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하이, 젝시(Jexi, 2019) - 내 인생을 구하러 온 내 인생의 파괴자, 젝시
감독: 존 루카스, 스캇 무어(Jon Lucas, Scott Moore)
필(Phil, 아담 드바인 분)은 어릴 적부터 휴대전화와 자랐다. 엄마아빠가 싸울 때면 늘 자신에게 이거나 갖고 놀라며 당신 휴대전화를 주셨으니까.
그렇게 휴대전화에 온갖 정신이 팔린 채로 성장한 필은 현재 '라이언 고슬링같이 생긴 고양이' 같은 시답잖은 리스티클(listicle, 목록으로 된, 가벼운 내용의 글)을 써서 업로드하는 버즈피드(buzzfeed) 같은 미디어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오늘 상사 카이(Kai, 마이클 페나 분)가 퇴근 전까지 리스티클을 무려 스무 개나 써서 내란다. 안 그러면 잘릴 줄 알라고. 물론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필은 자기 옆에 앉은 동료, 크레이그(Craig, 론 푼체스 분)에게 자신이 미리 작성해 둔 리스티클이 열 개나 있다며, 그걸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다.
크레이그는 무척 고마워하며, 역시나 필 근처에 앉아 있는 다른 여자 동료 엘레인(Elaine, 샤린 이 분)과 같이 킥볼하러 오라고 한다.
사실 오늘 저녁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바쁜 척하며 이를 거절한 필. 역시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린 채로 집으로 가다가 어떤 여자와 부딪힌다.
그런데 필의 반응은 여자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땅에 떨어진 자기 휴대전화가 괜찮은지 먼저 살피는 거였다. 다행히 휴대전화는 무사했다.
이에 약간 기분이 상한 여자는 먼저 뾰로통해서 "저도 괜찮아요" 하고 말한다. 자기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듯.
그제서야 뒤늦게 예의를 차리러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엄청 예쁜 여자다! 새로 생긴 자전거 가게 주인인데 이름은 케이트(Cate, 알렉산드라 쉽 분)란다.
그녀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데, 그녀도 웃는다. 왠지 느낌이 좋아! 그런데 그녀와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뒤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며 필을 밀치고, 필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떨어뜨린다.
이번엔 완전히 사망했다. 세 토막이 나 버린 폰을 들고 고치러 가게에 가니 고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점원(완다 사이스크 분)은 "너희 휴대전화 중독자들은 마약 중독자보다 더해. 마약 중독자들은 적어도 가끔 한 번씩 일어나서 마약을 구하러 가는데, 너희들은 그러지도 않잖아!"라고 일침을 놓는다.
어쨌거나 따끔한 독설을 들으면서 구입한 새 휴대전화를 들고 집에 온 필.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고 새 휴대전화를 켜니 시리 같은 여성의 기계음이 자신을 맞이한다.
자신의 이름은 '젝시(Jexi)'라며, 자기 목표는 필의 인생을 더 낫게 만드는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 어딘가 좀 이상하다.
사용자 약관을 읽어 보겠느냐 물었을 때 필이 "아냐, 됐어"라고 대답했더니 "멍청하긴"이란다.
응?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하지만 다시 태연하게 이전 휴대전화의 기록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필의 계정 비밀번호를 물어본다. 필이 "비번은 필(phil)123456이야"라고 대답하니 또 다시 멍청하다고 욕하는 젝시. 얘 왜 이래?
그래 놓고 다시 태연하게 뭐 하고 싶으냔다. 필이 저녁을 주문해 달라고 하니 늘 먹던 그런 거 말고 샐러드를 먹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제멋대로 샐러드를 주문하는 젝시. 이 인공지능, 정말 괜찮은 걸까? 이 휴대전화를 계속 써도 아무 문제 없을까?
'인공지능의 발전,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의 코믹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다. <그녀(Her, 2013)>의 코미디 버전이랄까?
<그녀>의 사만다보다 좀 더 성격이 더러운 인공지능과 좀 더 저속한 개그, 그리고 욕을 좀 더 많이 섞으면 이것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현대인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못 살 정도로 24시간 휴대전화를 달고 살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줄 거라고 광고하는데 '과연 그럴까?'라고 비웃는 듯한 느낌이다.
이 영화가 뭐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생각해 볼 거리를 준다고는 솔직히 말하기 어렵다.
현대인들이 휴대전화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그리고 휴대전화를 적당히 이용하되 의존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초등학생도 알 테니까.
그렇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당신을 웃게 해 줄 영화를 찾는다면 이것도 썩 괜찮다.
이 영화를 웃기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젝시'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다(로즈 번(Rose Byrne)이 목소리를 연기했다).
젝시는 성격이 정말 글라도스(GLaDOS, 게임 '포탈(Portal)' 시리즈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뺨치게 더럽다.
자기 주인인 필에게 욕하는 것은 기본이고, 필의 인생을 '낫게' 만든답시고 필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지만, 그래도 정말로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음... 영화의 후반부에 일어나는데 이건 굳이 스포일러 하지 않겠다. 근데 약간 저속할 수 있다는 것은 말씀드리겠다. 이런 게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피하시는 게 좋겠다.
아담 드바인은 원래 <워커홀릭스(Workaholics, 2011-2017)> 같은 골 때리는 코미디 작품에서 코미디 연기를 많이 해서 이번에도 코미디를 잘 살렸다.
나는 의외로 멕시코계 갱이나 뭔가 위험한 인물 연기를 자주 하던 마이클 페나가 필의 짜증 나는 상사 '카이'로 코미디 연기를 한 게 신선했다.
론 푼체스도 나는 <언데이터블(Undateables, 2014-2016)>에서 알았는데, 여기에서 봐서 너무 반가웠다.
또한 휴대전화를 파는 가게의 점원으로 분한 완다 사이크스도 재능 있는 코미디언답게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해 웃음을 준다.
영화 러닝 타임이 1시간 24분밖에 안 되어서 그런지 영화 중반에 흐름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인데, 뭐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영화 중후반부에 앞보다 더 웃긴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후반부로 빨리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큰 생각 없이 그저 웃고 싶다면 이 영화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 영화의 웃음은 상황도 상황이지만 젝시의 대사에서 많이 나오는데, 예고편 보니 아주 훌륭하지는 않아도 무난하게 중박 정도는 한 듯.
기계음 특유의 무미건조하고 액센트 없는 억양으로 하는 젝시의 찰진 욕이 웃음을 줄 것이다.
(여담이지만 로즈 번은 젝시 역의 대사를 촬영 후에 따로 녹음했고, 필 역의 아담 드바인은 초소형 이어폰을 끼고 다른 사람이 로즈 번을 대신해 대사를 쳐 주는 걸 들으면서 연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어폰이 자주 고장 나서 아예 그냥 안 끼고, 남들 대사 쳐 주는 것도 안 듣고 그냥 연기한 적도 많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