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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Last Word(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2017) - 독불장군 여사님, 죽은 후에 어떤 말을 듣고 싶으세요?

by Jaime Chung 2018.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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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Last Word(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2017) - 독불장군 여사님, 죽은 후에 어떤 말을 듣고 싶으세요?

 

 

감독: 마크 펠링톤(Mark Pellington)

 

해리엇(Harriet, 셜리 맥클레인 분)은 은퇴한 비즈니스우먼으로, 모든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쟁이이다.

정원사가 덤불을 다듬는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정원용 가위를 빼앗아 자기가 하고, 미용사 대신 자신이 직접 자기 머리를 자르며,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에게 비키라고 하고 자기가 요리를 해 먹는 정도니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돈을 주고 고용인을 쓰는지조차 이해가 안 될 정도.

어느 날, 그녀는 혼자 저녁을 먹고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에 수면제 네 알을 레드 와인과 꿀꺽 삼킨다.

다음 날, 119에 실려서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 의사에게는 '그냥 사고'였다고 말했지만 그건 분명한 자살 시도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똑같이 수면제를 먹으려던 그녀(이번에는 더 많이 먹으려고 했다), 실수로 와인잔을 넘어뜨려 식탁에 와인을 흘린다.

마침 곁에 있던 신문지로 와인을 닦다가 신문의 부고란을 보게 된 그녀. 다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고 평화롭게 삶을 마감했다, 남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음 날 자신이 큰 광고주였던 그 지역 신문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부고란 작가에게 자기를 위한 부고를 쓰라고 명령한다.

젊은 부고란 작가 앤(Anne, 아만다 사이프리드 분)은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지 않으면 신문사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상사의 애원에 어쩔 수 없이 부고를 쓰기 위해 그녀 주위 사람들을 만나 본다.

그렇지만 해리엇의 성격이 어찌나 고약한지, 다들 좋은 말은 단 한마디도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심지어 신부님조차 해리엇에 대해 악담을 할 정도).

결국 눈 딱 감고 해리엇에게 직구로 '이런 삶으로는 제대로 된 부고를 쓸 수 없다'라고 말해 버린 앤.

해리엇은 고민하다가 신문 더미를 들고 앤의 집으로 쳐들어온다. 그녀의 말인즉슨 '이런 인생으로 안 된다면 지금이라도 인생을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

죽고 난 후에 듣기 좋은 부고를 위해 인생을 개조하려는 해리엇과 그녀를 도와 빨리 이 일을 해치워 버리고 싶은 앤. 둘은 과연 이 프로젝트에 성공할 수 있을까?

 

셋이 차를 타고 가다가 쉬었던 모텔을 떠나기 전 셀카 한 컷.

왼쪽 위부터 앤, 그 옆에 가방을 든 여사님이 해리엇, 아래에 핸드폰을 보며 웃고 있는 아이가 브렌다.

 

옛날 음악을 좋아하고 LP판들을 잔뜩 모아 왔던 해리엇은 DJ에 도전하기도 한다!

 

거사를 치르러 가는 세 여자의 당당한 걸음걸이.

 

최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꽤 여럿 보아 온 내게는 오랜만에 신선하게도 원작이 따로 없는 오리지널 창작 영화였다.

오스카(Oscar)상 수상자이기도 한 셜리 맥클레인이 고집불통 여사님, 딱히 소개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그 여사님의 비위를 맞춰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써 줘야 하는 부고란 작가 역을 맡았다.

해리엇이 부고란에 쓰면 멋지게 들릴 거라 생각해 '방황하는 아이'를 도와주기로 하고 동네 지역 센터를 찾아가 만난 '브렌다(Brenda, 앤쥴 리 딕슨)'도 어찌나 귀여운지.

애가 입도 거칠고 생기가 넘치는 데다가 해리엇이랑 앤을 참 잘 따라서 관객도 흐뭇해진다. 애가 연기도 곧잘 하더라.

 

청소년-성인-중장년 나잇대를 전부 아우르는 세 주연이 전부 여성인 점에서 이미 느낌이 왔겠지만, 이 영화는 아주 여성주의적이다.

단순히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다!' 하는 내용의 연설을 길게 늘어놓지 않고서도 그냥 해리엇과 앤, 브렌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준다.

글쓰기의 대원칙, '보여 줘라, 말하지 말고.'처럼 말이다.

해리엇은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여자가 조금이라도 교육받고 개인 사업을 했다가는 결혼도 못 하던 시절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광고 에이전시를 차린, 배짱 있는 여인이기도 하다.

모든 일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통제광(control freak)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 부고를 근사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인생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그 통제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한 좋은 예이다.

게다가 보통 사람들은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입 밖으로 잘 꺼내지 못하는 말도 거침없이 내뱉는 건,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 배워야 하는 장점 아닌가.

 

해리엇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브렌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거고, 브렌다는 해리엇의 조언과 교육을 흡수하지 못해 시들시들하게 지내다가 정말 비행 청소년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작가'가 되고 싶어서 몰래 자기 다이어리에 글을 써 두었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보여 주지 못했던 앤을 나름대로 '멱살 잡고'(진짜로 옷깃을 부여잡았다는 게 아니라 비유적으로 그랬다는 말이다) 충고해 준 것도 해리엇이다.

'이런 소녀의 환타지 같은 글 말고 진짜 다 큰 여성으로서의 현실이 담긴 글을 써라'라고.

 

사실 이 리뷰 글을 읽거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하는 이 영화 소개를 한 10분만 봐도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딱 그려지지 않는가.

결말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내용 그대로이다(너무 뻔해서 굳이 여기에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거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가 끝나기를 바라시는지? 모범적이교 교훈적으로 보일지언정, 우리는 우리 인생도 그렇게 무난하고 행복하게 진행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앤(아만다 사이프리드)-브렌다(앤쥴 리 딕슨) 이 세 여자가 온전히 자신들끼리 뭉쳐서 갈등을 빚고, 또 그걸 해결해 나가면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가 꽃향기처럼 은은하게 감동적이다.

앤의 연애 상대도 나오긴 하는데, 그건 그냥 곁다리 정도이고 그에게 큰 방점이 찍히지는 않는다. 끝까지 그는 좋은 애인, 참한 청년으로만 나온다.

다른 남자 캐릭터는 해리엇이 세운 회사에 다니는 직원으로, 그녀를 존경하고 두려워한다.

다른 한 남자는 해리엇의 전남편. 해리엇이 자기랑 사이가 소원했던 딸을 만나고 또 자신도 나름대로 바뀐 후에 전남편을 찾아가 만나는데 '나는 당신과 결혼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할 때 조금 찡했다ㅜㅜ 그 시대에 일과 사랑 둘 다 쟁취했던 멋진 해리엇 여사님...

(뻘하게 든 생각인데, 남자들은 자신의 성(性)이 이렇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한 영화를 보면 우리 여자들의 활약이 미미한 영화를 볼 때처럼 지루하다고, 자신이 저평가받는다고 느낄까? 어디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실 남성분 없으신가요?)

이건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1985년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영화 속 성평등의 정도를 측량하기 위해 고안한 테스트. 기준은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해 2. 남자가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 3. 대화를 나눌 것'이다)를 통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씹어 먹는 영화이다.

전반적으로 아주 무난하고, 가볍고, 기분 좋은 영화, 대담하고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원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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