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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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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샌드라 거스, <묘사의 힘>

 

 

종이책 기준 156쪽밖에 안 되는, 얇고 가벼운 책인데 내용은 강력하다.

"보여 줘라, 말하지 말고(show, don't tell)"라는 격언은 소설가를 비롯한 이야기꾼들에게 자주 전해지는 조언이다.

영화 같은 영상 매체를 보듯이, 이야기가 독자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바로 생생한 묘사의 힘을 통해서!

 

짧지만 묘사의 원칙을 간단히 설명하고 구체적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므로 딱히 책 내용이 빈약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말하는' 부분을 포착해 '보여 주는' 문장으로 바꾸려면 일단 '말하기'를 나타내는 빨간 깃발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그 종류를 결론, 추상적 표현, 요약, 인물 배경, 부사, 형용사, 서술격 조사나 수동적인 동사,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상태를 인지하는 동사 등 아홉 가지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일부러 싸움을 걸려는 것이 명백했다."라고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에, ""지금 뭐라고 헀어? 그는 을러대며 존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라고 보여 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생체 반응을 확인했다."라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표현 대신 "여자는 몸을 구부려 그의 목에 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가냘픈 맥박이 여자의 손끝에서 뛰었다."라고 쓰라고 제안한다.

말하기 유형 중 하나 더, '요약'을 본다면 "나는 방수포가 덮여 있는 트럭 짐칸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독자의 머릿속에 심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므로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트럭 짐칸에 올라 방수포를 젖혔다. 메스껍고 달큼한 악취가 풍겨오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삼켰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게 아무래도 영어 구사자가 영어로 쓰인 글을 논한 것이다 보니까 한국어에 100% 들어맞는지는 조금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대놓고 '~이다/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확실히 생생하게 묘사하는 게 글을 재미있고 살아있게 만들긴 한다.

그런데 시제에 대한 부분(특히 대과거!)이라든지 '말하다'라는 동사 대신에 다른 동사(예컨대 '불평했다' 같은 동사)를 쓰려는 경향을 버리라는 조언 등이 과연 한국어에도 유효할까?

나는 한국어 전공자는 아니지만 원어민으로서 대과거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데, 그래서 '-었었-'을 보면 몸에 소름이 끼친다.

굳이 과거를 두 가지로 나눠서 쓸 필요가 있나? 

예컨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과거에 축구 선수였던 사람이 있다면(지금은 아니고), 그리고 10년 전에는 뭐 테니스 선수였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축구 선수가 되기 전에는 테니스 선수였다."라고 하면 되지 굳이 '테니스 선수였었다'라고 못생긴 '-었었-'을 써야 하나?

국립 국어원 사전에 '-었었-'이 있다는 건 아는데 나는 이게 너무 어색하다.

뭐, 내가 한국어의 권위자가 아니니까 쓰지 말라거나 피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영어와 한국어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표현과 문법 등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가 이런저런 자료도 찾아보고 나름대로 연구를 해야겠지.

그리고 또 묘사의 힘만으로도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느냐 한다면, 글쎄.

소설이라면 줄거리도 중요하고, 등장인물이 얼마나 특별하면서도 공감할 만한 인물인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으며, 또 클리셰라도 그걸 또 어떻게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풀어나가느냐도 작가의 능력이고 재능이니까 묘사 하나만 가지고 베스트 셀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묘사의 기술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생생한 묘사로 글의 맛을 살리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도움이 되는데 짧기까지 하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이 책을 한 1시간 만에 읽었다면 이제 여러분의 몫은 10년, 아니 최소한 1년간 이걸 연습하며 글을 써 보는 것이리라. 

출판사 블로그에서 워크북도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니 실전 연습을 해 보고 싶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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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휘빈,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

 

 

2013년에 데뷔를 해서 지금까지 웹소설 판에서 살아남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저자가 웹소설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를 준비했다.

