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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포크, <심장이 뇌를 찾고 있음>

by Jaime Chung 202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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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포크, <심장이 뇌를 찾고 있음>

 

 

‘기이한 이야기’ 모음 같은 SF 소설집. 책 띠지에 ‘조예은﹒천선란 강력 추천’이라고 쓰여 있는데, 진짜 이 작가들이 강력 추천할 만하다. 책 표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신비스럽고 날카로우며 동시에 생물적인(뭐라는 건지) 느낌이 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

 

이 책에 살린 단편소설들은 기상천외하면서 어딘가 으스스하고 괴담 같은 느낌을 준다. 각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 <저 너머에>는 원래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 책의 원서 제목은 <Out There>이다)으로, ‘블롯’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로맨스 스캠(사기)’을 벌이는 인조인간들을 피해 이기적인 인간 남자와 만나는 여자 이야기이다.

 

  • <지구상 마지막 여인>은 글자 그대로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게 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자기만의 토크쇼를 가지고 있다.

지구상 마지막 여인이 하는 토크쇼의 이름은 〈여성과 함께하는 오후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본보기로 삼았다. 첫 번째 시즌에서는 남자들이 출연해 가죽 의자에 앉아 그들이 알던 여성들을 회상했다. 어떤 남자들은 전 부인이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심리 치료처럼 보였으나 지구상 마지막 여인은 심리 치료사가 아니었기에 그냥 그곳에 앉아 고개만 끄덕이다가 듣고 있다는 표시로 “와”나 “오 저런!”, “힘들겠네요” 같은 말만 내뱉었다. 남자들은 항상 울었다. 지구상 마지막 여인은 남자들의 어머니 이야기가 지겨워져 두 번째 시즌에서는 쇼의 초점을 빵 굽기에 두었다.

 

  • <심장이 뇌를 찾고 있음>은 현대 ‘훅업(hookup, 가벼운 육체적 관계)’ 문화랄지, 성적인 페티시에 집착하는 경향이랄지, 그런 것일 풍자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이 소설 속 두 여자들은 자신이 어떤 남자가 취향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그 취향이란 게 아주 오싹하다. 아래 인용문을 보시라.

그렇게 굉장한 생각은 처음 들어봤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크래커 한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그리고 세라에게 내 기울어진 심실을 고마워할 줄 아는 심장 취향 남자를 열심히 찾고 있다고 했다. 지난주에 첫 데이트를 한 건장한 수학자가 내가 찾던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고도. 그 남자는 은근히 성적인 능력을 암시하는 촌스러운 일자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내 좌심실이 우심실보다 3밀리미터 더 길다고 말하자 그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러운 희망을 품고 내 순환계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혈액형은 O형이며 적혈구 크기는 작은 편으로 지름이 6마이크로미터(0.006밀리미터.)라고. 내 대동맥을 역겨울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자 그의 입이 벌어졌다. 나중에 나는 그의 차 안에서 머리카락을 뒤로 젖혀 여자치고 비정상적으로 뚜렷한 바깥목정맥을 엄지손가락으로 죽 따라 누르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전형적인 정맥 취향 남자였다. 세라는 눈을 굴리며 정맥 취향 남자는 따분하다고 말했다. 모두 흡혈귀가 되고 싶어 하는 한심한 놈들이라고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순환계 취향 남자의 관심을 선호했다. 내가 보기에 정맥 취향 남자는 단순히 성장이 멈춘 심장 취향 남자였다. 세라는 데이트 후에 수학자가 연락했는지 물었다. 나는 아직 전화가 안 왔다고 실토했다. 처음부터 경정맥으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세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근데 또 이렇게 오장육부를 헤집는 이야기를, 요즘으로 치자면 ‘나는 남자 아이돌 뫄뫄처럼 선이 가늘고 날씬한 남자가 좋아’ 또는 ‘나는 남성적인 매력으로 유명한 배우 뫄뫄처럼 덩치가 크고 섹시한 남자가 좋아’ 같은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한다는 게 으스스함의 포인트다.

