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최근에 책, 독서와 관련한 에세이를 두 권 읽었는데 그중에서 좀 더 개인적이고 빵 터지게 하는 위트가 있는 쪽이 이것이다(좀 더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공적인 경험을 상기하는 책은 앨리 모건의 <사서 일기>이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책에 중독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엄청난 독서가이다. 책깨나 읽어 봤다는 독자, 책을 사랑한다는 독자라면 그의 이 에세이를 읽는 내내 웃음과 ‘맞아맞아!’라는 공감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책 읽을 기회를 낭비한 역사가 없다. 하루는 고작 스물네 시간, 게다가 일곱 시간은 잠으로 보내야 하니 내 견지에서는 나머지 열일곱 시간 중 아무리 적어도 네 시간은 읽기에 할애해야 한다. 물론 그 네 시간으로 나의 독서욕이 충족될 리는 없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인간이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천년만년 살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에서 전하려 했던 메시지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책벌레 드라큘라 백작이 수만 명 처녀들의 도자기처럼 매끈한 목덜미에서 피를 빨아먹었던 이유는 그가 악의 화신이라서가 아니라 읽고 싶은 책들을 웬만큼 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 방법이 달리 없어서였다나. 그러나 여태껏 살면서 『드라큘라』를 읽을 시간은 없었던 나는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이게 10쪽, 그러니까 본문이 시작한 지 3쪽 만에 나오는 명언이다. 아니, 도대체 왜 인간은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천년만년 살 수 없는 거죠? 저자는 그다음 문단에 바로 이어서 이렇게 썼다.
가능하다면 하루에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 매일매일 책만 읽고 살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 이상도 좋겠다. 책 읽기 말고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퀘이커시티의 이동도서관 트럭에서 책을 빌리기 시작한 일곱 살 때부터 난 늘 이 모양이었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태어나기를 이렇게 생겨먹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강박적으로 책 읽기에 매달리는 이유를 안다. 나는 다른 곳에 있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그래,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나마 합리적으로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책이 제시하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낫다. 가난에 시달리거나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극빈자 임대주택에서 표준에 한참 미달인 부모와 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책만 읽어댔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 욕망이야말로─그날그날, 아니 매시간─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라고 굳게 믿어왔다. 머리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그렇다. 내 아버지 같은 사람도 이 부류에 포함될 것이다. 오로지 비교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익명의 프롤레타리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래서 평생 제 영혼을 갉아먹는 무의미한 직업들을 전전했지만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은 거의 없었던 사람. 아버지에게 책의 용도는 술의 용도와 같았다. 현실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척하기, 혹은 행복한 변화를 맞은 척하기. 나는 이러한 충동이 썩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떤 믿음을 고백하든, 그들 스스로 뭐라고 생각하든, 책 사랑꾼들은 대개 정보를 얻으려고, 시간을 보내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C. S. 루이스의 말마따나 혼자가 아님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한결 흥미진진하고 살맛 나는 세상으로 도피하려고 책을 읽는다. 자신의 밥벌이, 배우자, 자국 정부, 생활이 진절머리 나지 않는 세상으로.
‘가능하다면’부터 ‘세상으로’까지 한 단어도 버릴 데가 없다. 지금 이 리뷰를 읽는 독자분이라면 100% 공감하시리라 본다. 하루에 8시간이나 일하는 대신에 책만 읽고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독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병렬 독서를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저자도 동시에 여러 책을 읽는다고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책을 동시에 여러 권 읽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이 ‘여러 권’은 금세 불어났고 어느새 ‘너무 많은’ 책의 독서를 병행하기에 이르렀다. 두어 권 수준에서 이 책 보다가 저 책 보다가 한다는 여자 친구들은 좀 있다. 나와 가장 친한 남자들은 항상 적어도 한 권을 읽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나는 이 숫자가 진실보다는 희망의 승리를 구현한 것이리라 믿지만 말이다. 내가 기억하기에,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이 숫자가 15 이하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군데군데 급증한 적은 있었어도, 아무튼 그렇다. 1978년에 처음 손에 잡았던 『피네건의 경야』나 『미들마치』처럼 진지하게 붙잡고 읽다가 치워버린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처럼 열두 살 무렵부터 생각날 때마다 읽고 또 읽는 책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 책은 정신 차리고 손에 잡은 것만도 100번이 넘지 싶다. 아니, 나는 내가 실제로 진도를 빼면서 읽는 책, 침대 머리에 떡하니 놓여 있고 내가 다 읽어야만 그 자리를 떠나는 책을 얘기하는 거다. 바로 지금, 그런 책은 서른두 권이다.
