라는 점에 끌렸는데, 개중에 세이디가 (요즘에도 그나마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에 비하면 적은) 여성 게임 개발자라서 그 고충을 잘 드러낸다는 점도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세이디는 이 거북한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여자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으면 붙어다니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자라는 건 옮을까봐 겁나는 질병 같았다. 다른 여자들하고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주류, 즉 남자들한테 넌지시 이런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난 쟤네들하곤 달라. 천생 외톨이였던 세이디조차도 여자의 몸으로 MIT에 다닌다는 것은 고립의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세이디가 MIT에 입학한 해, 컴퓨터과학과에는 여자 신입생이 정원의 3분의 1을 약간 넘었지만 어쩐지 그보다 훨씬 적게 느껴졌다. 몇 주 동안 여자를 한 명도 못 보고 지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남자들은, 적어도 남자들 대다수는, 여자들은 여자니까 멍청하다고 상정했다. 혹은, 멍청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자기네보다 덜 똑똑하다고 추정했다. 남자들은 여자가 MIT에 입학하기 더 쉽다는 추정하에 작동했고, 통계적으로 그것은 사실이었다—여자는 남자보다 합격률이 10퍼센트 높았다. 그러나 이 통계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자체 배제의 가능성이 높았다. MIT의 여자 응시생들은 남자 응시생들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적용했을 것이다. MIT에 들어온 여자들이 실력이 모자라다거나 그 자리가 분에 넘친다는 결론은 얼토당토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이 팽배한 듯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니까 극 중 가상의 게임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특히 세이디가 MIT에서 수업 때 만들어 공개하는 게임 ‘솔루션’이 진짜 기가 막히다.
이번 게임의 무대는 뭔지 모를 작은 기계장치들을 만드는 별 특징 없는 흑백 공장이다. 게이머는 부품을 조립하여 완성할 때마다 포인트를 얻는다. 게임 메커니즘은 도브가 종종 경탄을 표했던 〈테트리스〉를 본따 디자인했다. (도브는 〈테트리스〉가 본질적으로 아주 독창적인—조각을 맞추는 방법을 파악하여 전체를 구성하는—게임이라며 좋아했다.) 레벨이 오르면 더 많은 부품으로 더 복잡한 장치를 조립해야 하는 반면 완수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게임을 하는 동안 여러 번 텍스트창이 뜨면서 이 공장과 여기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포인트를 쓰겠냐고 묻는다. 또한 게임은 공장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면 최고점이 다소 깎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게이머는 원하는 대로 그 정보를 최대한 스킵하거나 최대한 입수할 수 있다.
이 게임의 반전은, 게임 속 공장의 정체이다.
“이겼어요?”
“다들 이기지. 그게 이 게임의 천재적인 면이잖아?”
“다들 지는 거죠.” 세이디가 말했다. “공모자가 되는 게임이니까요.” 천재. 도브가 천재라고 했어.
〈솔루션〉의 요체는, 게이머가 무작정 장치를 만드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간간이 질문도 하고 정보도 얻으면 점수는 낮아지지만 자신이 독일 제3제국에 공급되는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면 게이머는 생산량을 낮출 수도 있다. 제국이 감지하지 못하는 선에서 최소량만 만들어낼 수도 있고, 부품 생산을 아예 중단할 수도 있다. 질문을 하지 않는 게이머는 ‘선한 독일인’으로서 태평하게 최고점을 얻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공장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독일식 활자체 문구가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축하하오, 나치당원! 귀하는 제3제국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소! 귀하는 진정 효율화의 달인이구려! 미디로 손본 바그너가 울린다. 〈솔루션*〉의 핵심은 게임을 점수로 이기면 윤리적으로는 진다는 점이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절멸 정책, 즉 홀로코스트의 공식 명칭이 ‘파이널 솔루션(최종 해결책)’이었다.
이런 기발한 발상이라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감탄해서 이런 게임이 있으면 당장 플레이할 텐데,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게임 안 한 지 좀 됐는데 세이디와 샘, 그리고 마크스가 개발한 게임이라면 다 한 번씩 해 보고 싶다.
