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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On Chesil Beach(체실 비치에서, 2017) - 섹스 없는 사랑, 가능할까?

by Jaime Chung 2018.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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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On Chesil Beach(체실 비치에서, 2017) - 섹스 없는 사랑, 가능할까?

 

 

감독: 도미닉 쿡(Dominic Cooke)

 

에드워드 메이휴(Edward Mayhew, 빌리 하울 분)와 플로렌스 폰팅(Florence Ponting, 시얼샤 로넌 분)은 오늘 막 결혼한 신혼부부이다.

그들은 체실 비치(Checil Beach)를 걷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한다. 

사실 그들은 '첫날밤' 때문에 긴장되어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맛도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태이다.

긴장을 풀기 위해 그들은 연애 시절 이야기, 둘이 처음 만난 이야기 등을 주고받는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낸 후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부부로서 첫 의무'를 끝내는 것뿐.

플로렌스는 떨리는 마음에 천천히 신발을 벗지만 마음이 급한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의 원피스 등 지퍼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에드워드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서 짜증을 내고, 플로렌스를 그를 토닥여 주며 사실 자신은 지금 섹스가 두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연애 시절 참았던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그녀의 두려움을 미처 돌보지 못하고...

 

이언 매큐언(Ian McEwan)이 쓴 동명의 중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 예고편을 봤을 때부터 원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영화관에 걸리기 며칠 전에 부랴부랴 eBook으로 다운 받아 읽었다.

그래서 원작 내용을 알고서 영화를 봤는데, 그게 이 영화 감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작과 영화의 이야기 흐름은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분위기는 퍽 다르다. 나는 이 점에 무척 놀랐다.

아니, 원작 소설 작가가 직접 각본을 썼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나는 이런 차이점을 중점으로 리뷰를 쓰려고 한다(사실 원작 소설 리뷰를 먼저 쓰고 영화 리뷰를 후에 쓸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는 것 같다).

원작에 관심이 없거나 영화 본 후에 읽겠다는 분은 스크롤을 내려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원작 소설 겉표지 다음에 나오는 내용만 읽으시면 된다.

본문은 영화 스틸 컷 이후부터 시작할 테니 스크롤을 끝까지 내릴지 아니면 천천히 내려 원작 소설과 영화 비교 내용을 읽을지 결정하시라.

 

침대에 앉아 있는 플로렌스.

 

바이올린 연습 중인 플로렌스. 소설에도 '바이올린 연습을 할 때 머리띠를 하는 그녀는 귀여웠다'라는 묘사가 있다.

 

책을 읽는 에드워드. 참고로 에드워드는 역사학 전공자라는 설정.

 

소설과 영화가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은 전체적인 톤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처음부터 긴장되고 진지한 분위기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작 소설 첫 문장은 이렇다.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They were young, educated, and both virgins on this, their wedding night, and they lived in a time when conversation about sexual difficulties was plainly impossible. But it is never easy.")

이 첫 문장부터 둘이 처녀성/동정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당시(1960년대)는 요즘만큼 자유롭게 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는 사실(즉, 갈등의 원인)이 제시되며 이 점이 소설의 전체적 분위기를 정한다. 

또한 플로렌스가 성(性)에 대해 걱정하고, 긴장하고, 두려워한다는 점이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영화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영국 시골의 모습을 보여 주며 시작한다.

나는 소설 덕분에 '이 영화는 진지하고 심각한 영화'라고 선입견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가볍게 시작을 하니 일단 여기서부터 놀랐다.