끊임없이 새 책을 읽기 시작하는 습관에서 나는 흡사 중독처럼 벅찬 쾌감을 얻는다. 때로는 이놈의 습관을 끊었으면 좋겠는데, 그 이유는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는 싶은데 앞으로 20년을 더 기다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셸비 푸트(『남북전쟁』의 저자)가 스톤월 잭슨의 괴상하고 독자적인 한쪽 팔 장례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말로 알고 싶다. 지금의 느려터진 속도를 감안하건대─대략 권당 1천 쪽이라고 본다면─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보기 전에 손자를 볼 것이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피켓이 주사위를 던지는 꼴을 보기 한참 전에 무덤에 들어앉을 것 같다.
저도 두어 권 수준에서 끝이 났으면 좋겠지만 지금 제 독서 기록용 노션 페이지에서 ‘감상 중’ 상태에 놓인 책은 여덟 권이거든요… 그런데도 또 뭔가 새로운 책, 재미있는 책은 없을지 찾아나서고 싶어요…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저자 말마따나 “이 정신없는 독서 패턴에 뚜렷한 이유나 리듬 따위는 없다. 다만, 책은 어지간하면 다 좋고 대개 훌륭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저자가 에세이의 여러 부분에 걸쳐 꾸준히 주장하는 바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손이 가지 않는 책이나 어떤 이유로든 취향이 아닌 책을 굳이 읽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책 추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는 “50세 이후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친구가 추천해 준 책(그렇지만 나는 읽고 싶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그런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아래 인용문을 보시라.
얼마 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존경스러운 한 친구가 『나바호 치유자 파더 존』이라는 책을 내게 건넸다. 나는 나바호 치유자의 전기를 읽을 만한 인간이 아니지만 보아하니 친구는 내가 그 책을 읽기를 바라는 듯했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예의를 지켜 그 책을 집으로 가져와 내 사무실의 어두운 구석 책장, 사실상 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그동안 친구들이 나에게 억지로 떠안긴 다른 책들과 나란히 꽂아두었다.
그런 책들로는 『루스볼: 미국농구협회의 짧고 굵은 생』, 『독 홀리데이의 개척자 세상』, 『성경, 종교, 도덕에 대하여 스티브 앨런이 말하다』와 예수회 냄새가 그보다 좀 덜한 『하이호, 스티브리노! 놀랍고 괴상한 텔레비전 세계 모험』이 있다. 내가 천 년을 산대도 이 책들은 어느 한 권 읽지 않을 것이다. 미국농구협회에 대한 책은 특히 취미 없다. 내가 이러한 뜻을 주변 사람들에게 늘 성공적으로 전달하지는 못했다만, 나는 독서 시간 분배에 관한 한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은 할 시간이 있지만 무엇을 할 시간은 없다는 개념이 철저하단 얘기다. 내가 보험 통계상의 기대 수명까지 산다면 책을 얼마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오래전에 계산해봤다. 그때 2,138권이라는 답이 나왔다. 이론상으로는 2,138권 속에 『트리스트럼 섄디』부터 『샤베르 대령』까지 별의별 책이, 괴테 같은 유명한 작가의 작품과 후안 필로이 같은 무명작가의 작품이 다 들어갈 수 있다. 걸작 500권, 가벼운 고전 500권, 진짜 천재들의 간과된 작품 500권, 특이한 책 500권, 일급 쓰레기 138권을 읽을 시간이 원칙적으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쓰레기는 너무 바보 같아서 읽고 있으면 심장이 뛰고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책이다. 이 유토피아적인 미래에 『하이호, 스티브리노!』에 내줄 시간은 없다. 진짜 프로의 손으로 빚어낸 순도 100퍼센트의 아둔함은 신명 날 수 있다. 엉성함은 그냥 엉성하다.