나는 웹소설을 쓰려는 건 전혀 아니지만, 평소에 웹소설을 심심풀이로 자주 읽기 때문에 이 주제가 흥미로워서 한번 읽어 보았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의 목표와 범위를 이렇게 설정했다.

완전히 처음부터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면 기초 작법서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배우고 싶다면 시나리오 작법이나 캐릭터 소설 쓰는 법에 대한 책이 다수 존재한다. 다만 웹소설이 가지는 특징과 호흡에 맞춘 작법서는 아직 없다.

이 책은 웹소설 쓰는 법에 중심을 두고 있으나 일반적인 작법서는 아니다.내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정신적 위험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꺾이지 않는지'에 중심을 두고 썼다.

나는 아주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웹소설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랜 기간 웹소설의 시장성과 대중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작가로서 나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도 탐구헀으며 개인지 및 합동지 출간 같은 독립 출판도 여러 번 진행해 보았다. 이전부터 전자책 매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해 오랫동안 정보를 수집하고 행사에 참여해 왔고, 직접 전자책을 제작해 본 경험도 있다. 작가로서도 나는 만족할 만큼 성공했으며 주변에 장르소설과 일반 도서 편집자들, 유통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장르소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웹소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알려 주고 싶다.

 

전반적으로 저자가 이 웹소설 계에 대해 잘 알고, 또 이제 후배(가 될지도 모르는 웹소설 작가 지망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조언을 해 주고자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고 훈훈하다.

자신이 이미 겪어 봤으니 후배들은 좀 더 쉽게 길을 갈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 선배로서 참 바람직한 자세다.

 

저자의 통찰력도 놀랍다. 내가 그걸 강하게 느낀 건 로맨스소설에 대한 설명 부분이었다.

로맨스소설이 보수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저자의 말을 들으니 납득이 되었다.

먼저 로맨스소설은 기본적으로 성인 여성을 위한 장르다. 정확히는 기혼 여성을 위한 장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관계자들은 늘 로맨스의 핵심 소비층이 40~50대 여성이라고 말해 왔는데 이는 1980년대에 할리퀸 시리즈를 읽던 세대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관계자나 작가들, 독자들 사이에서도 "로맨스소설은 보수적"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도 로맨스소설은 기혼 여성, 그중에서도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장르이다.

로맨스소설은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로맨스소설에 대해 편견을 가진 남성들이 실제로 로맨스소설을 접하고 가장 충격 받는 부분은 남자주인공의 성적 매력을 평가하는 장면이나 섹스 장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표현 수위는 가벼운 것부터 과격한 것까지 다양하게 있지만 어쨌든 로맨스소설에서 섹스 묘사는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맨스소설은 성인 여성을 위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

마무리하자면 로맨스소설은 낭만적 공상에 기반한 장르가 아니다. 현실의 벽을 아는 여자들이 환상이라는 벽돌로 완벽하게 쌓아 올린 성이 바로 이 협의의 로맨스다. 협의의 로맨스를 쓸 생각이 있다면 이런 욕망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허황된 꿈이나 환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며, 무척 현실적인 성공과 권력, 인정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하는 장르리므로 섣부른 편견을 안고 손대지 않길 바란다.

나는 로맨스소설에서는 여주가 남주의 성적 매력이나 외모를 평가하고, 또 여주가 연애할 수 있는 대상(남주와 서브 남주들 포함)들이 언제나 여주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려고 하고 그들에겐 그녀가 거의 삶의 이유인 듯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에 굉장히 전복적인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보수적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냥 '즐기기만' 하는 (성적인 의미를 포함해) 자유분방한 여주가 있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상 필연적으로 남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들이 굳이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배타적인 둘만의 관계를 성립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둘만의 사랑 말고 폴리 아모리처럼 완전히 급진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이상향으로 묘사하는 로맨스소설이 몇이나 될까? 아주 적을 것이다).

