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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Persuasion(2022, 설득) - 원작의 앤 엘리엇은 어디로? 망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by Jaime Chung 2022.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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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Persuasion(2022, 설득) - 원작의 앤 엘리엇은 어디로? 망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감독: 캐리 크랙넬(Carrie Cracknell)

 

앤 엘리엇(Anne Elliot, 다코타 존슨 분)은 8년 전, 웬트워스(Wentworth, 코스모 자비스 분)라는 남자와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당시 웬트워스는 돈도 별로 없는, 별 볼 일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허영심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아버지 월터 엘리엇 경(Walter Elliot, 리차드 E. 그랜트 분)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돌아가신 앤의 어머니를 대신에 앤을 아끼고 돌봐 주는 레이디 러셀(Lady Russell, 닉키 아무카 버드 분)도 그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들에게 '설득'되어 웬트워스와 헤어진 앤이지만 아직 그를 완전히 잊지 못하고, 예쁘고 여러 면에서 아버지를 똑 닮은 첫째 (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Elliot, 욜란다 케틀 분)와 자기밖에 모르고 앓는 소리가 심한 막내 (동생) 메리(Mary Elliot, 미아 맥켄너-브루스 분)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지며 존재감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앤이 아직도 그리워하는 앤트워스가 영국 해군의 '대령'으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리고, 앤네 가족이 이사 간 곳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는데...

 

조카들과 같이 놀아 주며 숲 속을 달리는 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좀 더 자세히 쓰겠다)
대령이 되어 나타난 웬트워스
왼쪽 검은 옷이 앤, 그 옆의 두 흑인 여성은 메리의 시누이들, 그리고 맨 오른쪽이 메리 (앤 옷이 검정색인 것도 의상 문제다. 현대화하고 시크하게 하는 건 좋지만 검은색이라니? 상 중이란 말인가? 당시 여성들의 의상은 파스텔, 밝은 톤이 대다수였다)
맨 왼쪽부터, 클레이 부인(Clay, 리디아 로즈 뷰리 분), 엘리엇 경, 앤, 그리고 맨 오른쪽이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

 

다들 알다시피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정말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 영화만큼 구리고 '망한' 버전도 없을 거다.

 

이 영화는 나름대로 <설득>을 현대화해 보겠다고 야심차게 시도했으나 그 야심이 무색할 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좋게 에둘러 말해 주는 셈이다.

클래식을 현대화해 보겠다는 시도는 무슨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되어 버렸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대한 모욕에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속편들은 무시하고)은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인데, 이건 진짜 그 수준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의 후기도 여럿 참고해 봤는데, 의상이나 고증 같은 전문가적인 면은 따지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주인공 '앤 엘리엇'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설득>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앤은 8년 전에 헤어진 웬트워스가 이제는 대령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물론 설렘과 두려움, 걱정 등 복잡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걸 대놓고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다.

레이디 러셀에게 설득되어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에도 그 슬픔을 혼자 삭였지, 레이디 러셀이나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나 결혼하지 말라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따지지 않았다.

앤의 내면에는 분명히 슬픔과 후회가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혼자 슬퍼하는 데에서 우리 독자들은 그녀와 공감하고 그녀에에 이입하며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앤은 처음부터 대놓고 자기가 8년 전 헤어진 남자를 못 잊고 있다고, 제4의 벽을 뚫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백하며,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는 순간에도 빈정대는 말을 하거나 눈을 굴림으로써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 한다.

이건 뭐, 감독 본인이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꾹 삼키며 겉으로는 미소를 지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해야 한다면 관객이 그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다.

애초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앤 엘리엇'이라는 캐릭터를 좀 더 현대식으로 업데이트하고 싶었고, 그래서 앤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 현대 슬랭까지 구사하게 만들었지만, 결론적으로 앤 엘리엇의 캐릭터성은 사라졌다. 그냥 그런 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I never trust a ten(나는 외모가 10점 만점 중 10점인 사람은 안 믿는다).'이라니. 언제부터 앤이 이렇게 속물적인 인간이었지?

대체 언제부터 앤 엘리엇이 옛 애인을 향한 그리움을 '베토벤을 들으며'(이 시대에 무슨 라디오나 CD가 있다고 자기 방에서 혼자 베토벤을 들어? 정말 얼탱이가 없다) '레드 와인을' 마시며 달랜단 말인가?

위에 첨부한 스틸 컷 중에 앤이 조카들과 숲 속을 뛰며 같이 놀아 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소설 속 앤과 딴판이다. 소설 속 앤도 조카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같이 숲에서 놀거나 하는 식으로 '아웃도어'한 사람은 아니다. 조용한 내향형 앤을 완전히 인싸로 바꾸어 놨네.

