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우리 사이 어쩌면(Always Be My Maybe, 2019) -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뒤를 잇는, 아시아인들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감독: 나나츠카 칸(Nahnatchka Khan)
사샤(Sasha, 앨리 웡 분)와 마커스(Marcus, 랜들 파크 분)는 꼬맹이 시절부터 옆집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 온 사이이다.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둔 어느 날, 마커스의 어머니 주디(Judy, 수잔 파크 분)가 돌아가셨을 때 사샤는 자기도 어머니를 잃은 듯 깊이 슬펐을 정도니까.
사샤는 슬픔에 빠진 마커스를 위로하고자 그를 데리고 나가 차 안에서 노래를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마커스에게 뽀뽀를 하고 만다.
그러고 나서 바로 실수라고, 미안하다고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마커스가 다가가 진짜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둘은 차 안에서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거사를 끝낸 둘은 숨 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뭘 먹으러 가기로 하고, 버거킹에 갔다가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싸우게 된다.
사샤는 어머니를 잃은 마커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마커스는 '그렇지만 네가 진짜로 너희 어머니를 잃은 건 아니잖아. 어머니를 잃은 건 나라고!'라고 말한 것.
사샤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아 버거킹을 나가 버리고, 마커스도 굳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의 거사 후 버거킹에 간 게 마지막으로 둘은 서로를 보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19년, 사샤는 잘 나가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명한 셰프이다. 잘 나가는 사업가 남자 친구 브랜든(Brandon, 대니얼 대 킴 분)도 있고, 둘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녀 인생이건만, 갑자기 남자 친구가 사업차 인도에 가야겠다며, 우리 결혼을 약간 미루고 우리가 서로에게 정말 꼭 맞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자는 말을 던진다.
그녀는 쿨한 척하며 남자 친구를 인도에 보내 주고, 자신은 뉴욕에서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그곳에 새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일에 매진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예전의 베프이자 하루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마커스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작년에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 2018)>을 보고 '와, 미국에서 아시아계 배우들만 가지고, 아시아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하고 무척 감탄했는데, 이 영화는 분명히 그 이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영향에 힘입어 아시아 배우들이 직접 각본을 쓰고 아시아적인 특성을 많이 넣어서 만든 영화인 게 분명하다.
일단, 배우들을 보자면 앨리 웡과 랜들 파크가 주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미드 <프레시 오프 더 보트(Fresh Off The Boat)>를 보신 분이라면 랜들 파크의 이름을 보고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앨리 웡은 비교적 그보다는 이름이 덜 알려져 있지만, 2011년부터 배우로 활동했고 2013년에는 <프레시 오프 더 보트>에 스토리 에디터(story editor)로 몇 편 각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두 주연은 물론이고, (당연하지만) 사샤나 마커스의 부모님도 당연히 아시아계 배우다. 마커스가 사귀는 서브 여주도 제니(Jenny, 비비안 방 분)라는 이름의 아시아계 여자고.
놀라운 것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비슷하게, 극 중 설정상 꼭 아시아인이어야 하는 캐릭터들 말고(주인공들의 부모님들이라든지 사촌이라는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외에 그 어떤 인종이어도 괜찮은 캐릭터들도 백인의 비율은 상당히 낮다.
영화를 보면서 비중 있는 백인 캐릭터가 나온 것은 단 한 명, 사샤의 레스토랑 공사를 맡은 담당자인데, 엄청 맹하고 말실수가 잦은 캐릭터다.
그 외에는 사샤의 베프이자 매니저이기도 한 베로니카(Veronica, 미셸 부토 분)는 흑인이고(게다가 출산을 몇 달 앞 둔 임산부이다. 첫 등장부터 남산만 한 배를 쓰다듬는 모습이다), 마커스의 밴드 멤버인 토니(Tony, 카란 소니 분)는 인도인이다. 이외에 모든 캐스트들이 거의 비백인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깜짝 놀랄 준비 하시라!) 영화 중후반쯤 나오는, 이런 영화에 꼭 등장해서 남주를 질투하게 만드는 서브남도 아시아계 혼혈인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다!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장면은,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길게 말하진 않겠지만, 일단 다 웃기다 ㅋㅋㅋㅋ
어떻게 키아누가 이런 영화에 출연했느냐 하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텐데, 사실 배우들도 그 점에 놀란 듯하다.
