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비(非)독서인도 한 번쯤 들어 봤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나의 멋진 이웃이신 오이님이 이 책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도 부랴부랴 따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름 재활용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짜증 내며 읽지는 않았을 텐데…”
책을 펼치면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부엔디아 집안의 가계도가 나온다. 아무래도 이 소설이 부엔디아 가문의 100년간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계도를 부록으로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내가 읽은 민음사 버전은 이렇게 생겼다.
자, 뭐가 보이시는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로 시작해 호세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호세… 등으로 이어지는 ‘이름 재활용’의 홍수에 빠지셨는지? 그게 정확히 이 책을 읽는 내 심경이었다. 비슷한 이름들 왜 이렇게 많아? 1대 가장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이름을 적당히 변형한 이름들이 아들, 손자, 증손자 등등에게 주어지고, 여자들도 비슷한 처지다. 다른 가문에서 시집 온 여자들은 개성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들이 낳은 딸들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급 조상 여인들의 이름을 물려받는다. 위 가계도를 보면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만 셋이다. 그래도 여자들은 그나마 처지가 나은 셈이다. 어떤 레메디오스는 원조인 레메디오스와 구분하기 위해 이 세상 미모가 아닐 정도로 뛰어나게 예쁘다고 해서 ‘미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고(’미녀 레메디오스’), 또 다른 레메디오스는 ‘레나따’라는 이름이 하나 앞에 더 붙기도 했고, 보통은 레메디오스의 애칭인 ‘메메’라고 불려서 그래도 구분이 얼추 되니까. 이 가문의 어머니 격인 우르술라 이구아란에서 이름을 따온 우르술라도 앞에 ‘아마란따’가 붙어서 조금 구분 가능한 개성이라는 게 생겼다. 하지만 남자애들은 얄짤 없다. 별명? 그런 거 없다. 이름 뒤에 ‘2세(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라는 의미의 ‘세군도(segundo)’라도 붙으면 감지덕지다. 근데 그래 놓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에 낳은 아이는 (아이 입장에서 보면) 큰아빠 이름 끝에 달린 ‘세군도’도 없이 그냥 호세 아르까디오다.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3세’라고 갖다붙이긴 또 너무했나 보지. 그러면 도대체 왜 이름을 끊임없이 재활용하냐고!
비평가들은 이 ‘이름 재활용’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솔직히 나는 이해 못하겠으니까 책 뒤에 붙은 작품 해설에서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간·공간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면모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 짓기에서 비롯된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 자손들은 아우렐리아노 또는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여자 자손들은 우르술라, 아마란따,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적인 특성을 띠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들은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지님으로써 이들이 심리학적·생물학적으로 동일한 패턴의 성격적 특성을 계승해 나간다는 것이다.
예… 그렇군요… 솔직히 내가 서양권에서는 조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을 따와 짓는 문화가 있다는 걸 모른 게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은 경우(위에서도 언급했듯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도 봤고. 문제는,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의 연대기를 읽을 필요가 여태까지 없었다는 거다. 근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골치 아픈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릴까 봐 일부러 이름을 똑같이 짓지 않았다는 이사벨 아옌데(<영혼의 집>에 보면, 클라라가 일기를 쓰는데 딸 이름을 할머니와 똑같이 지으면 나중에 이걸 읽는 사람들이 헷갈릴까 봐 다르게 지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여사님을 찬양하기로 했다. 등장인물들에게 개성 있는 이름, 구분이 쉬운 이름을 지어 주면 혹시 문제가 되나요? 왜 자꾸 이름을 돌려쓰냐고!