  • <공허 아내> 속 주인공 엘리스는 ‘공허(空虛)’라는, 인간을 비롯해 자연, 모든 존재를 한꺼번에 삼켜 버리는 벽을 피해 도망간다. 사람들은 이 공허라는 강력한 힘에 잡아먹히면 어떤 다른 공간으로 옮겨져서, 자신이 그것에 잡아먹혔을 때 곁에 있었던 존재와 영원히 같이 지내게 된다고 믿는다. 엘리스는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 로버트의 ‘공허 아내’가 되지 않도록 도망 다닌다.

 

  • <대피소>는 자기가 사는 집 지하실에 있는 대피소에 스스로를 가두는 여자 리스의 이야기이다.

 

  • <마룻바닥 위의 머리>에서는 정말 글자 그대로, 사람의 머리가 마룻바닥에서 튀어나온다.

 

  • <타호 호수>는 타호 호수에서 일어났던, 아니, 다른 곳에서 일어났었던 것 같은 일을 기억하려고 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 <뼈 병동>은 밤이면 뼈가 물렁물렁해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 병동에서 홍일점이었던 여자의 이야기이다. ‘홍일점이었던’이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새로운 여성 환자 올리비아가 등장해 그녀의 남자 친구라고도 할 수 있던 남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당연히 질투와 드라마가 꽃핀다.

“너는 어때, 스탈링?” 릭이 부드러운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줄래?”

물론 그의 말은 농담이었다. 왜냐하면 올리비아는 이미 생긋 웃고 있었으니까. “다들 너무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불쌍한 여자들 좀 내버려두세요.”

올리비아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고 나도 간신히 웃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올리비아를 좋아하고 싶었다. 다른 여자와의 우정에는 관심이 없는 여자, 남자들과만 잘 지낸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얼마나 추한지 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올리비아를 볼 때면, 피가 끓어올랐다. 악의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내 인생을 망칠 수 있기에 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는 내게서 브래들리를 뺏어갈 수 있었다. 애쓸 필요도 없이.

 

  • <암사슴의 눈>은 자기 남편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사슴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에게 총을 맞을 생각까지 하는 극단적인 여자의 이야기이다.

어느 늦은 밤, 나는 길버트 거리에 있는 예전 우리 부부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섰다. 검은색 청바지와 검은색 터틀넥 상의를 입었다. 골목에 주차하고 얼굴에 스키 마스크를 썼다. 집 뒤편으로 다가갔다. 2년 전 꾸몄던 정원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발견했다. 창문을 살펴보며 어떤 것을 깨뜨릴지 곰곰이 생각했다.

뒷문이 열리고 남편이 쓰레기를 가득 채운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그는 회색 티셔츠와 농구 반바지를 입고 아디다스 고무 샌들을 신었다. 그가 정원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천천히,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뭐 해?” 그가 물었다. 스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나를 알아보았다. 결혼이란 이런 것이다.

 

  • <그 집의 박동하는 심장>은 이것 역시 글자 그대로 집에 ‘박동하는 심장’이 있음을 발견하는 세입자들의 이야기이다.

 

  • <걸 포인트의 축소 모형>은 ‘걸 포인트’라는 파괴된 도시에서 홀로 축소 모형을 만드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 도시는 원래 사람들이 “파티와 섹스를 즐기러 가는 곳”이었는데, 운영자들은 “인생에 선택권이 별로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의료비나 학자금 빚에 파묻힌 사람, 성범죄자, 전과자 같은 사람들을 노동자로 뽑”아서 그들을 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민 폭동이 일어나 관광객들과 시민이 죽임을 당하고, 이 도시의 56층짜리 전망대 ‘걸 포인트 첨탑’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그 안에 고립되는데… 제일 심장이 쫄깃하면서 주인공의 장인 정신 같은 광기가 빛나는 작품.

