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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샌드라 거스, <묘사의 힘>

by Jaime Chung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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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샌드라 거스, <묘사의 힘>

 

 

종이책 기준 156쪽밖에 안 되는, 얇고 가벼운 책인데 내용은 강력하다.

"보여 줘라, 말하지 말고(show, don't tell)"라는 격언은 소설가를 비롯한 이야기꾼들에게 자주 전해지는 조언이다.

영화 같은 영상 매체를 보듯이, 이야기가 독자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바로 생생한 묘사의 힘을 통해서!

 

짧지만 묘사의 원칙을 간단히 설명하고 구체적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므로 딱히 책 내용이 빈약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말하는' 부분을 포착해 '보여 주는' 문장으로 바꾸려면 일단 '말하기'를 나타내는 빨간 깃발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그 종류를 결론, 추상적 표현, 요약, 인물 배경, 부사, 형용사, 서술격 조사나 수동적인 동사,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상태를 인지하는 동사 등 아홉 가지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일부러 싸움을 걸려는 것이 명백했다."라고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에, ""지금 뭐라고 헀어? 그는 을러대며 존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라고 보여 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생체 반응을 확인했다."라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표현 대신 "여자는 몸을 구부려 그의 목에 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가냘픈 맥박이 여자의 손끝에서 뛰었다."라고 쓰라고 제안한다.

말하기 유형 중 하나 더, '요약'을 본다면 "나는 방수포가 덮여 있는 트럭 짐칸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독자의 머릿속에 심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므로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트럭 짐칸에 올라 방수포를 젖혔다. 메스껍고 달큼한 악취가 풍겨오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삼켰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게 아무래도 영어 구사자가 영어로 쓰인 글을 논한 것이다 보니까 한국어에 100% 들어맞는지는 조금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대놓고 '~이다/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확실히 생생하게 묘사하는 게 글을 재미있고 살아있게 만들긴 한다.

그런데 시제에 대한 부분(특히 대과거!)이라든지 '말하다'라는 동사 대신에 다른 동사(예컨대 '불평했다' 같은 동사)를 쓰려는 경향을 버리라는 조언 등이 과연 한국어에도 유효할까?

나는 한국어 전공자는 아니지만 원어민으로서 대과거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데, 그래서 '-었었-'을 보면 몸에 소름이 끼친다.

굳이 과거를 두 가지로 나눠서 쓸 필요가 있나? 

예컨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과거에 축구 선수였던 사람이 있다면(지금은 아니고), 그리고 10년 전에는 뭐 테니스 선수였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축구 선수가 되기 전에는 테니스 선수였다."라고 하면 되지 굳이 '테니스 선수였었다'라고 못생긴 '-었었-'을 써야 하나?

국립 국어원 사전에 '-었었-'이 있다는 건 아는데 나는 이게 너무 어색하다.

뭐, 내가 한국어의 권위자가 아니니까 쓰지 말라거나 피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영어와 한국어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표현과 문법 등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가 이런저런 자료도 찾아보고 나름대로 연구를 해야겠지.

그리고 또 묘사의 힘만으로도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느냐 한다면, 글쎄.

소설이라면 줄거리도 중요하고, 등장인물이 얼마나 특별하면서도 공감할 만한 인물인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으며, 또 클리셰라도 그걸 또 어떻게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풀어나가느냐도 작가의 능력이고 재능이니까 묘사 하나만 가지고 베스트 셀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묘사의 기술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생생한 묘사로 글의 맛을 살리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도움이 되는데 짧기까지 하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이 책을 한 1시간 만에 읽었다면 이제 여러분의 몫은 10년, 아니 최소한 1년간 이걸 연습하며 글을 써 보는 것이리라. 

출판사 블로그에서 워크북도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니 실전 연습을 해 보고 싶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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