 

어떤 장르의 웹소설을 계획하거나 쓰고 있든, 웹소설이라고 하면 누구나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편견이 있을 것이다. 글을 써서 쉽게 돈을 번다든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나 소재라도 돈을 위해 그냥 써갈기면 독자들이 좋다고 할 거다 등등. 정말 그럴까?

- 몇 시간 만에 며칠 치 일을 하고 논다.  → 틀렸다.
- 상사도 없고 잔소리도 없다. → 모든 독자가 당신의 상사다. 게다가 모두 요구 사항이 다르다.
- 편하게 집 안에 틀어박혀 앉아서 일한다. →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맞다. 그러나 모든 재택 근무자들이 그렇듯 이들은 집 밖에 나가지 못해 건강을 위협받는 사람들이다. 1주일 동안 대문 밖으로 못 나가는 자체 유폐 생활은 사람의 육체와 정신 건강을 해친다.
- 따뜻한 아랫목에서 → 당신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면 부모는 당신이 얼마를 벌어도 번듯한 직장 없는 방구석 폐인으로 보며 "집 안ㅇ에 있으면서 왜 이것도 안 하냐"고 잔소리를 할 것이다.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방문을 벌컥 열고 청소나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다. 독립했다면? 당신의 생활은 모두 당신이 관리해야 하며 여기에도 큰 에너지와 시간이 들어간다.
- 1,000만 원 → 소수의 이야기다. 내가 본 웹소설계 작가 벌이는 다음과 같다. 상위 1%, 100명 중 한 명은 월 1,000만 원 정도는 쉽게 번다. 최대 억 단위까지도 올라가는 유동성 높은 계층이다. 두 명은 900만~600만 원 정도로 번다. 열 명은 500만~300만 원 정도로 번다. 스무 명은 100만 원 전후로는 번다. 나머지는 밥값도 못 번다. 한국 경제보다도 더 허리가 없는 극단적인 부익부빈익빈 시장이다. 현실적으로 노려 볼 만한 것은 10% 안에 드는 것이겠고, 실제로는 '밥값도 못 버는 축'에 속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신이 1~2% 안에 당연히 들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신입사원이 '취직했으니 이제 대표나 임원진만큼 벌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1%도 매달 같은 금액을 버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영업자이며 프리랜서임을 잊지 말자.

 

프리랜서라 상사도 없고 강제되는 규칙도 없어서 편할 거라는 건 정말 말 그대로 마음 편한 생각에 불과하다. 꼭 웹소설 작가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든 프리랜서를 꿈꾸는 분들이라면 아래 책처럼 프리랜서의 현실을 정확히 잘 알려 주는 정보를 접하실 것을 강력히 권한다.

2019.05.27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책 감상/책 추천]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책 감상/책 추천] 서메리,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제목부터 공감 100%! 저자는 회사 생활 5년 차에 자신은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프리랜서로 전향한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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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책 감상/책 추천] 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책 감상/책 추천] 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지난번 리뷰를 쓴 책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나 싶지만, 요즘 리디셀렉트가 콘셉트를 이렇게 잡았는지 이런 류의 책이 연달아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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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특히 프리랜서들 중에서도 예술계 종사자라면 더더욱 멘탈 관리를 잘해야 한다. 저자도 이 책에서 특히 정신 건강을 챙기고 심리적 안정을 꼭 의식적으로 돌볼 것을 당부하는 말을 많이 한다. 여기에서 후배에 대한 애정도 많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웹소설의 특성상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분석하는 부분도 나에겐 인상 깊었다.

저자는 이를 "문장은 간단하게, 쓸모없는 수식은 적게, 전개는 빠르게"라고 요약하는데, 독자들이 웹소설을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여유롭게 읽는 게 아니라, 출퇴근길(등하교길), 또는 일이나 공부/작업 등을 하며 틈틈이, 그리고 퇴근/하교 후 휴식을 위해, 잠들기 전에 잠시 읽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하게 묘사할 필요도 없고 그런 걸 독자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저자가 드는 예시처럼,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펼칠 게 아니라 "그는 슬펐다."라고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웹소설에 특화된 글쓰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책을 참고하시라.