 

  • <몽유병자와 데이트하기>는 몽유병이 있어 잠 자는 사이에 온갖 이상한 물건들을 다 가지고 오는 남자 친구를 둔 여자의 이야기이다.
  • <촉촉한 집>은 벽에 로션을 발라 집을 항시 촉촉하게 유지해야 하는 집에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이다.

 

  • <칠면조 게임>은 상대가 모르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시크릿 산타’와 다르게 상대에게 선물 대신 사소한 상처를 입혀야 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이 전통인 집안에서 자란 남자를 만나 나도 생전 처음 만나는 남친의 가족에게 사소한 상처를 입혀야 한다면?

 

  • <빅 서>는 <저 너머에>와 수미상관 구조라 할 수 있다. <저 너머에>에서 언급되는 블롯들이 하는 일은 범죄인데, 여자를 꾄 후에 ‘빅 서’(캘리포니아 중부 해안 근처의 울창한 산림지대)로 데려가서 관계를 가진 후, 피해자의 핸드폰에 저장된 데이터와 신용카드 정보를 훔치고 라벤더 향이 나는 증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로맨스 스캠. <빅 서>에서 메그는 그런 블롯인 로저를 사귀게 되는데…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이건 분명 SF 소설이고 ‘바디 호러’ 장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저자가 여성인지라 작품들이 여성의 시각을 잘 담고 있다는 점이다. <저 너머에> 속 여자는 100% 진짜 인간이긴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이기적인 남자를 만나다가 결국 그를 떠나고, 차라리 자기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블롯에게 관심을 돌린다. <빅 서>의 주인공 메그는 처음에는 딱딱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말투나 관계 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줘야 한다는 점 때문에 로저를 마뜩치 않게 여기지만, 그의 헌신은 결국 메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결국 여자는, 상대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를 떠나 자기에게 잘해 주는, 헌신하는 남자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점을 보여 준달까. 위에서도 일부를 인용했는데, <지구상 마지막 여인>은 여성주의적 시각이 제일 잘 드러난다. 길지도 않은데 어쩜 그렇게 포인트가 많은지, 다 보여 드리지 못해 아쉬울 정도다.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저자 소개에 보면 ‘현재 케이트 포크는 첫 장편소설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구글링해 보니까 이건 올해 (2025년) 4월 8일에 나올 ‘Sky Daddy’라는 소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새 소설의 줄거리도 찾아봤는데,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해서 비행기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에 대한 소설”(굿리즈)이라고. 대미친?? 이 소설이 출간될 펭귄랜덤하우스사에서 이런 책소개를 제공한다. “린다는 자신이 비행기에 성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자기가 구혼자들 중 한 명와 ‘결혼’해 자신의 소울메이트인 비행기를 자신과 영원히 하나로 묶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 믿는다고 밝힐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헐… 너무 재미있겠는데? 미국에서 나오는 건 올해 4월이지만 국내에 들여와 번역해서 출간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그냥 원서로라도 당장 읽어야겠다. 하, 이렇게 재미있는 걸 어떻게 참아요!

 

여러분도 이 소설을 한번 읽고 나면 나처럼 케이트 포크라는 작가의 무시무시하고 기이한 상상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안 봐서 모르겠으나 영드 <블랙 미러>가 연상된다는 평(레딧)도 종종 보인다. SF라고는 하지만 ‘정통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SF는 아니고, 따라서 우주인이나 외계인 같은 건 없다. 좁은 의미의 SF를 생각하고 SF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 SF 소설을 한번 시도해 보시라. 그냥 SF를 좋아하거나 호러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입 아프게 두 번 말할 필요 없지. 이런 기괴한 상상력을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시라. 나는 영화 <Substance(서브스턴스)>(2024)가 개쩌는 영화임을 알고 또 주제도 내가 좋아할 만한 것임을 알지만 징그러운 장면 때문에 아직도 못 보고 있을 정도로 쫄보이고 겁쟁이인데, 그런 나도 이 소설은 쫄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다. 막 너무 잔인한 거, 징그러운 건 안 나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읽어 보시라고요! 으스스한 매력을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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