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문지혁, <중급 한국어>
얼마 전에 리뷰를 썼던 <초급 한국어>의 후속작. 전작에서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쳤던 ‘문지혁’은 이제 한국으로 귀국해 국내 모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게 된다. 게다가 아내가 된 지혜와의 사이에서 아이도 생긴다.
이제 아이도 돌보고 강의도 하면서 살아가는 문지혁은 여전히 ‘애매하다’라는 평가를 받고 소소한 유머 감각을 빛낸다. 전작과 이렇게 이어지는 느낌이 드는 게 좋달까. 예를 들어서 이런 거. 지혁은 글쓰기 강의에서 서사의 기본 구조인 ‘여행’을 설명한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갔다가 반원을 그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여행. 여행을 끝마친 영웅은 이전과 같지 않다. 이전의 영웅이 A였다면 돌아온 A는 A’가 되어 있다(참고로 이런 스토리텔링의 기본 골자가 궁금하다면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참고하시라).
… …네? 그러면 패키지 여행은 뭐냐고요?
(정적)
음, 패키지 여행은 A가 A로 남는 여행이죠. 먹여 주고 태워 주고 재워 주고.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패키지 여행에는 비일상의 공간에 응당 있어야 할 고통과 갈등, 혼란과 시행착오, 문제와 어려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행은 일종의 유사 여행, 쉽게 말해 가짜 여행이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나쁜 이야기인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없는 이야기. 영혼 없이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이야기. 끝내 주인공이 달라지지 않는 이야기.
혹시 패키지 여행을 다녀와서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한 사람 있나요?
… …제발 없다고 말해 주세요.
우리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한 우리는 모두 영웅이에요. ‘써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책상 앞에 앉지만, 언제나 써야 하는 이유보다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죠. 소명을 거부하다가 어찌저찌 ‘문지방’(학교 다닐 때 제 별명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참 못됐죠.)을 넘어 글 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서부터 진짜 고난과 시련이 시작됩니다. 세상에 술술 써지는 글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의 영웅, 나의 글 쓰는 자아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옛 용사들이 용과 싸워 이긴 것처럼 용보다 더 무섭고 포악한 ‘하얀 여백’ 혹은 ‘데드라인’ 아니면 ‘성적’ 같은 괴물들과 맞서 싸운 다음 승리를 거두죠.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면 여러분은 문지방을 넘어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빈손이라고요? 아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약이 여러분의 두 손에 쥐어져 있어요. 쓰기 전의 나와 쓴 다음의 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A에서 A’가 되었으니까요.
… … 저기, 저기 자고 있는 영웅 좀 깨워 주시겠어요?
전작과 비슷한 톤을 유지하기 때문에 전작을 즐기지 않은 분들에게는 딱히 권하지 않는다. 뭐랄까, 전작처럼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다고 느끼실 듯. 등장인물들 사이에 피 튀기는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체절명의 위기가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갈등도 있고 위기도 있지만 조금 소소하고 일상적이랄까. 위에서 언급했던 소소한 유머도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반복되는 패턴처럼 보이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전작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굳이 이 책까지 시도하실 필요가 없다.
이 작품 시리즈는 아무래도 3부작이 될 것 같은데 다음 편은 ‘고급 한국어’가 아니라 ‘실전 한국어’가 될 거라고 민음사TV에 출연했을 때 밝혔다. 자신이 ‘고급 한국어’라고 할 만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한국어에 대해 ‘고급’이라고 주장하기 좀 그래서 아무래도 다음 편은 ‘실전’이 될 거라고. 나는 아마 의리 반, 기대감 반으로 읽을 것 같다. 그때까지 일단 내 한국어는 아직까지는 중급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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