위 작품 해설에서 설명했듯, 마르케스가 지은 이 ‘마꼰도’라는 마을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성격도 똑같다. 그리고 거의 모든 부엔디아 사람들이 성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 중 하나인데, 예를 들자면 호세 아르까디오는 엄청나게 큰 성기와 그에 필적하는 성욕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고작 아홉 살밖에 안 된, 아직 첫 월경도 안 한 레메디오스에게 반한다. 스포일러 하고 싶지 않으니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말한다면, 심지어 고모-조카 사이의 근친상간도 등장한다. 아니, 나도 야한 거 좋아하는데 이렇게까지 성(性)에 미친 사람들 이야기를 읽고 싶은 건 아니었다고요… 특히 아홉 살짜리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뭐야? 시대적 배경도 있고, 또한 이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백년’ 동안 ‘고독’한지를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알겠는데, 그래도 뭐 최소한 열여섯 정도는 넘은 걸로 설정하면 안 됐던 걸까… 게다가 근친상간은 또 어떻고? 다시 한 번 작품 해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년의 고독』에 대한 독서에서 마꼰도 설립의 근원을 이루고 부엔디아 가문과 혈통의 고칠 수 없는 성향으로 지속되고, 결국에는 묵시록적 재난을 유발하는 서사의 중심 모티프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근친상간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내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에 의해 고착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 『백년의 고독』은 ‘백년의 근친상간’으로 치환될 수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깊숙이 내재된 두 가지 현실, 즉 고독과 근친상간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부엔디아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가장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 한 가족에 속하는 근친상간의 유혹이며, 그들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근친상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런 근친상간의 내면에 바로 고독이 존재한다. 소설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이 고독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인 근친상간과 연결되어 진행되면서 그 주기와 형태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 리듬 속에 위치하는 근친상간과 그것의 금기는 부엔디아 가문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종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또한 근친상간이라는 동종교배를 통해 점점 더 열등한 자손을 낳고 그 결과 부엔디아 가문이 멸망하고 마꼰도가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다.
예… 그렇군요… 제목이 <백년의 고독>인 것도 이해가 된다. 백년간 자기 가문 내에서 자기네들끼리 붙어먹으니, 즉 다른 사람을 허용하지 않으니, 얼마나 고이고 고여서 고독하겠냐고요… 이걸 작가는 이 세계, 또는 최소한 이 가문의 운명이라고 여긴다. 애초에 그러니까 이름을 재활용하고,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은 성격도 비슷하다고 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려서 결국 근친상간의 결과물이 태어나게 만들었겠지만. 그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니까 고독할 만도 하지… 애초에 고독한 사람이라서 이런 세상을 구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닭과 달걀의 관계랄까.
나는 안 그래도 등장인물들 이름이 헷갈려서 고생하는 와중에 자기네들끼리 성욕이 폭발해서 이 사람하고도 자고, 저 사람하고도 자는 걸 읽고 있으니 짜증이 배가 됐다. 이걸 마른 장작 삼아 불만이 불타오르게 만든 게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이다. 사실 나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인 마술적 사실주의가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도 재미있게 읽었고, <영혼의 집>도 잘 읽었다(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이 집안 여자들이 불행한 이유라고 생각해서 그를 저주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이 문학 작품들에 드러난 초현실적 요소를 가지고 ‘에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라며 현실적으로 따지려 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정말로 이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것이 소설이니까. 하지만 <백년의 고독>은 이미 (헷갈리는 이름들 때문에) 짜증이 쌓인 후라서 이 요소들이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민음사TV의 김민경 편집자는 이 책이 최애라던데, 나는 그 마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초현실적, 비현실적 요소가 등장할 때마다 이런 감상을 (이북에다가 메모로) 남겼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게 전부가 아니다.
기억상실증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던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각각의 이름을 보고 물건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 용도는 기억하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당시 기억상실증은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가 암소의 목덜미에 걸어놓은 표찰은 마꼰도 주민들이 어떤 식으로 기억상실증에 대항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였다. ‘이것은 암소인데, 암소가 젖을 생산하게 하려면 매일 아침마다 암소의 젖을 짜주어야 하고, 그 젖을 커피와 섞거나 밀크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젖을 끓여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단어들을 이용해 잠시 붙잡아두었지만, 자신들이 씌어진 글자들의 의미를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는 별수없이 사라져버릴 그런 허망한 현실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 어떻게 마꼰도 사람들은 또 이런 일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수더분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었느냐고요...
늪 지대에서 뻗어나간 길 어귀에는 ‘마꼰도’라 씌어진 푯말이, 중앙 도로에는 그 푯말보다 조금 더 큰, ‘신은 존재한다’라고 씌어진 푯말이 서 있었다. 모든 집에는 물건의 이름과 사람의 감정을 기억하기 위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단한 주의력과 정신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자신들에 의해 창조된 가상 현실이 지니는 매력에 푹 빠져들었는데, 그 가상 현실은 그들에게 덜 실제적이었지만 더 편안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중략)자신들을 위로하기 위한 그런 연습에서 실패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집시들의 희한한 발명품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언젠가 갖고 싶어한 적이 있던 그 기억 장치를 만들 결심을 했다. 그 기계는 삶에서 획득한 모든 지식을 매일 아침,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훑어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원리를 두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기계는 중심축에 위치한 어느 개인이 핸들 하나로 조작할 수 있는 회전식 사전 같은 것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사항들을 단 몇 시간 이내에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가 기록 카드를 약 만 사천 개 가량 썼을 때 차림새가 누추한 노인이 밧줄로 묶은 불룩한 가방을 짊어지고 검은 천을 덮은 수레를 끌고서 자신은 불면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종을 구슬프게 울리면서 늪 지대와 연결되어 있는 길을 따라 나타났다. 노인은 곧장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집으로 갔다.
