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심민아,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존잼. 이 소설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존잼’이다. 시인 심민아 작가의 첫 소설인데, ‘이 정도 글 써야 책을 낼 수 있구나’ 감탄했다. 한국 게임 산업의 중심인 판교에서 ‘키코게임즈’라는 게임 회사에서 게임 기획자로 일하는 조유라의 이야기인데, 표현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게 기발해서 엄청 웃으면서 봤다.
사실 유라는 게임도 더럽게 못하는데 심지어 3D 게임만 했다 하면 심한 어지럼증을 느껴 플레이조차 동생에게 맡겨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운명의 장난이라 해야 할지.
지금 내가 몸 담은 팀 이름은 오메가(Ω)-3다.(웃어도 된다, 하지만 아직 웃기엔 이르다.) 팀 이름을 들으면 제약 회사 영양제 팀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테슬라나 스페이스X 찜 쪄 먹는 엄청난 것을 하는 데 같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싸우고 부수고 경쟁하는 그런 흔한 게임을 만드는 팀이다.(불행히도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우리는 키코게임즈가 세상 게임의 끝을 보여 주겠다며 제작 중인 비공개 프로젝트 ‘오메가’에 투입되어 있다. 한창 폴리싱 단계인 이 프로젝트는 나름대로 엄중한 대외비인지라, 매일 지랄 맞은 보안 인증을 몇 번씩 거쳐야 한다. 이 보안은 ‘우주선’을 위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주에서 우주선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게임’이라는 설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아아. 우주, 호모사피엔스의 욕망이 드글대는 거대한 보이드. 그러니까 이 게임은, 우주선 스페이스X의 가상적 픽셀 버전을 애써 제작한 다음 그걸 픽셀 이펙트로 못 때려 부숴서 안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것을 위해서 오메가1팀과 2팀과 3팀과 4팀의 인간들은 하루 종일 문서를 쓴다. 디자이너다운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협업과 시대에 대한 미적인 고민…… 물론 그런 것은 없다. 각자 주구장창 테스트를 하고 문서를 쓴다. 특별히 구매한 대단한 툴 같은 건 당연히 없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엑셀을 사용한다. 종합예술이고 뭐고, 다 사치다. 몸을 사리는 능력이 그렇게 탁월할 수 없으며, 동시에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성 타령을 매일 해 대는 나의 팀장이 가장 예민하게 구는 지점은 스타일 통일과 문서 버전 관리다. 그 외에 비주얼 스튜디오를 틈틈이 만진다. 별거 없다.
유라는 대학 시절 공연장에서 어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곳의 ‘문학적인 분위기’에 반한다.
어셔 아르바이트 덕분에 나는 서비스업에 대한 마음을 영원히, 아주 깨끗하게 버릴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글러 먹었으며 이 지구의 희망은 결국 냥님과 개님뿐이라는 생각도 굳어졌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최장수 어셔가 될 때까지 거기에서 오래오래 일했다. 얼떨결에 (매니저가 끝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부매니저가 되어 버릴 때까지.
그건 사랑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건 사랑 덕분이었다. 나는 그 오래된 공연장과 거기에 배어 있는 문학적인 분위기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상과의 깜짝 이벤트나 올리브영 스타일 서비스에 대한 강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내가 만나는 아름다움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풀타임 취업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갖고 다니던 랩탑 하드 속 강제자아 성찰 폴더에는, 작성일 내림차순으로 정렬된 자기소개서가 200개 가까이 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셔들이 사용하는 탈의실이 극장장실로 들어가 더 지나가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야만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극장장실은 실제로 극장장이 사용하는데, 엄청나게 책이 쌓여 있었다. 솔직히 이건 책 리뷰에서까지 소개할 정도로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표현이 너무 기가 막혀서 보여 드리고 싶었다. “책들은 (…) 자기들끼리 화끈하게 강강술래나 쥐불놀이 같은 것을 하며 놀아 젖힌 후, 지쳐 쓰러져 쉬고 있는 모양새”라니. 아니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떻게 생각해 내시는 거예요?