저자가 그려내는 캐릭터 모두 이해할 수 있고 공감이 가는데, 나는 특히 세이디가 도브라는 교수와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에 공감했다. 도브는 이미 아내가 있는데 별거 중이라면서 세이디에게 작업을 건다. 세이디는 아무래도 게임 개발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유명한 게임 개발자인 도브랑 사귀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연애의 중심이라고 해야 하나 주권이 상대방에게 가 있는 연애를 할 때 느끼는 그 감정을 너무 잘 표현해서 내가 다 플래시백이 올 정도… 세이디 느낀 거 나도 다 느껴 봤다… 🥲
겨울방학 때 도브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면서 세이디에게 자주 연락하진 못할 거라고 미리 선을 그었다. “가족들, 친척들, 어떤지 알잖아.” 세이디는 자긴 쿨하다고 대꾸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진짜 쿨한지는 알 수 없었다. 쿨해지는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쿨한 여자들은 애인에게 별거중이라는 아내와 겨울방학 동안 만날 거냐고 묻지 않는다. 만약 세이디가 쿨하지 않으면 도브는 관계를 끝낼 것이고, 그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세이디는 도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도브를 만나기 전 MIT에서 보낸 1년 반은 미치도록 외로웠다. 진정한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가 도브라는 친구를 갖게 된 건 강렬한 경험이었다. 도브는 세이디의 삶 구석구석을 비추는 찬란하고 따사로운 빛 같았다. 스위치가 켜지고 불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같이 게임 이야기를 하기에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었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보여주기에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세이디는 도브를 사랑했다, 하지만 좋아하기도 했다. 도브 곁에 있을 때의 자기 자신이 좋았다.
세이디는 최근 들어 도브가 자신에게 흥미를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워지려고 노력했다. 옷을 더 신경써서 입고, 머리를 자르고, 레이스 달린 속옷을 샀다. 좀더 성숙한 애인이라면 와인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 저녁식사 자리에서 식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와인 서적도 탐독했다. 한번은 도브가 지나가는 말로 미국계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스라엘에 대해 무지한지 놀랍다고 하기에, 세이디는 대화가 통할 만한 사람이 되려고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책도 읽었다. 하지만 별 효용은 없는 듯했다.
가끔은 도브가 일부러 꼬투리를 잡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있는 날이면 도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쉬지 않고 프로그래밍만 했는데.” 도브가 내준 업무를 더디게 하면 이런 말을 듣곤 했다. “넌 머리는 참 좋은데 게을러.” 세이디는 도브의 게임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학점을 꽉 채워서 수업도 들어야 했다. 세이디가 이런 사정을 도브에게 얘기하면 이런 말이 날아올 것이다. “절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마.” 또는 “내가 이래서 학생들하고 일을 안 한다니까.” 세이디가 감탄하고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얘기했는데 도브는 그 게임이 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도브는 그 게임이 형편없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놨다. 게임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영화든 책이든 그림이든 다 그런 식이었다. 세이디는 무엇에 대해서든 자기 의견을 곧이곧대로 얘기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화를 시작할 때 “어떻게 생각해요, 도브?”로 말문을 여는 태도를 장착했다.
그러므로 세이디는 쿨하게 굴 것이다, 정부情婦들은 원래 그러니까. 정부라니. 다른 사람이 하는 게임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세이디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상 선택권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 똑똑한 친구가 왜 이렇게 서글프게 웃지?” 도브가 물었다.
“아녜요. 돌아오면 연락 주세요.” 세이디가 말했다.
세이디와 샘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죽이 잘 맞는 파트너십을 넘어서 사랑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조심조심 유지하다가 깨지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깨닫게 되는 과정이 너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가상의 인물 관계인데 왜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하냐!! 세이디와 샘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근데 또 마크스도 참 좋은 사람이라 세이디와 마크스가 사귀었을 때도 실망할 수가 없었다… 마크스 이 좋은 녀석!! 내가 마크스를 진짜 멋지다고 생각한 건, 세이디와 마크스가 결혼할 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세이디는 결혼이란 제도를 믿지 않았는데 마크스가 세이디를 너무 잘 설득함…
너는 작년에 세이디에게 청혼했다. 너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고 와타나베 상은 허락했다. 너는 반지를 샀다. 너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난 누군가의 아내가 된 내 모습이 상상이 안 돼.” 세이디가 말했다.
“네가 아내가 되는 게 아냐. 내가 너의 남편이 되는 거지.” 네가 말했다.
세이디는 그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세이디의 반발이 이렇게까지 거셀 줄 예상치 못한 너는 놀라서 이유를 물었다. 세이디는 이미 집을 너와 함께 공동소유하고 있으니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 했다. 세이디는 공동사업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세이디는 결혼이 여성을 억압하는 고루한 제도라고 했다. 세이디는 자기 성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도 네 성이 마음에 들어.” 네가 말했다. “아주 좋아해.”
나는 이 리뷰에서 가능한 한 캐릭터의 장점이라든지 매력에 대해 주로 얘기했는데, 웬만하면 줄거리를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 책 진짜 재미있으니까 완전 추천합니다!! 좋은 책이라면 늘 그렇듯이 이 책 역시 이걸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같이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 책 읽고 같이 덕토크하실 분들 구합니다 🥰 (1/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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