영화는 그 유쾌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음식을 나르는데 와인 병이 떨어져 와인이 조금 흐르자 웨이터들이 당황하며 물로 채워 넣는다든가 식사하는데 옆에 웨이터가 서 있는 데 불편함을 느낀 에드워드가 "계속 거기 서 계실 거냐" 묻는 장면 같은 것들로.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내가 제일 큰 차이라고 생각했던 건, 소설에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되는 것(둘의 연애 시절, 둘이 처음 만난 날,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가족 등)을 영화에서는 둘의 대화(그리고 회상 장면)로 풀어낸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두 인물의 배경, 과거를 이야기해 주는 건 두 사람이 직접 '나는 이러이러했어' 하고 서로에게 말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이야기 내용은 똑같다 해도 독자는 등장 인물이 아닌, 제3자의 입으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등장인물들에게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 대화체로 다 말해 주고 우리는 회상 장면으로 그 이야기를 다 보게 되니, 이 심리적 거리감이 거의 없다.

플로렌스는 심지어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싸웠던 게 언제야?" 하고 에드워드에게 묻는다.

소설에서 에드워드가 가장 마지막으로 싸웠던 일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되고, 이때 에드워드는 자신이 그렇게 쉽게 주먹을 썼다는 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표현돼 있다.

그리고 그는 그걸 플로렌스가 알았다면 자길 좋게 보지 않았을 거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데, 영화에서는 이걸 그냥 아예 대놓고 묻고 또 대놓고 대답한다. 

이게 작품의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면, '둘이 서로서로 이런저런 부끄러운 얘기를 다 할 거면 도대체 섹스 얘기는 왜 못 하는데?'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재임 기간을 가리키는 말. '집 안의 천사'인 정숙한 여성(아내)과 겉으로는 이런 여성을 위해 주며 뒤로는 매음굴에서 욕망을 해소하는 남성(남편) 등 위선적인 도덕과 예절이 특징인 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1960년대가 아직 성에 대해 요즘만큼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점을 처음부터 확실히 알려 주고 들어갔다.

따라서 플로렌스가 사실 섹스를 원치 않지만 단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견뎌' 내려고 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납득이 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플로렌스가 에드워드와 침대에 누워서 "자기는 여자 몇 명이나 사귀어 봤어? 그거(섹스)는 몇 명이랑 해 봤어? 그 여자들 이름들은 뭐야?" 하고 묻기까지 한다(물론 에드워드는 어물어물하다가 자기는 동정이라고 고백한다).

까딱 잘못했다간 '플로렌스가 에드워드에게 집착해서, 질투해서 이런 걸 물어보는 건가?' 하고 오해하기 좋다. 플로렌스는 그저 섹스를 두려워할 뿐인데 말이다.

 

게다가, 플로렌스가 섹스를 꺼려하는, 거의 '무성애자(asexual)'에 가까울 정도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다르게 그려진다.

소설에서는 시대 분위기가 자유롭지 못해서, 플로렌스가 이전에 섹스를 해 본 적도 없어서, 원체 플로렌스가 그쪽에 관심이 없어서(첫날밤에 대한 지식도 플로렌스는 '안내서'를 사서 혼자 읽어 보고서야 알게 될 정도이다), 등 여러 가지 이유를 간접적으로(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준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영 엉뚱하게, 플로렌스가 어린 시절에 성추행을 다해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을 읽은 나로서는 이게 제일 얼척이 없었다.

어린 플로렌스가 배를 타고 나가서 밧줄을 감는데 아버지에게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냐!" 하고 호통을 듣는다든가, 어린 플로렌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 뒤로 램프를 끄는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든가 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아, 얘가 어릴 적에 안 좋은 기억이 있나 보다' 하고 추측하게 만들지 않나.

도대체 원작 소설을 쓴 작가가 자기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각본을 쓰는데 왜 이런 걸 넣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소설에 플로렌스가 아버지랑 몇 마디 별로 안 한다는 언급이 있고, 전반적으로 아버지랑 친근하고 가까운 사이는 아니구나 싶은 분위기이긴 하다.

그렇지만 성적 학대에 대한 암시는 전혀, 1g도 없었다.