 

나는 웹소설을 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을 꽤 흥미롭고 재밌게 잘 읽었다.

웹소설이라는 험한 길을 나아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며 등을 토닥이고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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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대니 그레고리, <내 머릿속 원숭이 죽이기>

 

 

무슨 일을 하려고만 하면 나타나서 '넌 할 수 없어', '넌 실패할 거야' 등의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는 머릿속의 목소리를 닥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저자 대니 그레고리는 이러한 마음속 비평가를 '내 머릿속 원숭이'라고 표현한다(원제가 <Shut Your Monkey>인 것도 그래서이다).

이 원숭이는 특히 예술적인 행위(그림 그리기나 글쓰기 등)를 하려고 할 때 자주 튀어나오는데, 이 성가신 목소리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들이 자리 잡힌 것에 불과하다.

'그거 먹지 마', '조심해!', '이거 안 될 거라고 했잖아!' 등, 부모님이 해 주시던 그런 말들 말이다.

부모님들은 안전을 위해, 우리가 위험을 피하기를 바라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그런 말들을 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안전 구역(comfort zone)에서만 지내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고, 새로운 예술은커녕 창의력이 필요한 사소한 일상의 일도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머릿속의 원숭이를 대면하고 입 닥치게 만들어야 한다.

원숭이의 망상('이 프레젠테이션은 망했어. 너는 해고될 거야' 같은)에서 빠져나오는 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 보는 것이다.

 

분주하게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자신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봐라. 나의 경우, 새벽 세 시에 원숭이가 내 귀에 대고 재잘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면, 속절없이 어둠 속에서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책상으로 가서 무엇이든 그리거나 써본다. 그것이 기적의 치유법이다. 등도 안 아프고 알레르기도 줄어들고 은행 잔고도 적자를 면할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이 편안해져 원숭이가 다시 잠이 들면 나도 다시 잠자리에 든다.

 

두려움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근육을 사용하면 아프듯이 불편하지만, 당신은 그걸 견뎌 낼 수 있도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머릿속 원숭이가 뭐라고 씨불대건, 우리는 이를 악물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어떤 비난이든 그에 대해서는 더 많은 작품으로 대응해야 한다. 검이나 변호사는 잊어라. 붓과 펜으로, 또 앱으로, 치료제로, 노래로, 또 단 한 페이지의 글로라도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라.

 

모든 예술가, 특히 위대한 예술가는 자기 머릿속 원숭이를 결국에는 극복해낸다. 생산성에 높을수록 전쟁의 상흔은 더 많아진다. 파블로 피카소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창의적이었던 것은 머릿속에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것은 매일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전투였다.

 

원숭이의 치명적인 적은 꿀벌이다.

꿀벌이 열심히 일을 하며 윙윙대면 원숭이가 하는 말을 덮어 버린다. 윙윙 윙윙.

 

한번 시도해 봐라.

윙윙거리는 꿀벌이 되어 동이 트자마자 쏜살같이 벌집에서 나와 계속 날아다녀라. 하던 일을 중단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이런 노력의 목표가 있는지, 다른 벌들이 일을 잘해서 더 많은 꽃가루를 가지고 벌집으로 돌아가는지 고민하지 마라. 태양을 등에 업고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한 채, 날개로 봄의 공기를 휘저으며 초원을 가로질러 계속 날아다녀라. 만일 원숭이가 목소리를 높이면, 더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면서 단어를 모으고 아이디어를 찾아다니며 쉼 없이 펜을 움직여라. 도넛을 만들 시간이다. 꿀, 꿀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지금 일을 잘하고 있는지 자꾸 궁금해진다면, 계속 확인하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어라. '물론이야, 정말 대단해.' 세부적인 판단은 나중으로 미뤄라. 당신이 생각한 아이디어 중 몇 가지가 형편없다고? 상관없다. 변변치 않은 것이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 일단 적어놓고 다음 꽃으로 이동해라.

