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박상현, <친애하는 슐츠 씨>
저자 박상현은 대체로 미국 뉴스에서 찾은 흥미로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는 ‘오터 레터’라는 뉴스 레터를 발행하는데, 이 책은 ‘오터 레터’에 소개된 글들 중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적절한 글을 골라 엮은 것이다.
이 책은 1부 ‘여자 옷과 주머니 -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와 2부 ‘친애하는 슐츠 씨 - 인류의 낡은 생각과 이에 맞선 작은 목소리들’로 구성된다. 각 부(部)에서 흥미로웠던 꼭지를 하나씩 소개할까 한다. 일단 1부에 ‘여자 옷과 주머니’ 꼭지에서는 제목 그대로 여자 옷에 주머니가 남자 옷만큼 많이 또는 잘 달려 있지 않은 이유를 살펴본다. 사실 이건 유구한 역사가 있다. “서양에서 남자 옷은 항상 여자 옷보다 더 발전된 형태였고, 더 현대적”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지 주머니’가 남자 바지에 생긴 건 1550년대 일인데, 이런 바지는 물론 남자만 입을 수 있었다. 여자들은 복주머니처럼 생긴 주머니에 물건을 넣고, 그걸 옷 안에 달고 다녔다. 그러다가 1800년을 전후로 “마치 기둥처럼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떨어지는 얇은 천으로 만든 드레스가 유행했다”. 이런 실루엣을 내려면 옷 안에 속치마를 많이 입을 수 없었으므로 주머니를 옷 안에 매달고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현대 여성 핸드백의 효시라고 할 만한 ‘레티큘(reticule)’이 생겼는데 여자들이 이걸 들고 다니니 “마치 속옷을 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점잖지 않게 본 것이다”. 예전에는 주머니를 옷 안에 넣어 가지고 다녔는데 이제 그게 옷 밖에 보이니까 남사스럽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죽했으면 치마에 묶는 주머니를 거부하고 레티큘을 들고 다니는 여자는 신붓감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말도 했다”. 하이고… 별걸 다 가지고 ㅈㄹ…
레티큘 (이미지 출처)
여자들에게 원피스에 대해 칭찬을 하면 ‘고마워요! 이 치마는 주머니도 달려 있어요!’라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보여 준다는 밈(이런 것)이 있듯이, 여자들도 주머니를 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패션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데, 아무리 잘나가는 여성용 패션 디자이너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여성이 입었을 때 편안하고 편리한 옷을 만들지 않으면 그건 옷을 입는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명품이고 나발이고 옷에 가짜 주머니 말고 진짜 주머니를 달라고! 옷 바느질도 튼튼하게 하고! 그게 어렵냐? 😫 아래 인용문은 너무나 공감돼서 가져왔다.
2017년 <버즈피드(BuzzFeed)>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가한 남성 네 명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꿰매어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일상생활을 하게 한 것이다. 실험 참가자들은 밖에 나가면서 사원증이나 지갑을 놓고 나가는 실수를 했고, 테이크아웃 음식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데 애를 먹었으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폰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생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본 남자들은 여자가 현대 사회에서 주머니 없이 사는 건 전기가 발명된 세상에서 어둠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머니가 없거나 지나치게 작고 적은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고 살아온 여자들은 하루 실험에 참여한 남자들보다는 익숙하게 일상생활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불편함에 익숙해진 것뿐이다(해나 칼슨의 표현을 빌리면 “당연히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조건화되었다”). 익숙해지지 않은 여자들도 있다. 바로 어린 여자아이들이다. SF 소설가인 헤더 카진스키(Heather Kaczynski)는 세 살짜리 딸이 자기 바지에 붙은 주머니가 손을 넣을 수 없는 가짜 주머니인 걸 알고 불같이 화를 낸 얘기를 소셜미디어에 써서 화제가 되었다. 여자라면 세 살짜리도 장난감을 넣지 못해 들고 다녀야 하는 차별을 겪어야 할 만큼 몸매를 살리는 옷을 입어야 할까?
카진스키는 주머니 문제가 “더 큰 불평등에서 비롯된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말이 맞다면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2부 ‘친애하는 슐츠 씨’ 꼭지는 <피너츠>를 그린 찰스 슐츠에게 해리엇 글릭먼이 쓴 편지에서 제목을 따왔다. 글릭먼은 캘리포니아 주의 교사였는데,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한 직후 인기 만화가인 슐츠에게 편지를 보낸다. 인종 사이의 갈등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자라는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매스미디어에, 즉 슐츠가 그리는 만화에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킬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슐츠는 그러고 싶지만, 흑인 이웃들을 ‘내려다보는(patronizing)’ 태도로 보일 것 같아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답장했다. 글릭먼은 괜찮다면 슐츠의 답장을 자신의 흑인 친구 몇 명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했고, 실제로 그녀의 친구들은 슐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려다보는 태도’라는 비난은 (흑인 아이를 만화에 포함시킴으로써 일어날) 긍정적인 결과를 위한 작은 대가라는 내용이었다. 만화를 통해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친구로서 어울리는 내용을 접한다면 아이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종 갈등과 편견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슐츠는 이에 자신의 만화에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 암스트롱을 등장시킨다. 프랭클린은 웃음거리도 아니었으며,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뿐히 뛰어넘는 캐릭터로 그려졌다(슐츠는 프랭클린이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는 편견과 달리 수영도 하고, 프랭클린의 아버지 역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싸웠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했다).
프랭클린이 첫 등장한 <피너츠>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편견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주제로 삼아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겼다면 저자의 뉴스레터 <오터 레터>도 살펴보시라. 참고로 이 책은 리디셀렉트와 밀리의 서재에서 이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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