신규 교육이 끝나고 진짜 출근을 처음 하던 날, 매니저의 걱정 섞인 문자메시지를 연달아 받고 출발했다. 길치답게 ‘시간 엄수’를 못하게 될까 봐 종종대다 발견한 극장장실 팻말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하지만 문을 연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극장장실이…… 엄청난 소용돌이였기 때문이다. 책과 종이의 소용돌이. 전당이자 폐허. 바닥부터 천장까지 어마어마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책들은 쌓인 것을 진작에 넘어서서 자기들끼리 화끈하게 강강술래나 쥐불놀이 같은 것을 하며 놀아 젖힌 후, 지쳐 쓰러져 쉬고 있는 모양새였다. 지진 피해를 호되게 입은 도서관이나 멸망한 문서 보관소가 그런 모양이지 않을까. 그리고 냄새. 1년에 딱 한 번, 학교 도서관의 불용 도서 판매 이벤트 때에 맡을 수 있던 그 냄새가 났다. 도서관 건물의 숨겨진 뒷계단에서 감돌던 그 냄새. 날깃날깃하고 황토색인 냄새. 늙은 떠돌이 먼지가 자세를 바꾸면서 풍기던 냄새.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한국 게임사의 고질병이라고 해야 할까, 극단적인 여성 신체의 성 상품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름다운 것’,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유라에게는 이게 큰 충격이다. 유라에게 게임 개발을 가르치려 하던 팀장은 모 직원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배우라고’ 전달해 준다. 그런데 그 포트폴리오라는 게 가관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유병과 꿀물 병을 제때 터치해 침대 위 미소녀에게 먹이는 게임이라니. 어딘가 찝찝했다. 차라리 때리고 부수는 게임이 낫지 않나 싶었다. 스페셜 H모드가 뭔지 궁금했지만 포털 검색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우두둑 소리가 나는 어깨를 돌리며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회사 메신저에 슬슬 부재중 아이콘이 늘어나고 있었다. 급격히 피로를 느낀 나는 뒤쪽에 부록으로 첨부된 아트 참고 자료로 대충 넘어갔다가, 말려 올라간 레이스 속옷 차림으로 누워 몸을 뒤트는 미소녀들이 잔뜩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해서 재빨리 파일을 닫았다. 미소녀들의 얼굴에서 넘실대는 홍조와 빗금이 나에게도 옮겨 온 것 같았다. 온몸이 쑤셨다. 딱히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 포트폴리오를 보고 너무 ‘그렇지 않냐’고(물론 너무 더럽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 팀장에게 말을 꺼내자, 팀장은 그게 뭐 어떠냐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하고 유라의 비판을 무시한다. 아무리 성인 게임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저급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여성의 성 상품화에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게 더욱 큰 문제다(한국 게임사들 정신 차리라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문제의 기획서를 끝까지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불쾌했다. 그 게임은 어떻게 보아도 야게임이 맞았다. 심지어 H모드를 오픈하면 꿀물과 우유 대신 수상한 약이 등장했다. 시스템이 어떻든, 레벨 디자인이 얼마나 잘 됐든 결국 헨타이 게임이었다.
싸구려 자판기의 400원짜리 냉커피처럼 툭 떨어졌던 팀장의 말.
뭐가요? 시스템을 보라고 준 건데요.
팀장의 말투가 자꾸 생각났다. 스쳐 지나가는, 잊어버려도 되는 대화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미운털의 미세한 포자가 팔랑팔랑 날아와 팀장의 안경에 분명히 자리 잡았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기획서의 작성자는 팀장이 처음 키운 주니어 직원이었다. 지금은 키코에서 멀지 않은 인기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팀장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오랜 인연인 데다 학연과 지연으로도 얽힌 사람.
그리고 또 한국 게임 내 여성 신체 묘사라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놈의 가슴이 무슨 수박마냥 말도 안 되게 크다는 것. 심지어 가슴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불X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런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그래픽도 내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 역시 중학교 시절 여어 — 하던 만화부 친구들의 백팩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코팅 그림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누구인가. 대체 누구시오. 대체 누가 이것을 시작했단 말이오? 그 와중에 왜 헐벗은 갑옷일수록 방어력이 강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슴이 클수록 뛰기도, 싸우기도 불편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 체하는 것인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직원의 가슴이 나보다 커 보였다. 그들의 취향과 속사정은 모를 일이지만, 아마 살면서 브래지어를 한 번도 안 해 봤을 사람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다들 웬만큼 실생활을 통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저 거대한 지방 덩어리를 하찮은 천 쪼가리로 덜렁 반만 가린 채 싸워야 하는 캐릭터의 고충을. 그런데도 왜 그렇게 캐릭터 가슴 튜닝과 출렁임 애니 출력에 집착하는 걸까? 바스트 모핑 운운하면서. 우주선이 쏟아지는 자칭 미래 지향 게임을 만들면서도 거대 물풍선 같은 가슴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구석기 인간들보다 미감이 떨어지는 놈들이었다.