 

나도 이 포스트를 쓰기 전에도, 그리고 쓰는 중에도 내내 고민했다. 내가 정말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잘 쓰고 있는가? 책을 자세히, 좋은 포인트를 잘 소개하고 있는가?

나보다 더 이 책을 더 잘 요약해서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이걸 보고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나는 그렇게 걱정만 하면서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글을 쓰다가 엎어 버리고 지워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일단 그냥 글을 끝까지 다 쓰는 걸 목표로 삼는다. 어차피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말을 내가 쓸 수 있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완성된 것이 완벽한 것보다 낫다).'

나는 완벽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완성된 글을 쓰려고 노력할 뿐이다.

어느 시점까지는 질(quality)보다 양(quantity)이 더 중요하다. 질을 따질 수준에 오르기 전에는 일단 그게 글쓰기든 그림 그리기든, 도자기 만들기이든 간에, 많이 해 봐야 한다.

여러분도 처음부터 너무 완벽한, 좋은 걸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일단 완성부터 하는 걸 목표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일단 부담감이 사라져서 훨씬 더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글쓰기든 뭐든 간에).

 

저자는 꿀벌 이외에도 원숭이를 물리칠 수 있는 대상으로 사자를 든다.

사자는 순간의 영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열심히 집중하는 순간의 두려움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신이 사자를 나타나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이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사자가 나타날 것이다.

또한 당신은 사자에게 영감이라는 먹이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줘야 한다. 책을 읽고, 박물관 전시를 관람하고, 다양한 강연을 듣고, 예술가들을 만나고 등등.

 

사자는 당신은 멀리 데려갈 수 있다. 우선 원숭이를 가차 없이 차버림으로써 사자의 등을 가볍게 해주어라.

 

영감과 용기를 주는 따뜻하고 친절하며 단호한 말들이 무척 보석 같은 책이다.

실제 사진 위에 크레용으로 낙서한 것 같은 그림과 만화 같은 글씨체의 삽화도 유쾌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창의력을 펼칠 용기를 내도록 북돋아 주는 책이 한 권 더 필요하다면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빅 매직>도 같이 추천한다.

이 책, <내 머릿속 원숭이 죽이기>와 <빅 매직> 둘 다 옆에 두고 기운이 처질 때, 창의적인 일을 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영감을 받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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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정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20년 넘게 단행본 교정 교열을 해 온 저자가 전작 <동사의 맛>에 이어 이번에는 문장을 다듬는 법을 알려 준다(부제도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이다).

저자는 뻣뻣하게 이런저런 '비문학적' 내용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전작처럼) 짧은 소설 이야기와 병행한다.

함인주라는 (가상의) 작가의 글을 고친 이야기 속 화자가 어느 날 작가로부터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하고 묻는 메일을 받는다.

화자는 다소 당황하지만 '모든 문장은 이상하고 '정상적인' 문장이란 없다. 나는 교열자로서 적어도 당신의 글에 있는 모든 문장이 일관성 있게 이상하도록 고칠 뿐이다.'라고 답장을 보낸다.

이 말에 작가는 다시 답장을 하고, 그들은 다소 철학적이기까지 한 토론에 이른다(한국어 글쓰기 책에서 철학이라니! 일거양득 아닌가!).

 

나는 그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모든 문장은 이상하고 정상적인 문장이란 없다. 정확히 인용하자면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문장은 다 이상하죠. 제겐 그렇습니다. 20여 년간 남의 문장을 읽고 맞춤법에 맞게 고치고 어색하지 않도록 다듬는 일일 해 왔지만, 이제껏 이상하지 않은 문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일을 하는 한은 내내 그러리라 믿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상하지 않은 문장, 요컨대 '정상적인 문장'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정상적인 문장은 과연 어떤 문장이며 누가 쓴 문장일까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상적인 내용'은 또 어떤 내용일까요? 상상하기 어렵군요.

