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원도, <파출소를 구원하라>
경찰관 출신 작가 원도의 첫 장편소설.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감동적으로 읽을 <아무튼 언니>와 경찰관들의 현실을 잘 드러내서 내가 엄청 눈물콧물 빼며 읽었던 <경찰관속으로>, 그리고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까지,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쓴 작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소설에 도전했다.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당 파출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다. 소장 정열과 그의 팀원들인 해랑, 송구, 무건, 대복, 치운은 고장 난 에어컨을 수리할 예산조차 없는 작은 파출소에서 매일 새로운 사건들을 맞이한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다소 ‘오글’거리는, 보편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의 봉우리(그러니까,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쌓아올려지던 감정선이 폭발하는 부분)보다 일찍 튀어나온 듯한 대사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나름대로 권선징악이긴 한데 어째 약간 글 전개 순서가 뒤집어진 듯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원도 작가의 첫 장편소설에 태클을 너무 많이는 걸지 않겠다. 편지글, 에세이, 칼럼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시도하셨는데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 그러면서 느는 게 또 글 아닌가. 첫 술에 배부르랴!
내가 이렇게 관대한 평을 내리는 건, 내가 저자의 다른 글을 읽었기에 평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전 글에서 경찰관이라는 일(웬만해서는 좋은 말을 듣기 어려운 직업 중 하나)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도 보았고. 이 소설에서도 그게 느껴진다. (전직) 경찰관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경험에서 우러나온 작은 세부사항들도 놀랍다. 예를 들어서, 죽은 이의 시신 수습은 모두 현장에 있는 경찰관의 몫이라는 것(소방관은 이를 건들지 않는다). 그건 몰랐네. 아래 인용문은 웃긴데 안 웃긴다…
“경찰청은 뭐 자타공인 효자 부서 아닙니까? 매년 행정안전부가 배정한 예산을 도로 반납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작년에도 500억인가 아낀 명목으로 경찰청 담당자 누가 특별 승진 했다던데? 하여튼 지역 경찰 고혈 빨아서 승진할 생각밖에 없는 놈들이 경찰청에 앉아 있으니! 현실이 나아질 리가 없죠.”
“기획재정부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관도 경찰청이라 카대. 경찰서 지을 때도 칠 층짜리 견적서 주면 기재부에서 사 층으로 깎아뿌는데 검찰청 지을 땐 이 층짜리 견적서 내밀어도 기재부에서 알아서 고마 오 층으로 올려주뿐다 카네.”
“잘 아시네요, 팀장님. 공무원 연금 공단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관도 경찰청이랍니다. 우리가 공무원 중에 평균 수명이 제일 짧아서 연금을 가장 많이 아낄 수 있다네요. 명색이 백세 시대에 정년퇴직 경찰관의 평균 수명이 65세인 거, 진짜 기괴한 거 아닙니까?”
웬일로 정열과 죽이 잘 맞는지, 치운은 꾹 닫혀 있던 입술을 연신 벌려가며 신이 난 듯 떠들었다. 분노로만 가득한 만담 콤비를 보는 것 같았다.
소설은 아파트 단지에서 투신한 변사자 수습하기, 주취자 안전히 집에 데려다주기, 냇가에 뛰어든 자폐 스펙트럼 아이 붙잡아 데려오기 등등 다양한 사건 사고를 거쳐 중후반부에 좀 더 묵직하고 심각한 톤으로 변한다. 슬프고 안타깝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어서 신 말고는 딱히 비난할 대상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일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나름대로 권선징악이라고 할 수는 있는데, 아주 완벽하게 동화 수준으로 행복한 엔딩은 아니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것이 현실이려니…
원도 작가의 다른 책들을 잘 읽었다면, 또는 경찰관이라는 일을 하고 싶다면 한번 읽어 보시는 게 어떨까. 나는 밀리의 서재에서 읽었는데 리디 셀렉트와 교보샘에서도 이용 가능하다고 한다(이 구독서비스 통합 검색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해 보시라). 도서관에서 빌려 보셔도 좋겠다. 원도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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