조카들이랑 놀아 준다고 잼을 인중에다가 콧수염처럼 바르는 장면은 또 어떻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거랑 식사 예절을 모르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그리고 내가 제일 얼탱이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던 장면은 이거다. 앤이 메리네(메리는 자기 두 언니들보다 먼저 결혼했다)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웬트워스 대령도 있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앤은 의자를 끼이익 소리가 나게 시끄럽게 끌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게다가 밑도 끝도 없이 "찰스(Charles Musgrove, 벤 베일리 스미스 분; 메리의 남편, 그러니까 앤 입장에서는 제부)는 메리랑 결혼하기 전에 원래는 나랑 결혼하려고 했어요."라는 말을 꺼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든다.

????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설득>을 안 읽어도 상식적으로 귀족 아가씨가 의자를 시끄럽게 끄는 소리를 낸다는 게 말이나 되나? 식사 예절은 안 배웠단 말인가? 게다가 '제부는 원래 나랑 결혼하려고 했어요'라니, 이건 뭐 유치한 질투 유발 게임이야, 뭐야? 앤 엘리엇이 10대 소녀냐? (물론 앤은 20대 후반, 그 당시 기준으로 '노처녀'다).

제인 오스틴 소설을 망쳐도 유분수지 정말 이건 너무 얼탱이가 없어서 <설득>을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이건 너무 아니다 싶어서 제인 오스틴이 무덤에서 돌아눕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코타 존슨이라는 배우를 내가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 영화에서 다코타 존슨을 앤으로 캐스팅한 것도 실수 같다.

앤은 분명 소설 속에서 미모로는 언니 엘리자베스보다 못하, 젊을 적엔 예뻤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 미모는 시든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다코타 존슨은 대놓고 예쁜 편 아니냐고!

아무래도 미디어 산업에서 어떤 역이든 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으로 캐스팅하는 게 흔한 일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예쁜 배우를 앤으로 캐스팅하는 건 그냥 '앤 엘리엇'이란 캐릭터를 잘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 배우의 티켓 파워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인 거 같다.

애초에 앤 엘리엇을 잘 살리고 싶었으면 각본을 그따위로 썼을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각본이 이따위인데 다코타 존슨 아니라 다코타 존슨 할아버지가 와도 '눈 굴리기'와 '빈정대는 말'을 넘어설 수가 없을 것이다.

 

레이디 러셀 역의 닉키 아무카 버드. 레이디 러셀은 죽은 앤의 어머니의 절친이자 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다.
엘리엇 씨 역의 헨리 골딩

 

이 영화의 '특이한' 점, 또는 약간 논란이 되는 점이라면 인종적으로 다양한 캐스팅을 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레이디 러셀도 흑인, 위에서 언급한 앤의 제부, 찰스도 흑인이고, 메리의 시누이들(찰스의 누이들)도 따라서 흑인이다. 

나름대로 중요한 인물인 엘리엇 씨(Mr Elliot, 헨리 골딩 분)는 동양인 배우, 헨리 골딩이 맡았다.

나는 이 인종적으로 다양한 캐스팅에 별 불만은 없다. 소설 자체가 역사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 그 시대에 흑인이나 동양인이 영국에 단 한 명도 없었을 리가 없으니까. 상상력을 펼쳐서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한 것 자체는 좋은 시도라고 본다.

애초에 이 영화는 다양한 인종 캐스팅은 문제 측에도 낄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이건 진짜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앤 엘리엇부터 살려내, 나쁜 놈들아! 😭 캐릭터를 망쳐도 엔간히 해야지!

 

내가 본 어떤 비디오 에세이에서는 유튜버 본인이 조용하고 수줍음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앤에 공감할 수 있어서 앤이 최애 캐릭터였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앤처럼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생각이 깊은, 그리고 다소 수동적인 인물을 영화/드라마처럼 시각적인 매체에서는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걸 나도 안다. 

그 인물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고가는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으니까. 독백을 하든, 다른 인물들과 대화를 하든 어떻게든 그걸 대사로 풀어내야 한다. 

하지만 내성적인 인물은 시각적 미디어에서는 도저히 설 자리가 없단 말인가? 내성적인 인물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인물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매력적으로 잘 그려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작가의 능력이 그 정도인 거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내 손가락만 아플 거 같다. 이미 망한 영화를 무슨 수로 살려내리오...

제일 좋아하는 제인 오스틴 원작 소설 영화/드라마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 다를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원작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책을 읽기 귀찮아서 영화/드라마로 접하려고 해도 이 버전만은 꼭 피하시길. 원작을 망쳐도 이렇게 완전 주인공의 성격을 바꿔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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