같이 각본을 쓴 앨리 웡과 랜들 파크는 이 서브남 역할의 배우에 홍콩 배우 양조위(Tony Leung), 필리핀계 미국인 배우이자 무술가인 마크 다카스코스(Mark Dacascos), 인도 출신 영화감독 M.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 (그리고 이중에 유일하게 아시아계가 아닌) 폴 지아마티(Paul Giamatti) 등을 고려했단다.
랜들 파크는 폴 지아마티가 서브남이라면 재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앨리 웡은 이에 반대했다.
극 중에서 사샤는 이미 대니얼 대 킴이 연기한, 잘나가는 아시아계(브랜든 '최'니까 설정상 한국인이다) 남자를 사귀었던 데다가, 마커스에게 있어서 사샤가 자기랑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사샤랑 사귀는 게 최악의 악몽일 거라고 앨리 웡은 생각했다고.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데다가 아시아계이기도 한 배우를 찾아야 했는데, 마침 키아누 리브스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키아누 리브스는 중국-필리핀계 혼혈이다.)
그래서 이들은 키아누 리브스에게 각본을 보냈는데, 설마 승낙할 거라고는 본인들도 예상하지 못했단다. 그래서 키아누가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하자 놀랐다고.
심지어 키아누는 앨리 웡에게 "당신들의 러브스토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어요(I would be honored to be part of your love story)."라고 써서 앨리 웡이 엄청 감동했다고 한다. 나라도 그럴 듯ㅠㅠ
배우뿐 아니라 이 영화는 곳곳에 '아시아스러운' 점이 많다. 아시아계 배우 둘이 각본을 썼으니 당연한 거지만.
영화 초반부터 마커스의 엄마 주디가 가위로 파를 자르며 "한국인들은 가위를 안 쓰는 데가 없지."라고 말한다거나, 사샤에게도 가위로 파를 자르게 하고서 "잘하는구나. 너 정말 한국인 아닌 거 맞니?" 같은 말을 한다든가(극 중 사샤의 부모님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사샤의 성이 '트란(Tran)'인 걸로 봐서, 베트남 출신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 파를 김치찌개에 넣으며 정확하게 '김치찌개'라고 발음한다든가 등등.
그리고 영화 중반에 마커스가 아버지(이분은 제임스 사이토라는 일본계 배우이다)와 한국식 사우나에 가서 세신사에게 때 밀기 서비스를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나온다 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사샤의 부모님도 팁 주는 거나 (당신들 보기에) 쓸데없는 데에 돈 쓰는 걸 엄청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여 줘서 '아, 이건 진짜 아시아인들이 각본을 쓴 게 100% 확실하다' 싶다.
할리우드에서 주연을 차지하기 어려운 아시아계 배우들이 이렇게 아시아의 문화가 곳곳에 녹아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참 뿌듯하고 신기하고 그렇다.
아, 그런데 혹시 '그런데 이런 (동)아시아인들 이야기를 이 감독이 어떻게 잘 살려서 찍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걱정 마시라.
이 영화 감독은, 타이완 출신의 가족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프레시 오프 더 보트>를 제작한 나나츠카 칸이니까.
이 정도면 입증 끝난 거 아닌가? ㅎㅎㅎ
참고로 랜들 파크는 이 영화가 개봉한 2019년 기준 46세이다(1974년생). 여주인공 역의 앨리 웡은 38세(1982년생).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콘스탄스 우(Constance Wu)도 앨리 웡과 똑같은 1982년생인데(영화가 개봉한 2018년 기준으로 37세), 나는 이미 콘스탄스 우를 <프레시 오프 더 보트>에서 '애 셋 딸린 엄마' 역할로 기억해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걸 보고 '음, 유부녀가 여기에서 일탈을...?' 하고 놀랐다. 30대 후반에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 된 것도 되게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랜들 파크는 (한국식 나이로) 46세에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주연을 맡다니... 와 대단하다...
이 영화는 절친으로 지내던 두 남녀가 하룻밤 실수를 하고 십몇 년간 서로를 안 보다가 다시 어쩌다 만나게 되어서 결국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다는 게 끝이 아니다.
그 와중에 서로의 다른 라이프스타일, 각자 다른 삶을 어떻게 융합시키고,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어떻게 서로 양보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같은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너무나 '밝은'(=죄 백인들만 나오는) 영화가 지겹다면, 기분 전환용으로라도 한번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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