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신예희,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제목부터 기가 막힌다.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원제는 '물욕'이었다는데 그만큼 원체 물욕이 많은 저자가 돈지랄을 하면서 느낀 기쁨과 슬픔, 애환을 에세이로 잘 표현했다.
돈지랄, 하고 가만히 불러보면 가슴이 뛴다(아이고 아련해라). 뭘 지를까, 생각만으로 이미 설렌다. 세상엔 수많은 지랄이 있고 그중 최고는 단연 돈지랄이다.
우리나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요즘 같은 상업주의 시대에 '돈이 있으면 삶이 편하다'라는 진리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물건이며 옷이며 이것저것 많이 사 모았다가 버린 사람이기에 저자의 '돈지랄' 경험이 너무나 공감됐다.
예를 들어서, 비싼 거 하나 제대로 사서 쓰는 게 차라리 싸구려 여러 개 사서 조금씩 쓰다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돈도 적게 들고 기분도 좋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돈을 쓰는 것을 사치로 여기고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배우며 자란 K-도터인 저자가 브랜드 립 펜슬을 사는 것도, 쓰는 것도아까워 비슷한 색이라는 저렴이 립 펜슬 사이를 여러 개 실험하다가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브랜드 거 살걸' 하고 후회하는 모습은 제품만 바뀌었다 뿐이지 나랑 똑같지 않은가.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래,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싶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저자가 말하듯 '아끼면 똥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건, 그런 공감대도 공감대지만, 그냥 이 책이 너무 웃기기 때문이다.
곤도 마리에 뺨치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해도, 그래서 이런 '돈지랄'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저자의 말솜씨에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도 이 책을 읽는데 너무 웃겨서 계속 책의 일부를 발췌해서 친구에게 보여 줬다. 이렇게 웃기니까 너도 한번 읽어 보라고.
그중 제일 웃겼던 부분을 두어 군데만 보여 드리겠다.
아래는 저자가 1+1으로 산 싸구려 화장실 휴지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휴지든 휴지걸이에 끼워서 돌돌 돌려가며 쓰다 보면 조금씩 가루가 날리기 마련인데, 그전에 쓰던 게 초코케이크 위에 솔솔 뿌린 슈가파우더 수준이었다면 이 휴지는 고비사막 생성기다. 그리고 얇고 거칠어 자꾸 뚫.린.다. 그러니까, 항문을 좀 꼼꼼히 닦으려고 할 때마다 손가락이 휴지를 쑥 뚫고 나가 버리는 일이 자꾸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바라보는 눈).
그 1+1을 다 쓸 때까지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불행했고 우울했다. 야,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이따위 물건을 써야겠니, 나를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니니, 라는 생각이 매순간 들었다. 그깟 두루마리 휴지가 뭐라고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리고 저자가 처음으로 경차를 사서 본격적으로 운전 연수를 받아(그전까지는 장롱 면허였단다) 도로에 제대로 나가기 시작했을 때 이야기.
내 레이에는 애칭이 있다. '죄송이'다. 온 사방에 너무 죄송해서 그렇게 지었다. 미천한 제가, 물색없는 제가 감히 도로에 차를 끌고 나와 혼란을 초래하여 너무 죄송합니다아! 100미터 밖에서 울린 클랙슨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냥 마냥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초보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처음 8개월간은 에어컨, 히터, 와이퍼를 켜지도 못했다고. 여기에서 너무 웃겨서 정말 쓰러질 뻔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저자는 청소는 귀찮아하지만 청소도구는 수집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꼭지에서 발췌.
이럴 땐 우렁이가 한 손에 진공청소기를, 다른 손에 2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들고 뿅 나타나면 좋겠다.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우렁아! 우렁각시 설화는 있어도 우렁신랑 설화는 없다는 게 참으로 원통하고 빈정 상한다.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그치만 뭐, 우렁신랑 따위 있어 봤자 키울 곳도 마땅치 않고(가습기 물통에 넣어 둬야 할까?), 청소한답시고 끈적이는 점액질을 온 집 안에 잔뜩 묻히고 다니겠지. 그냥 잘게 썰어서 우렁된장이나 끓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우렁신랑 의문의 된장찌개행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신나게 읽었는데 짧아서(종이책 기준 180쪽) 아쉽다.
다만 위로가 되는 건, 이게 '먼슬리에세이'라 이렇게 재밌는 에세이를 한 달에 한 권씩 만나 볼 수 있다는 것.
시즌 1은 '욕망'이라는 주제로 신예희(물욕), 이주윤(출세욕), 권용득(음주욕), 이유미(공간욕), 손기은(식욕) 작가가 글을 쓰고, 시즌 2는 '일'이라는 주제로 황효진(멀티태스킹), 김민성(마이너리티), 황유미(네트워킹), 이묵돌(모티베이션), 석윤이(아이덴티티)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예정이란다.
흠, 시즌 2는 잘 모르겠지만 시즌 1은 일단 주제부터가 너무 마음에 든다. 먼슬리에세이 시리즈의 첫 번째인 이 책을 읽었으니 기다려서 다음 것들도 다 한 번씩 읽어 봐야지!
돈지랄을 하고 싶지만 적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또는 돈지랄을 하고 싶지만 아직 자금이 받쳐 주지 않을 때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면 어떨까.
우선순위의 가장 맨 위엔 언제나 내가 있다. 무엇도 내 위에 있지 않다. 누가 뭐래도 그건 지킨다. 음식을 만들어 제일 맛있는 부위를 나에게 준다. 내 그릇엔 갓 지은 새 밥을 담는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좋은 걸 몰아주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 영 손이 가지 않을 땐 아깝다는 생각을 접고 음식물쓰레기로 처리한다. 난 이거면 된다며 복숭아 갈비뼈를 앞니로 닥닥 긁어 먹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내 몸뚱이와 내 멘탈의 쾌적함이 가장 중요하다. 그걸 지키기 위해 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도 내일도 좋은 것을 욕심내며, 기쁘게 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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