→ 불면증 때문에 이런 짓을...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식당에 있다가 지붕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나는 소리를 들은 외지인들이 시체를 끌어내려고 급히 달려갔고, 죽은 남자의 시체에서 미녀 레메디오스의 숨 막히게 하는 체취를 맡았다. 그 체취가 그의 몸속에 어찌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던지 갈라진 머리 틈새에서는 피 대신에 은밀한 향취를 풍기는 황갈색 기름이 흘러나왔는데, 그때 그들은 미녀 레메디오스의 체취는 남자들이 죽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미녀 레메디오스의 체취가 남아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괴롭힌다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진짜...
그리고 스포일러라 말은 못하지만, 이 다음에 진짜로 내가 “??? 어디까지 하나 보자 했더니 이런 얼탱이 없는...”이라는 메모를 쓰게 만든 일이 일어난다.
그 불길한 유산(遺産)의 첫 조짐은 세 번째 방학 때 드러났는데, 당시 메메는 집에서 일주일을 보낼 요량으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수녀 넷과 급우 예순여덟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 예순여덟??? 작작 해라 진짜... 뻥도 엔간히 하시라고요!!
비는 사 년 십일 개월 이틀 동안 내렸다. 부슬비라도 내릴 때면 날씨가 개이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모두들 정장을 차려입고 병에서 회복되어 가는 사람 같은 얼굴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이내, 잠깐 비가 걷히는 듯하는 것은 오히려 더 억센 비가 쏟아지려는 징조라고 해석하게들 되었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요란스런 폭풍우를 퍼부어댔고, 북쪽에서 내려온 태풍은 지붕을 날려버리고 벽을 무너뜨리고 바나나 농장에 있는 나무의 마지막 뿌리 밑둥까지 죄다 뽑아버렸다.
→ 무슨 또 비가 4년 11개월 동안 내려요... 제발 좀 작작...
어느 금요일 오후 두시, 희미하고, 빨갛고 벽돌 가루처럼 까칠까칠한, 그리고 시원한 물에 버금갈 정도로 상쾌한 태양이 빛났고, 십 년 동안 다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 10년 동안 다시 비가 안 내리면 그것도 문제인데요...
어떤 이들은 호세 아르까디오가 죽자 노란 꽃이 비처럼 내리는 장면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감탄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장면나 아니면 언제나 노란 나비들을 몰고 다니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의 등장 같은 ‘초현실적인 뻥’에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진짜로 크게 공감하고 좋아했던 부분은 딱 이 한 문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문장의 뒷부분만.
그러나 미녀 레메디오스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꼬락서니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대답 이외의 것은 할 줄도 모르는 걸 보고 딱 한 가지 애석하게 생각했던 점은 집안의 바보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이 집안의 바보들이 너무 오래 산 덕분에 이야기가 길어져서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리뷰는 이름이 너무 헷갈려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났다는 이야기를 좀 길게 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내 한탄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백년의 고독>만 할까. 재활용되는 이름의 홍수를 받아낼 자신이 있는 분만 큰 마음 먹고 도전하시라. 안 그러면 나처럼 본문 읽고 가계도 보고, 본문 읽고 가계도 보는 일을 백 번 반복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혹자는 내가 ‘반복되는 이름 때문에 너무 헷갈렸다’라고 불평하니 이 책을 기반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면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했다. 확실히 그럴 거 같긴 하지만, 나는 드라마/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 책을 읽어야만 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지적 허영심을 가진 문학적 속물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끝낼 수 있었을지도 불명확하다. 그나마 내가 ‘그래도 (욕하면서 읽기는) 읽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끝까지 참고 읽은 거다. 이제 이걸 끝냈으니 나는 ‘아, 그거 읽어 봤는데 내 취향은 아니더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이제 나는 마르케스의 다른 작품은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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