모든 문장은 다 이상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상한 것처럼 말이죠. 제가 하는 일은 다만 그 이상한 문장들이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이상하도록 다듬는 것일 뿐, 그걸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이상한 문장을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저야말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략) 왜 이런 식으로 묻게 되었을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아, 이분은 자신의 문장이 표준이랄 만한 문장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궁금해하는구나 하고 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말장난 같은 답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표준적인 문장 같은 건 없노라고 말이죠.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심지어 맞춤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맞춤법이란 그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죠. 게다가 지금처럼 국가 기관이 맞춤법을 통제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맞춤법에 그렇게 목을 맬 이유도 없지 싶습니다. 다만 책을 사서 읽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후략)

나는, 어제 메리 노리스의 <뉴욕은 교열 중> 독서 후기에서도 썼듯이, 교열자란 끊임없이 변하는 기준을 붙잡고 그것에 다른 글을 맞추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불안정하든 간에, 일정한 기준 없이는 글을 고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기준, 잣대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것에 비춰서 다른 것을 살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화자는 모든 문장이 이상하다고, 정상적인 문장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는 일조차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일관적으로 이상하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그럼 내가 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맞춤법이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라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문장이 없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가 '그러한 것이 반드시 있다! 저자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정상적인 문장이 없다고 상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어느 정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있지 않나?

예를 들어서 '정상'이란 게 없다고 해서 다들 '연필'이라 부르는 물건을 나 혼자 '지우개'라고 부른다거나, 주어와 목적어, 동사의 순서를 제멋대로 바꾸고 조사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의사소통에 큰 혼란이 올 게 뻔하다.

다시 내가 한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기준이란 게 아무리 애매하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거의 절대적인 기본 원칙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나는 그걸 좀 더 견고하게 생각하는 거고.

아니면 내가 너무나 '기준', '정상', '옳고 그름'에 목을 매는 걸까?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또 그중에서도 번역된 외서를 많이 읽은지라 내게는 내가 '바르고 정확한 우리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확신이 없다.

대학생 때는 "말투가 미드 번역투"라는 말을 듣기도 해서, 그 이후로 일부러 더 피해야 할 번역 어투라든지 한국어다운 표현 등을 공부해서 익숙해지고 노력했다.

지금은 적어도 내가 아는 것만큼은 잘 주의해서 의식적으로 한국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는 건? 여전히 틀릴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그렇게 '아름답고 정확한 한국어'에 집착하는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허상일 뿐이라고 해도.

 

책에서 가르쳐 주는 주의할 점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적·의를 보이는 것·들'(접미사 '~적', 조사 '~의', 그리고 의존 명사 '것', 접미사 '-들')은 습관적으로 쓰일 떄가 많으니 주의해서 잡아내야 한다는 점 등은 무척 유용하다.

고쳐야 할 문장들을 주루룩 보여 주고 고쳐 보는 연습도 하는데, 이건 어렵지 않지만 이걸 과연 내가 다 기억해서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든다.

말하자면 수학에서 어떤 개념을 배우고 나서 그와 관련된 연습 문제를 바로 풀어 보면 그때는 쉽게 느껴지지만, 좀 더 뒤로 가 그 단원에서 배운 개념이 몽땅 무작위로 나오는 연습 문제들을 보면 '여기에 어떤 개념 또는 공식을 사용해야 하더라?' 싶어서 헷갈리듯이 말이다.

이 책은 가까이 두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외우듯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위에서 인용한 '이상한 문장' 이야기 말고도 글 속 작가가 카프카의 단편 소설 <유형지에서>를 인용하며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치욕을 느껴야 하느냐고 묻는 부분도 있는데, 이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내가 이해를 못해서 여기에서 다룰 수가 없다.

어쨌든 간에 글쓰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바르고 정확한 우리말'을 추구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꼭 읽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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