저자가 소설에서는 플로렌스가 섹스를 왜 꺼리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느낀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영화는 소설과 결말도 살짝 다르다. 소설에서는 둘의 이해 차이를 좁히지 못해 둘이 헤어진 후, '에필로그' 격으로 그 후에 에드워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이때 플로렌스는 이러이러하게 살았지만 에드워드는 그것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즉, 이때 헤어진 후 둘은 단 한 번도 (잠깐이라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의 소식도 듣지 못한다. 그게 끝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렇게 나가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주인공이 다시 등장을 안 하게 되니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둘을 잠시 만나게 한다.

시간이 흘러(어느 시점에서는 T.Rex의 "20th Century Boy"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이렇게 경쾌할 수가! 나는 이 경쾌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데 플로렌스의 딸로 추측되는(모든 정황상 그녀의 딸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소녀를 만난다. 이때 잠시 감동의 눈물.

그로부터 세월이 좀 더 지나 더 늙은 에드워드는 홀아비로 살며 부실한 식사를 하다가 라디오에서 플로렌스가 속한 쿼르텟이 위그모어 홀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홀은 둘이 연애할 시절에 "네가 나중에 여기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 나는 이곳(C열 9번 좌석)에 앉아서 네 음악을 감상하고 네게 박수를 보낼 거야" 뭐 그런 얘기를 나눈 추억이 있는 곳이다(여기에서 이미 감 잡으셨겠지).

그다음은? 우아하게 늙은 플로렌스가 공연을 마치고 인사를 하다가 정말 그곳에 앉아 있는(아니, 이제는 일어서서 박수 치는) 에드워드를 발견한다.

세상에... 나는 여기에서 감독과 작가개 진짜 멜로드라마를 만들려고 애를 썼구나 생각했다.

둘이 여기에서 눈물의 재회를 하면, 작품의 전반적 메세지, 그러니까 사랑이 유지되려면 섹스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섹스보다는 두 사람의 사랑과 이해이다, 뭐 그런 주제가 약해지는 것 아닌가?

에드워드는 그걸 몰랐기에 불같이 화를 내고 그 망한 첫날밤 이후 그녀를 떠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섹스 없이도,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그 욕망을 만족시키며 부부의 연을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헤어진 것이다.

그 둘은 절대 다시 만나지 못했고, 나이 든 후에야 에드워드는 '아, 내가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지만 않았어도... 살다 보니 섹스가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던데. 그거 없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다.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다시 만나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려 버리면 이 주제는 바로 증발해 버리고 만다.

나는 원작 소설에서 꽤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나는 여태껏 이렇게 '무성애자'나 적어도 그거랑 비슷해 보이는 여성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면적으로 그린 소설은 본 적이 없다) 영화도 이것과 비슷하게 진행되리라고, 아니 그래 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이다.

 

원작 소설 겉표지.

 

(이제 내용 누설은 끝났으니 원작을 먼저 읽을 생각이 없는 분들도 여기서부터 맘 편히 읽으시라!)

요약하자면, 영화는 원작 소설과 포인트가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만약 여러분이 영화를 영화로 즐기고 싶다면, 일단 영화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소설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초두 효과(primary effect)' 때문에 무엇을 먼저 받아들이냐에 따라 평가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소설을 먼저 읽으면 영화의 분위기가 새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플로렌스 역의 시얼샤 로넌은 2014년부터 이언 매큐언 작가의 '원 픽'이었다고 한다.

시얼샤 본인도 플로렌스 역을 꼭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이 역을 맡기에는 나이가 조금 어리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있어서 캐리 멀리건(Carey Mulligan)에게 역이 넘어갔다(이때는 샘 멘데스(Sam Mendes)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시얼샤 로넌에게 다시 플로렌스 역이 돌아왔다.

아마 이언 매큐언 작가와 시얼샤는 인연이 있는 듯한데, 시얼샤는 <어톤먼트(Atonement, 2007)>에도 출연한 적 있다(13세의 '브라이오니' 역으로).

 

참고로 체실 비치는 영국 도르셋(Dorset)에 위치한 실제 지명이다. 영화도 이곳에서 대부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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