나는 저자의 표현에 감탄했는데, “무엇은 할 시간이 있지만 무엇을 할 시간은 없다는 개념이 철저하단 얘기다”, 바로 여기에서 감탄이 나왔다. 내가 관심이 있는 책, ‘한번 읽어 볼까’ 생각한 책을 들여다볼 시간은 없지만 내가 관심이 없다면 세계 명작이라고 해도 단 1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위 인용문으로부터 한 문단 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몇 권이나 책을 해치울 수 있을지 계산해보고 나서부터 독서 습관에 좀 더 깐깐해졌다. 날개 돋친 시간의 수레가 내 발치까지 치고 들어오니 속도를 낼 필요를 절감했고 그저 독서를 위한 독서용 책에는 차츰 손이 가지 않았다. 젊을 때는 유감없이 신나던 인생이 지금은 점점 더 내 머리를 겨누는 총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내가 『데카메론』과 『피네건의 경야』를 영원한 퇴장 전에 읽으려면 이제 선택에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내가 결코 읽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위대한 책들이 엄연히 있다는 얘기다. 『애로스미스』와 『맨해튼 트랜스퍼』처럼 읽을 일 없기를 바라는 책들도 좀 있다. 『모히칸족의 최후』도 빼놓을 수 없지.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나는 이미 마지막 너새니얼 호손, 존 스타인벡, 업튼 싱클레어, 거트루드 스타인, 리처드 셰리든, 미하일 숄로호프, 조르주 상드, 플라우투스, 테렌티우스, 아나톨 프랑스, 프랑수아 모리악, 로라 Z. 홉슨,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를 읽었다. 기대는 하지 않는다만, 내가 여든 살까지 산다면 오래전에 이제 끝이다 생각했던 책들만 모아서 1년을 할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토머스 울프, 토마스 만, 토머스 하디를 한꺼번에 1년 동안 읽는 건 자진해 명줄을 끊는 짓 아닐까. 그런 짓 하다 죽은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나는 진지한 독자, 요컨대 강박적인 독자라면 모두 머릿속에서 착착 돌아가는 시계나 미터기 따위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지 어렴풋이 생각해서 그에 맞게 독서 습관을 잡는다. 일단 나처럼 예순을 넘으면 대(大)플리니우스를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는 따져볼 여지가 있지만 펄 벅에 할애할 시간은 결단코 없다. 이때부터는 무슨 책을 읽든지 그게 이승에서 읽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 『대지』를 마지막 책으로 삼을 순 없지 않은가. 몇백 년 전, 가령 토머스 제퍼슨 정권 당시라면 한 사람이 그때까지 정식 출간된 모든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현재도 지금까지 출간된 최고의 걸작들만 읽는다면 다 읽을 수 있다. 얼추 3년이 걸린다. 4년이 될 수도 있다. 책을 느리게 읽는 사람이라면 5년까지도 걸리겠다. 그러나 일단 이 범위를 준(準)걸작, 수작, 혹은 위대한 책을 쓴 작가의 고만고만한 작품에까지 확대한다면 일이 심히 고달파진다. 뭔가는 희생해야 한다. 나는 『남자들만의 세계』와 『우리 시대에』를 좋아하지만 『강 건너 숲속으로』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데이비드 카퍼필드』, 『어려운 시절』, 『위대한 유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축에 들지만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은 늘 훗날로 미룰 준비가 되어 있다. 『훌륭한 군인』은 작은 기적이다. 포드 매덕스 포드 작품들 중에서 이 책 미만으로는 영 아니지 싶다. 존 콜리어,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 색스 로머, 얼 스탠리 가드너? 어쩌면 다음 생에는 읽어볼 수도. 분명히 강조해두고 싶은데, 이 작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책까지 읽을 시간이 없다.
