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 - 로저스 씨, 제 이웃이 되어 주시겠어요?
감독: 마리엘 헬러(Marielle Heller)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기 프로그램 '로저스 씨의 동네(Mr Rogers' Neighborhood)'을 진행하는 프레드 로저스 씨(Fred Rogers, 톰 행크스 분)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기자로서 상도 받은 로이드 보겔(Llyod Vogel, 매튜 리즈 분)이 바로 그 친구인데, 그는 원래 자신의 인터뷰 대상에게 가차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실을 폭로하는 류의 기사를 많이 써 온 기자라 그런 걸지도.
어쩌다가 그가 로저스 씨를 인터뷰하게 된 걸까? 로이드가 일하는 잡지사에서 '미국의 영웅'을 주제로 특집 기사를 내기로 했는데, 그 '영웅' 중 한 명에 로저스 씨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로이드의 악명(?)이 자자한지라, 그에게 인터뷰를 받고 싶다는 연예인은 없었다. 오직 로저스 씨만이 그와의 인터뷰를 받아들인 것.
진지한 기사를 써 온 로이드에게 간단한 400단어짜리 인물 프로파일을, 그것도 애들용 프로그램 진행자를 인터뷰해 써 오라니, 로이드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인터뷰 약속을 잡으려고 로저스 씨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저스 씨 본인에게서 인터뷰를 시간을 잡자는 전화가 걸려온다.
로저스 씨의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에 잠시 무장 해제된 로이드. 그는 인터뷰를 위해 로저스 씨가 있는 피츠버그로 향하는데...
우리에게는 많이 낯설 수 있는 '로저스 씨의 동네'는 약 30년간 미국에서 방영된(첫 방송이 1968년, 마지막 방송은 2001년)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뽀뽀뽀 유치원'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단순히 아이들만 열광시킨 게 아니었다. 진행자인 로저스 씨의 인품이 워낙에 뛰어나 아이들의 부모, 즉 성인들까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로저스 씨는 늘 자신의 프로그램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네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할 수 있든 할 수 없든 간에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가 되도록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다루는 방법과 어른들도 아이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알려 주려고 노력했다.
영화에서 나온 장면을 일례로 들자면, 스튜디오에서 텐트를 치는 장면이 있는데 로저스 씨가 아무리 애를 써도 텐트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
촬영 감독이 '텐트를 치기 쉽도록 미리 손을 좀 봐 놓을까요?'라고 (녹화하다 끊고 중간에) 묻자, 로저스 씨는 그냥 자신이 낑낑대는 장면을 촬영한 그대로 내보내자고 했다. "어른들도, 계획대로만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밥 로스 아저씨의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많은 한국인들이 밥 아저씨를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여기고 그리워하듯이, 그리고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아저씨를 자신의 유년기와 연결해 푸근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듯이, 로저스 씨도 그런 위치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로저스 씨와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기자와 그가 친구였다?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톰 주노드(Tom Junod)라는 기자가 로저스 씨를 인터뷰하고 쓴 기사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Can You Say... Hero?)"를 바탕으로 했다.
사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허구라서 100% 정확한 전기 영화라고 할 수는 없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영감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그래서 기사를 쓴 톰 주노드는 영화 속 자기 캐릭터가 자신과 상당히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이름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도 톰 주노드는 완성된 영화를 본 후, 자신과 로저스 씨의 관계는 잘 담아냈다고 평했다고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로저스 씨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나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큰 게 아니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로저스 씨가 얼마나 따뜻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또한 그런 인격적 존재가 가진 커다란 치유력을 느꼈다.
극 중 로이드 보겔은 병에 걸린 자신의 아내(=즉, 로이드와 로이드의 여자 형제의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아버지 제리(Jerry Vogel, 크리스 쿠퍼 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제리는 나름대로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로이드는 이미 마음을 닫은 상태였고, 여자 형제 로레인(Lorraine, 타미 브랜차드 분)의 결혼식에서는 심지어 제리와 주먹다짐을 해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기도 한다.
사실 제리는 이 영화의 창작물인데, 톰 주노드는 실제로 자신이 아버지를 거부하거나, 아버지와 여자 형제의 결혼식에서 싸운 적은 없다고 밝혔다(자기 여자 형제는 애초에 결혼식을 올린 적도 없다고).
그래도 로이드라는 인물이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내면에 쌓인 분노와 슬픔이 많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인물이 필요했기에 각본가가 제리라는 인물을 창조해 낸 게 아닌가 싶다.
100% 현실에 기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는 로이드와 프레드 씨의 우정, 그리고 로이드 말마따나 '상처 받은(broken)' 사람이 어떻게 로저스 씨를 만나 치유받고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도 회복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속에 쌓인 분노가 많고 인류애조차 없는 것 같은 로이드가 감화되어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도 감동할 것이다.
어린이보다는 '어른이'들에게 추천한다. 밥 로스 아저씨나 김영만 아저씨 등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로저스 씨가 누군지 잘 몰라도, '어린 시절 내가 필요했던,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나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짤막한 트리비아 하나. 영화에 보면 로이드와 로저스 씨가 뉴욕 지하철을 탔을 때 그 칸에 탄 모든 사람들(아이들 포함)이 '로저스 씨의 동네' 주제곡인 "내 이웃이 되어 줄래요?(Won't You Be My Neighbor?)"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이건 톰 주노드가 쓴 기사에 나오는 실화다!
참고 웹사이트: https://slate.com/culture/2019/11/mr-rogers-movie-a-beautiful-day-in-the-neighboorhood-accurac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