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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추천] Emma.(엠마, 2020) - 원작에 가까운 에마를 만나다

by Jaime Chung 2020.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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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추천] Emma.(엠마, 2020) - 원작에 가까운 에마를 만나다

 

 

감독: 어텀 드 와일드(Autumn de Wilde)

 

이 영화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원작 소설 첫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아름답고 영리하고 부유한 (...) 에마 우드하우스는 스물한 살이 다 되도록 고민하거나 짜증을 낼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에마(Emma, 안야 테일러 조이 분)는 지금까지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가정 교사 테일러 양이 결혼을 해서 우드하우스 가문의 저택(하트필드)을 떠나자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무료함에 젖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 해리엇 스미스 양(Harriet Smith, 미아 고스 분)에게 적절한 남자를 찾아 이어 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부유하고 잘나가는 아가씨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취미라고나 할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마 본인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달리, 본인이 사람들 보는 눈이 별로 정확하지 않아 일이 틀어지고 만다.

(애초에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잘나서, 에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 씨(Mr. Woodhouse, 빌 나이 분)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웃이기도 한 나이틀리 씨(George Knightley, 자니 플린 분) 말고는 정면으로 '이러이러한 것은 네가 잘못했다'며 지적해 줄 수 있는 상대도 없었다.)

해리엇은 소작농인 마틴 씨(Mr. Martin, 코너 스윈델스 분)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분 역시 해리엇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는데, 에마가 보기에 마틴 씨는 해리엇에게 적절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보다 에마가 보기에는 하이버리의 목사인 엘튼 씨(Mr. Elton, 조쉬 오코너 분)가 해리엇의 남편감으로 더욱 적절해 보였고, 또한 그도 해리엇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해리엇이 마틴 씨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해리엇의 질문에 '결정은 네가 내려야지'라며 절대 대신 결정을 내려 주지는 않는 척하면서, 은근히, 교묘하게 해리엇이 이를 거절하게 만든다.

해리엇을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는 기쁨도 잠시, 나이틀리 씨는 왜 해리엇에게 적절한 혼인처인 마틴 씨를 거절하게 만들었냐, 마틴 씨 정도면 해리엇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신랑감 아니냐 하고 에마를 비난한다.

에마는 나이틀리 씨와 이 일로 싸우고 나서, 엘튼 씨와 해리엇을 이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나 결국 어느 날, 엘튼 씨가 에마를 사모한다고 고백하고 만다.

잠깐, 그렇다면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건가? 자신 때문에 소중한 친구가 괜찮은 남자를 뻥 차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에마는 고민에 빠지는데...

 

해리엇 스미스(왼쪽)와 에마 우드하우스(오른쪽)
내가 미란다를 좋아해서 이 스틸도 넣어 보았다. 왼쪽부터 우드하우스 씨, 베이츠 양(미란다!), 그리고 베이츠 부인(베이츠 양의 어머니).
나중에 반전을 가져오는 주인공, 프랭크 처칠.
빌 나이도 좋아해서 이 스틸도 넣어 봤다. 에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 씨.
안야 테일러 조이는 정말 귀족 아가씨다운 태도를 잘 살려 연기했다. 
나이틀리 씨 역의 자니 플린 분. 나는 조금 더 성숙하게 생긴 신사를 기대했는데...
우리의 금사빠 해리엇ㅋㅋㅋㅋㅋ
에마가 해리엇에게 헛바람을 불어 넣어 좋아하게 만들었던 대상인 엘튼 씨(왼쪽)와 그의 아내 오거스타(오른쪽)

 

너무나 잘 알려진 데다가 이미 출간된 지 200년이나 된 작품이라 굳이 시놉시스가 필요할까 싶지만 일단은 간략하게 적어 보았다. 누가 무슨 역할인지 대략 안내도 할 겸.

하지만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의 경우 결말을 논해도 스포일러로 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여기에도 적용할 예정임을 알려 드린다. 혹시나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하시는 분은 원작 소설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 드린다.

참고로 나는 시공사에서 나온 최초의 제인 오스틴 한국어판 전집 판본에 속한 <에마>를 읽었는데 번역이 좋았다. 일단 '엠마'라고 안 쓴 것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든다(그런데 영화 국내 개봉명은 또 '엠마'다. 이런...).

 

영화를 보기 전, 영화 포스터에서, 그리고 영화에서 에마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에마 역 안야 테일러 조이를 보고 놀랐다.

제임스 맥어보이(James McAvoy)가 나온 <23 아이덴티티(Split, 2016)>나 <글래스(Glass, 2018)>에서 케이시(Casey) 역할로 이미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뭐랄까, 정석적인 미녀 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감독은 이렇게 고전적인 미녀 상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했을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해가 됐다.

