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정섭, <내가 멸종 위기인 줄도 모르고>
저자는 스스로를 '인간 개복치'라 부르는 중년(40대)의 남성이다. 왜냐하면 너무 예민하고 소심해서 삶이 힘들 정도라서.
저자가 어느 정도로 소심하냐면, 면접 날에는 우황청심환을 먹었음에도 면접이 있던 건물 화장실에 토했을 정도다.
이 에세이는 그런 저자의 소심함이 곳곳에 묻어 있는데, 일단 1부 제목은 "왠지, 나 인간 사회에 안 맞는 것 같아"인 데다가, 첫 번째 꼭지는 "개복치의 위대한 삶"이다.
사소한 것에서 너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생존 확률이 고작 0.000004%에 불과한 개복치. 소심한 사람들의 스피릿 애니멀(spirit animal)은 단연코 개복치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말이다. 0.00004%의 확률, 기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부여잡은 개복치에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복어목 물고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개복치는 껍질이 두껍고 거칠다. 두꺼운 껍질에 커다란 덩치까지 더해져 천적이 거의 없어진다. 개복치는 해파리나 씹으며 햇볕을 쬐고, 복잡한 세상사와는 무관하게 평생 망망대해를 자유로이 부유한다. 가다랑어 무리와 고등어 무리 사이에 벌어진 다툼도 신경 쓰지 않는다. 뭣도 모르는 새파란 참치 청년이 허리춤을 꽉 깨물면 개복치는 슬픈 눈으로 슬쩍 쳐다본 후 옆으로 몸을 옮길 뿐이다.
게다가 개복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개복치는 그렇게 잘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와이 에쓰로 박사님도 쉽게 죽는 개복치를 보지 못했으며, 자신이 취합한 1,300개의 개복치 기록물에도 그런 사실은 없다고. 도리어 민간설화에선 생김새 탓에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다고. 어릴 때 사망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른이 되면 바다세상에서 나름 중간은 가는 물고기가 된다고 박사님은 말했다.
세상의 개복치 여러분, 중간은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희망찬 말인가! 게다가 저자의 글은 소심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그것을 잘 다루는 법을 배워서 오히려 그걸 자기 무기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소심한 성격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여차저차 해서 신문사 기자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잡지사 기자가 되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하시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
내가 저자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공감한 건, 행복은 사소한 것, 가까운 데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심이들은 생각을 통해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찾으려 하지만, 그 노력은 오히려 소심이를 불행으로 이끈다. 행복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행복을 향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엔 없는 탓이다. 살면서 알게 된 건 행복 비스름한 것들은 순간순간의 일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복 비스름한 것이 바로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것.
내 생각도 그렇다. 사람들은 행복이 엄청 거대하고 굉장한 거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고백에 성공해서 애인과 사귀기로 할 때, "합격하셨습니다"라는 합격 안내 글을 볼 때, 아니면 뭔가 큰일을 성취할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행복을 대단한 것으로 상정하고 그런 '행복한' 순간을 상상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떠미는 셈이다.
행복은 별것 아니다. 친구들이랑 수다를 떠는 순간, 맛있는 음식(그게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이라고 해도)을 먹는 순간, 주말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펴는 순간, 그런 사소한 순간순간들이 행복이다. 지금 지나가는 1초 1초가 당신 인생이듯이.
아픔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한 글도 좋았다. 폴 바튼이라는 영국인 피아니스트는 우연히 태국 코끼리 보호소를 들렀다가 몸도 마음도 망가진 코끼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코끼리를 돕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해 코끼리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 주기로 결심한다.
보호소는 이를 허락해 주었고, 바튼 씨는 피아노를 영차영차 산중턱까지 옮겼다. 그리고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코끼리들은 그의 피아노 연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귀를 펄럭거리면서. 그래서 바튼 씨는 8년째 코끼리들에게 음악을 들려 주고 있다.
번뇌를 벗어 버리라는 현자의 말 한마디로 아픔을 잊기엔 우리 대다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쌓인 아픔만큼 즐거움 역시 적립돼야 살아갈 에너지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몇몇 아픔을 겪고서 나는 즐거운 순간의 총합을 키우자고 마음먹었다. 그게 야키토리든 클래식 음악이든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아, 웃긴 부분도 잠시 소개해 볼까. 난 여기가 제일 웃겼다.
결혼한 남녀들은 흔히 어쩌구저쩌구 결혼에 대한 일반론을 펼치곤 하는데, 미혼인 독자 여러분은 딱히 귀 기울여 듣지 말길 권한다. 고정관념에 얄팍한 자기 경험을 덧댄 단견이 대다수다. 예컨대 '결혼한 여자는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한 아내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 늘 동일한 수준으로 화가 나 있다. 기분 좋음 수치 10점 만점에 3~4점대가 꾸준히 유지된다. 기복이 심하다니 무슨.
'여자는 기분 나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기분 나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내 경우엔 틀린 팩트. 이 논리에 따르면 조금만 버티면 다시 상황이 좋아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내는 늘 정확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기분이 나쁘다. 집에 있는 시바견 따위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분이 좋아진다.
참고로 시바견이란 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던하고 별로 따지려 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아내는 반면에 고양이 같다고 표현된다).
책 본문에 최민석 작가의 "우리가 사는 삶의 이야기들은 사실 자질구레한 일상의 조합입니다."라는 말이 인용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이 책도 그런 자질구레한 일상의 조합이고, 딱히 교훈이랄 것도 없지만, 사소하게 웃기고 소심이들이 공감한 대목들이 많다.
생각이 너무 많거나 삶이 힘들다면 저자가 과거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처럼,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12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10년 후에 넌 어차피 와이프 물 떠 주고 있을 거야. 너무 고민 말고 적당히 해."
고양이 같은 아내 물 떠 주고, 생선 구우며 지낼 줄 알았으면,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거나 할걸.
결혼을 하고 안 하고, 물을 떠 주고 안 떠다 주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을 생각보다 훨씬 순탄하게 잘 풀릴 거니까 걱정 마시라는 말이다. 기억하시라, 개복치도 중간은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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