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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복길, <아무튼, 예능>

 

 

대종상을 웃기는 말투로 중계하고 해설해 한때 인터넷에 널리 퍼졌던 트윗을 혹시 아시는지?

그 트윗의 저자가 바로 이 책의 저자다(트윗 재밌게 써서 책을 쓸 기회까지 얻게 되다니! 정말 놀랍고 부럽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사와 동시대 TV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아주 절묘하게 버무려 낸다.

저자가 어릴 때 어머니와 할머니의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나름대로의 복수로 할머니의 TV 케이블 선을 잘랐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텔레비전은 나태함이자 두려움, 어딘가 죄스러운 물건이면서 동시에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내 나름대로는 텔레비전을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시어머니까지 얽힌 우리 집안 여자들만의 슬프고 억울한 투쟁의 도구로 여긴 셈이다. 가족에게서 꽤 많이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낸 10대 후반에도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습관은 남아 이어졌고, 그것만이 삶의 이유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제일 깊은 인상을 받은 것도 저자가 TV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는 것이다. "푹, 티빙,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IPTV와 최신 영화 VOD까지 포함하면 월 10만 원 정도를" 매달 스트리밍 사이트에 결제할 정도라고.

나는 TV를 별로 자주 보지는 않는 사람이고, 집에는 IPTV용 셋톱박스도 거실에만 있기에 내 방에서는 오직 공중파 채널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게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아서 여태까지 그냥 그렇게 놔 뒀다.

내가 영상보다는 활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아마도.

어쨌거나 저자의 TV 사랑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 정도 애정이 있어야 같은 TV 프로를 봐도 이런 감상을 써 낼 수 있는 거구나 싶다.

 

'아니, 어떻게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글을 쓰지?' 하고 감탄하게 만든 글이 이 책에 여러 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죽게 될 도시"라는 제목의 꼭지이다.

지방인으로서의 서러움이라고 할까, '서울 공화국'에 대한 지방민의 심정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중앙 방송'과 '지방 방송'의 차이를 끌어와서 표현했는데, 정말 기가 막히다.

학교 졸업하면 대구MBC 공채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왠지 부대꼈다. 지방에 사는 입장에서 학교 선생님이 종종 말했던 '지방 방송 꺼라'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면서 슬펐다. 지방 방송국이 만드는 모든 것은 제작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그저 타지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공적 이슈를 다루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보도에 의의를 둘 뿐, 그 이상의 일을 만들지 않고 만들 능력도 돈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제안은 고마웠지만 힘들게 준비해 지역 방송사 PD가 될 바엔 공무원을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역 방송사가 나를 합격시켜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때는 그랬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확실히 TV에서 보여 주는 광경은 대개 서울 위주이고, 심지어 뉴스에서도 서울과 비-서울 지역의 보도량 차이는 엄청나다(지진이나 태풍 피해가 서울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내용은 서울에서 일어난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낮은 빈도 수로 보도된다).

나는 언론계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운 좋게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 살았을 뿐이지만, 서울과 비-서울 지역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는 데는 100% 동의한다. 이건 확실히 고쳐져야 하는 부분이 맞는다.

 

<안녕하세요>를 보면서 자기 친동생의 고민에 일부러 진부하고 '쿨'한 대답을 했던(예컨대 업무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동생에게 "처음엔 다 그래",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게 아냐"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거다) 과거도 반성하고, 동시에 타인의 고민을 어떻게 하면 진지하게 공감하며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인상 깊다.

<우리 결혼했어요>를 다룬 꼭지는 "결혼이 삶의 기본 형태"가 되어 버린 예능이 이제는 결혼만이 인생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보여 주고 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땅 파기>라는 꼭지인데, <나는 자연인이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꼭지이다.

저자는 아버지랑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저자는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깔깔대고 웃었고, 아버지는 정말 진지하게 그 프로그램을 보셨단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셨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도 저렇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거였군. 내 주변에선 그리 인기가 있진 않은 한 종편 방송국의 프로그램이 늘 선호도 조사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6년이나 방영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 이 방송은 소재가 고갈될 일이 없을 것이다. 방송 시청을 통해 계속 자연인이 늘 테니. 실제로 제작진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 많은 자연인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아무래도 방송을 보고 자연인이 계속 양산되다 보니 출연진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고도 했다. 대체 누가 저런 삶을 동경해서 따라 한단 말인가 싶었는데 바로 내 옆자리에 자연인 워너비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제일 웃기다고 생각한 코미디쇼가 아빠한테는 교양 방송이었다. 아빠는 이승윤, 윤택의 표정에서 정말 아무것도 캐치하지 못하는 듯했다.

혼자서 진짜 많이 생각해 봤다. 나는 이 방송을 늘 골 때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대체 왜였지. 아마도 거의 모든 자연인이 대체의학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도 많지만 그들 대부분이 중년 남성이며 자연인이 된 이유가 도피성 은둔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택하지 않을 삶의 방식이기 때문일 거다. 연령이나 세대 문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그 방송 속 자연인들의 삶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미래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웃을 수가 있다. 내 주변 또래들한테 이런 얘기를 꺼내 보니 "확 머리 밀고 산 속으로 들어갈 거야!"라고 외치는 아빠는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

아하! 나도 언제나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방영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중년층은 왜 이 프로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대충은 알 것 같다. 이게 중년층, 그것도 특히 중년 남성들의 로망인가 보다.

 

이 재미있고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TV 프로 비평서를 다 소개할 수 없어서 아쉽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소개할까 한다.

<무한도전>의 종방에 대한 소회를 적은 꼭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나의 이유는 이렇다. 한국어가 서툰 러시아 며느리가 등장하거나 성인 남성을 결혼시키려고 미모의 여성과 돌아가며 선을 잡는 것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쇼는 끝나야만 했다. '국민 예능' 역할의 일환으로 시의적인 주제를 고정 패널끼리 토론하는 것도, 여성은 이영애와 김연아처럼 신성시되는 자리에서만 볼 수 있거나 남성 출연자들의 들러리로 출연해 이유 없이 인신공격을 당하는 역할로 제한되어 있는 것도 더는 흥미롭지 않았다. 역사를 말하고, 소외된 것을 듣고, 불의에 참지 않으며,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든 기회가 오로지 남성에게만 주어진 방송을 보면서 공감하고, 감동하고, 응원하는 일도 앞으로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비교적 단출하게 열린 <무한도전>의 장례식에서 나는 나의 지나간 시간과 시대, 내 과거의 가치관들을 묻고, 죽음을 추모한다. 조금은 서글프지만, 반가운 마음으로.

그리고 이쯤 해서 예측했을지도 모르지만, 책 중후반부터는 송은이, 장도연, 김숙, 김신영 등 여성 코미디언의 언급도 많아지며, 전반적으로 여성주의적 시점에서 TV를 바라본 비평도 많이 등장한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미디어 중 하나인 TV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적 시각을 길러 보고 싶다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꼭 그렇지 않다 해도, 그냥 재밌는, 또는 재미없는 TV 프로를 보고 친구와 수다 떨듯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아, 참고로 2019년 9월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니, 이 책에 언급된 TV 프로들이 종영하기 전에, 아직 방영 중일 때 보시는 게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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