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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서귤, <급발진>

by Jaime Chung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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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서귤, <급발진>

 

 

내가 사랑하는 서귤 작가님의 최신 (2024년 6월 출간) 장편 소설. 이번에는 장르 소설에 특화된 안전가옥에서 출간됐다. 나야 뭐 서귤 작가님은 믿고 읽으니까 줄거리 요약도 안 읽고 그냥 읽었는데, 책 소개를 할 때 그냥 냅다 읽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조금만 맛보기로 보여 드리겠다. 우리의 주인공은 고주운은 어머니의 지인 (’김 사장님’) 찬스로 사설 탐정 사무소에 취직한다. 거기에서 만난 건, 얼굴은 천재이지만 썰렁한 아재 개그를 늘어놓는 이상한 탐정 곽재영이다(헷갈릴까 봐 확실히 해 두자면 곽재영도 여자다). 고주운은 혹시 곽재영이 신입인 자기를 괴롭히는 건가 걱정하는데, 알고 보니 곽재영은 그냥 사차원이었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 본격적으로 급발진 차량 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이 사건은 사실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소설이 2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1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한 악당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이 선언을 까먹을 때쯤, 소설이 결말에 다다랐을 때 진짜 그 악당이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은데 스포일러를 하지 않는 선에서 이 책을 소개하고 영업하려니 어렵다. 일단 이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급발진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상상력을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님의 솜씨 하며, 그 이야기를 맛깔나게 ‘썰’ 풀듯 해 주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서술 하며, 캐릭터들의 관계성이나 매력 하며, 정말 하나하나 대단하고 재미있다.

 

예를 들어서, 고주운과 곽재영의 첫 만남을 보면 내가 방금 말한 모든 것들이 잘 드러난다.

그렇게 들어간 회의실 안에는 사슴이 있었어.

사슴.

포유강 우제목 사슴과에 속하는 중대형 초식 동물의 총칭.

비유적인 표현이야.

길고 곧은 목, 갸름하고 부드러운 얼굴선, 서글서글한 눈을 가진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 일어났어. 고주운을 보더니 버드나무 이파리처럼 눈꼬리가 낭창거리며 휘어. 고주운은 일순간 사무실의 누런 바닥과 거무튀튀한 벽이 페이드 아웃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해. 은은한 조명이 켜지고, 새벽 감성을 일깨우는 몽환적인 팝송 플레이 리스트가 BGM으로 깔리고, 한 송이에 7000원쯤 하는 라넌큘러스가 사방에서 잡초처럼 피어났지. 그와 동시에 고주운의 마음에도 근거 없는 안도감이 번지기 시작했어. 이런 사람이 다니는 회사라면 분명히 괜찮은 곳일 거란 생각. 여기가 내 첫 직장으로 딱이라는 예감. 자신이 이 정도로 심각한 외모 지상주의자였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데 그게 별로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기분 좋게 알딸딸해지던 찰나.

“안녕.”

사슴, 아니 사람의 목소리는 조금 낮은 편이었어. 멀뚱히 있던 고주운이 허겁지겁 허리를 숙여.

“안녕하세요.”

“네가 주운쓰? 나는 재영쓰.”

허리를 숙인 채로 고주운은 생각하지. 무슨 말이지? 사슴들이 쓰는 언어인가? 사슴, 아니 사람, 아니 재영쓰가 고주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햇살처럼 웃어.

“자네 인사하는 각이 아주 살아 있구만. 전 직장에서 각도기로 일했나 보지?”

고주운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재영쓰는 윙크를 날렸어.

“방가방가.”

고주운은 결심했어. 존나게 뛰어서 도망가기로.

이때 고주운은 몰랐을 거다. 곽재영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지. 초반엔 곽재영이 남자였으면 멋진 로맨스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나의 오산이었다. 둘 다 여자라서 더 끈끈하고 애틋한 관계가 된 거라고! 감히 이성애 중심적인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작가님의 큰 뜻도 모르고! 게다가 결말을 보아하니 후속작이 나올 것 같은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거 시리즈물인가요 작가님!? 저 벌써 이불 펴 놓고 기다려요 작가님 🥰

 

이 책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흡인력이 있던지, 평소에 병렬 독서를 하는 나도 이것만큼은 다른 책과 번갈아가며 읽지 않고 이것에만 집중해 사흘 만에 다 읽어 버렸다. 내가 좀 더 책 읽을 시간을 길게 낼 수 있었다면 하루이틀 만에도 끝낼 수 있었을 듯.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내려놓기 싫을 정도로 아주 흡인력이 있다. 스포일러를 하지 못해 이 소설의 엄청난 점을 다 하나하나 짚어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내 팬심을 가득 담아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작가님 보고 계세요? 저는 오늘도 이렇게 영업을 뜁니다! 🥹

 

➕ 소설 내에 서귤 작가님의 전작 <삼국평화고등학교 테러 사건>이 살짝 언급되기도 한다.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포인트랄까.

“그 소설 재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가 21세기까지 이어진다는 설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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