독서는 지독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손에 억지로 들려주는 책은 내키지 않는다. 내가 필립 K. 딕을 읽기 원했으면 지금까지 안 들춰봤겠는가. 디토 윌리엄 깁슨과 어슐러 르 귄도 마찬가지다. 애서가들은 향후 33년간 그들의 자유 시간을 책임질 플라토닉 독서 목록을 끊임없이 짜고 또 짜느라 바쁘다. 맨 먼저 『전쟁과 평화』에 착수하고 그다음은 『율리시즈』, 그다음은 프루스트가 쌓아올린 거대한 산, 마지막은 『피네건의 경야』다. 그러나 내가 『독 홀리데이의 개척자 세상』 따위를 읽느라 자꾸 지체하면 『피네건의 경야』는 영영 못 읽겠지. 비록 그런 책도 잡스러운 대로 썩 재미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대플리니우스는 쳐다도 안 보겠지만 펄 벅은 고려해 볼 것 같다(오래전에 죽은 로마인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차라리 같은 여성 작가이고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했던 펄 벅이 낫지). 하지만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에 “사람들이 내 손에 억지로 들려주는 책은 내키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는 공감한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대한 비판(“…그중 얼마나 많은 작품이 엉성하거나 기도 안 차는 영화로 만들어져 힘들게 거둬들인 명성에 똥칠을 하는지 놀랍기만 하다”), 책에 메모로 감상문 남기기, 친구 및 지인들과 책 이야기하기, 남에게 책 추천을 받았지만 내 취향이 아니어서 곤란했던 경험, 희귀본, 진귀본, 절판본 등 책 수집하기(저자는 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저자에게 사인받기(이것도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다), 전자책으로는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종이책을 통한 ‘인연’ 만나기, 북클럽과 ‘함께 토론해 볼 문제들’ 이야기, 남에게 책 선물하기 등등 책에 대해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독서를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 곳곳에도 저자의 책 취향이 반영되어 있어서, 빈말로라도 공정한 비평가라고는 할 수 없다. 보는 눈에 따라 너무 빡빡하다거나 편협하다고도 느낄 수도 있는데, 사실 우리가 독자로서 개성이 없이 모든 책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그런 글을 읽고 싶은 건 아니지 않나요. 적어도 저자가 느끼기에 무엇이 훌륭한 책이고 무엇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는 그런 책이 차라리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물론 그것에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독자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대플리니우스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펄 벅은 읽을 의향이 있다. 이토록 저자의 책 취향이 나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 있어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내내 유쾌했다. 아니, 솔직히 취향이 안 맞아서 ‘에이 뭐야, 네가 뭘 알아!’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이런 문단을 읽으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한국 편집자의 솜씨이지 싶은데) 아래 인용문 중 멋진 부분은 아예 한 장의 소제목이 되었는데, “아직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여, 나중에 오라”. 이거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2018년에 출간된 책이라 현재는 절판됐는데, 몇몇 전자도서관에서는 이용 가능하다(이 전자도서관 이북 통합검색 사이트를 이용해 검색해 보시라). 아니면 종이책이 동네 도서관에 있는지 찾아서 빌려 보셔도 좋겠다. 어떻게 접하든, 약간의 노력을 들여서 구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진짜 웃기고 재미있고 공감 가는 구석이 많으니까. 추천한다!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앨리 모건, <사서 일기> (4) | 2025.05.12 |
---|---|
[책 감상/책 추천] 코니 윌리스, <디.에이.> (1) | 2025.05.09 |
[책 감상/책 추천] 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 (1) | 2025.05.07 |
[책 감상/책 추천] 와야마 야마, <여학교의 별 1-4> (2) | 2025.05.05 |
[책 감상/책 추천]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2) | 2025.05.02 |
[월말 결산] 2025년 4월에 읽은 책들 (4) | 2025.04.30 |
[책 감상/책 추천] 에두아르도 멘도사, <구르브 연락 없다> (0) | 2025.04.25 |
[책 감상/책 추천] 조예은 외 4인,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0) | 2025.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