하나의 유령이 게임계를 오래오래 떠돌고 있다. 풍유환이라는 유령이…….
‘풍유환’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프린세스 메이커 2>라는 게임 내에 등장하는 아이템으로 이걸 먹으면 캐릭터의 가슴이 커진다. 이 ‘퍼킹 풍유환’을 언급하며 유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 동생과 구린 컴퓨터로 <프린세스 메이커2>를 플레이한 기억을 떠올린다.
동생과 나는 주인공인 갈색 머리 여자애가 우리의 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친구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픽셀 친구는 우리 대신 요정과 정령 따위가 출몰하는 미지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미용실, 농장, 레스토랑 등에서 씩씩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검술과 마법, 미술, 시문학 등을 배우고 마을 구경을 하며 맛있는 것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게임 캐릭터에게 우리 스스로를 투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그 친구의 장래 희망이 프린세스였기 때문이다. 장래 희망이 공주라고 말하는 10대 소녀를 본 적이 있는가? 세상에 그런 10대 소녀는 없다. 찐따 취급받기 딱인 장래 희망이다. 어쨌든 그래도 거기까지는, 그러니까 그 픽셀 친구가 발랄하게 집과 마을을 오가는 지점까지는 홀린 채 문제없이 게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문제의 퍼킹 풍유환이 있었다.
수상한 떠돌이 상인이 들고 오는, 역시 수상한 그 약은 픽셀 친구의 가슴을 크게 만들어 주는 약이었다. 비싸기도 어지간히 비쌌지만, 호기심에 사서 먹이는 순간, 즉시 우리 픽셀 친구의 가슴이 2센티미터 커졌다는 알람이 떴다. 지저스! 용과 악마와 요정과 말하는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왕국 설정을 순식간에 갖다 버리고, 현실의 미터법을 입고 튀어나오는 2센티미터라니. 미터법의 설계자,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회원들도 이런 현실의 2센티미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터법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지구 자오선 측량에 나섰던 18세기의 측량대원 여러분. 지하에서 혹시 이 소식을 들으셨나요? 이보세요, 당신의 피땀 묻은 센티미터가 딸내미 키운다는 게임에서 망할 놈의 가슴 재는 데에 쓰이고 있습디다.
<프린세스 메이커2>의 주인공 캐릭터를 ‘픽셀 친구’라고 부르는 거 너무 귀엽지 않냐며 ㅋㅋㅋ 그런데 유라는 그 친구를 누군가는(아마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 성인 플레이어가)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즐겼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소중한 유년 시절 기억이 더럽혀진 느낌을 받는다. 이건 게임을 매개로 한 성희롱이고 여성 혐오이다. 그러니 유라가 키코게임즈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처사다. 한국 게임’만’ 질병이다…
게임을 만드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단연코 가브리엘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강력 추천한다. 게임을 만드는 세 친구들 이야기인데 이거 작년 (2024년) 읽은 소설들 중 최고. 아예 ‘하이퍼리얼리즘 게임소설 단편설’이라는 부제로 게임과 관련한 단편소설들을 모은, 김보영, 김성일, 김인정, 김철곤, 전삼혜의 <엔딩 보게 해주세요>도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것들까지 읽어 보셔도 좋을 듯.
어쨌든,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고 나름대로 한국 게임업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까지 들어 있어서 엄청 유쾌하게 잘 읽었다. 게임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듯. e북으로 사면 단돈 1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완전 추천!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패멀라 폴,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2) | 2025.03.21 |
---|---|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냅, <욕구들> (1) | 2025.03.19 |
[책 감상/책 추천] 이디스 워튼, <징구> (1) | 2025.03.17 |
[책 감상/책 추천] 문지혁, <중급 한국어> (2) | 2025.03.14 |
[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포크, <심장이 뇌를 찾고 있음> (4) | 2025.03.10 |
[책 감상/책 추천] 심너울, <일인칭 전업작가 시점> (2) | 2025.03.07 |
[책 감상/책 추천] 헤이란, <0칼로리의 날들> (1) | 2025.03.05 |
[책 감상/책 추천] Maggie Su, <Blob> (4) | 2025.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