눈짓이라든지 몸짓, 자세와 태도 등이 정말 영락없는 귀족 아가씨다. '깍쟁이'나 '새침데기 아가씨'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련되고 우아한 몸짓을 배우며 큰 아가씨 같다는 느낌. 이래서 에마로 캐스팅되었구나 싶었다.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나이틀리 씨는 "서른일곱 내지 서른여덟 살가량의 분별 있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나이틀리 씨의 자니 플린이 딱 그 나이다(83년생).

기가 막히게 캐스팅 잘했네!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읽을 때 받았던 느낌으로 나이틀리 씨는 자니 플린보다 조금 더 성숙한 얼굴을 상상했다.

자니 플린도 연기를 잘했지만 그래도 나이틀리 씨 치고는 젊은 느낌이 난달까? 내 느낌으로는 마틴 씨 역의 배우(코너 스윈델스)가 더 잘생겼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이니까 그냥 그렇다 치자.

참고로 프랭크 처칠(Frank Churchill) 역의 칼럼 터너도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는데,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Fantastic Beasts: The Crimes of Grindelwald, 2018)>에서 테세우스 스캐맨더 역을 했더라. 그래서 반가웠다.

BBC 버전 <셜록(Sherlock, 2010-2017)>에서 레스트레이드 경감 역을 맡았던 루퍼트 그레이브스도 한국인 관객들은 많이 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영드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제일 반가운 얼굴은 역시 영드 <미란다(Miranda, 2009-2015)>의 미란다 하트일 것이다.

미란다가 맡은 역할은 베이츠 양(Miss Bates)인데,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하이버리의 전임 교구 목사였던 베이츠 씨의 미망인"의 "외동딸"이다.

영화에서는 수다스럽고 다소 경망스러워 에마에게 비웃음을 사는데, 원작에는 이렇게 돼 있다.

부인의 딸[베이츠 양]은 젊지도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미혼 여성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이라 할 만큼의 인기를 누렸다. 베이츠 양은 그렇게 만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탓에 더 없이 고약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마음속으로나마 우쭐해하거나,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켜 겉으로나마 존경을 표하게 할 만큼 지적으로 우월한 구석ㄷ은 조금도 없었다. 뽐낼 만한 아름다움이나 영민한도 없었다. 청춘은 별 볼일 없이 흘려보냈고, 중년은 노쇠해져가는 어머니를 보살피고 빠듯한 수입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려 애쓰는 데 바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불가해한 일이 가능했던 건 그녀의 본원적인 선의와 느긋한 기질 덕이었다. 베이츠 양은 모두를 사랑했고, 모두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으며, 모두의 장점을 금세 찾아냈다. 또한 자신이 가장 복 받은 사람이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어머니와 수많은 선량한 이웃들과 친구들, 그리고 아쉬운 데라고는 전혀 없는 집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순박하고 쾌활한 본성, 느긋하고 기분 좋은 기질은 다른 모든 사람에겐 귀감이, 그녀 자신에겐 무한한 행복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는 시시콜콜한 일로도 굉장히 수다를 잘 떨었으므로, 사소한 잡담과 악의 없는 뒷공론이 일상인 우드하우스 씨와는 제대로 죽이 맞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에마나 나이틀리 씨처럼 금수저로 태어나기는 어렵고, 해리엇은 사람은 순박한데 자신의 의견이 없다고 할까, 자신이 존경하는 에마의 말에 너무 잘 휘둘리는 데다가 금사빠여서 부러워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베이츠 양의 넉넉하지 못한 처지는 현실적인 데다가 그런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는 정말 긍정적이고 밝다. 이러니 이 소설에서 베이츠 양을 제일 따라 할 만한, 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보지 않을 수가 있나.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자면, 미란다 하트가 워낙에 코믹한 연기를 잘해서 이 베이츠 양에게도 다소 경망스럽고 가벼운 느낌이 입혀졌는데, 영화 후반에 에마가 말실수를 해서 분위기가 싸해지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서는 베이츠 양도 차마 에마의 말에 상처 입었다는 티를 잘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심각하게 '에마가 잘못했네...'라는 분위기로 흘러 가지는 않는데, 영화에서는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지고 베이츠 양도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자리를 떠서 확실히 에마가 잘못했다는 걸 좀 더 분명히 했다.

나이틀리 씨는 당연히 그 모임이 파하고 난 후에 오늘 왜 그런 말실수를 해서 베이츠 양에게 무례를 범하느냐며 직언을 하고, 그것은 영화에도 잘 표현돼 있다.

여기가 에마가 가진 성격의 단점(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자신만만해 해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장면이라 영화에서 이를 살린 게 아주 잘한 결정 같다.

이때 나이틀리 씨가 에마의 실수를 지적하는 장면도, 나이틀리 씨가 얼마나 에마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때문에(그 말고는 그녀의 실수를 대놓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나는 이 영화에서 그 점을 잘 살린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반적으로 원작을 그대로 옮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원작에 가깝게 잘 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읽는다면, 얼마나 원작에 가깝게 잘 살렸는지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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