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American Animals(아메리칸 애니멀스, 2018) -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를 영화로 만들면 바로 이 영화!
감독: 바트 레이튼(Bart Layton)
스펜서 라인하드(Spencer Reinhard)는 켄터키(Kentucky) 주의 트랜실바니아 대학교(Transylvania University) 신입생으로, 신입생들을 위한 도서관 견학 시간에서 그곳에 진열된 존 제임스 오두본(John James Audubon)의 '미국의 새들(Birds of America)' 그림을 보게 된다.
이는 아주 진귀한 그림집으로, 이 작품을 보고 싶으면 반드시 도서관 사서와 약속을 잡고, 방문 기록을 남겨야 하는 데다가 그것도 방문 시간 내내 사서의 감시 하에서만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값진 작품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스펜서는 이 작품을 보고 반해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절친 워렌 리프카(Warren Lipka)에게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워렌은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면 훔치자고 한다. 아티스트로서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잠시 고민하던 스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둘은 절도를 계획한다.
워렌은 만약에 이 귀한 그림집을 훔치면 바로 팔 수 있도록, 물어물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장물아비'를 만나고 온다.
그러고 와서 절도 계획을 점점 더 구체화해 나가는데, 생각해 보니 둘로는 부족할 거 같아 '인재'를 영입하기 시작한다.
워렌의 친구 중 한 명인 에릭 보르석(Eric Borsuk)은 영입되자마자 그 둘이 생각조차 못했던 점을 지적해 준다.
밤에 사서들이 다 퇴근하고 난 후에 도서관을 털려고 하면 경보기가 엄청 울려 댈 것이니 더 골치 아플 거라고, 낮 시간에 털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도망용 차(getaway car)와 이를 운전할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데 동의한다.
채즈 앨런(Chas Allen)은 어릴 적부터 '기업가(entrepreneur)' 정신이 비범했던, (역시나) 워렌의 친구이다.
열혈 피트니스광이기도 한 채즈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도망갈 수 있도록 신호등 타이밍까지 맞춰 가며 탈출 루트를 연습한다.
대망의 그날, 할아버지로 분장한 네 사람은 채즈의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지금까지 평범하게, 별 불만 없이 살아 왔던 교외(suburb)를 떠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본 듯한 스펜서는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이는데...
도서관 모형을 만들어 놓고 계획을 설명하는 워렌(오른쪽 파란색 셔츠)과 그걸 듣는 스펜서(왼쪽 녹색 스웨터)
역시나 범죄 계획을 브리핑 중인 워렌
노인 분장을 하고 도서관을 털러 가는 네 명
2004년 켄터키 주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이런 자막이 뜬다. "This is not based on a true story(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단어 몇 개가 명멸하고 같은 자막은 이제 이렇게 읽힌다. "This is a true story(이 영화는 실화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2004년의 실화를 적당한 배우들을 고용해 '영화'처럼 스크린에 옮기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실화의 주인공들이 인터뷰의 대상이 되어 이 실화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신선한 매력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스펜서가 오두본의 작품을 보는 장면은 스펜서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한다(참고로 스펜서 역은 베리 케오간 분, 워렌 역은 에반 피터스 분, 에릭은 자레드 아브라함슨 분, 채즈는 블레이크 제너 분).
그리고 그다음에 실제 워렌의 인터뷰 장면이 끼어든다. "파티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이 작품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 같아요."
배우 스펜서와 배우 워렌이 파티에서 오두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잠시 후 실제 스펜서의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제 기억으로는 차 안에서 이야기했던 거 같은데..."
장면은 두 배우가 차 안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실제 워렌이 말한다. "걔가 차에서 얘기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그런 거죠, 뭐."
이런 식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하되 실제 장본인들의 입이 맞지 않는 부분도 그냥 그렇게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런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스펜서와 워렌이 장물아비와 접선하러 뉴욕까지 갔을 때의 일이다.
스펜서는 그 몰래 접선한 장물아비가 긴 머리를 꽁지처럼 하나로 묶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반면에 워렌은 말쑥한 차림의 노신사였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꽁지 머리를 하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던 '그 장물아비'를 보여 주던 장면은 잠시 앞으로 되돌아가 워렌이 말쑥한 차림의 노신사와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식으로 살짝살짝 달라지는 장면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소소하게 재미있다.
사실 스펜서와 워렌, 에릭, 채즈는 그 전까지 범죄 기록도 없었고, 아주 평범하고 유복하게 자란 '도련님들'이었다.
다들 샌님 타입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넷 다 무슨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절도를 최후의 발악으로 여긴' 케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이 귀한 그림을 훔쳐 팔아 돈을 벌 생각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화처럼 짜릿한' 삶을 사는 데 더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현실이 영화인 줄 알았던 거다.
'하이스트(heist, 강도)' 장르의 영화들(<Ocean's 11(오션스 일레븐, 2002)>,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6)> 같은)을 보는 걸로 '절도 공부'를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스펜서는 도서관의 청사진을 직접 그리기까지 했다(이게 바로 진짜 '재능 낭비'다).
워렌은 도서관의 사서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다가 테이저(Taser, 전기 충격기)를 구한다.
결국 실전에서는 그것조차 제대로 못 쓰고 불쌍한 사서 아주머니를 케이블로 꽁꽁 묶었지만.
오두본의 '미국의 새들' 중 한 작품
오두본의 실제 작품을 감상 중인 감독(왼쪽 파란 양복)과 캐스트들(오른쪽)
참고로 존 제임스 오두본의 <미국의 동물들(American Animals)>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4권으로 된 그림 모음집이다.
한 권마다 100점의 그림이 수록돼 있는데, 각 한 권이 무게는 50파운드(약 22.6kg)요, 3피트x2피트(약 90cmx60cm) 크기이다.
(출처: http://mentalfloss.com/article/520325/audubons-birds-america-book-so-big-it-needed-its-own-furniture)
영화에서도 책 4권을 다 가져가려다가 두 권만 가져가다가 그것조차 무거워서 놓친 후 그냥 가방에 넣어 뒀던 다른 책(무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초판본을 비롯한)들을 가져다 파려는 것으로 나온다.
두 사람이 낑낑 들면서 천천히 움직여도 힘들 텐데 이걸 들고 빨리 움직여서 도망치려 하니까 실패할 수밖에.
영화 끝에는 (여태까지 쭉 보여 준, 이 영화의 실제 네 주인공들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인 사서 '베티 진(Betty Jean)'의 인터뷰가 나온다(영화에서는 앤 도드가 이 도서관 사서 역을 맡았다).
베티 진은 "그들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해 나를 아프게 했고, 나는 그들이 아주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거죠."라는 식으로 말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자기네들은 영화 주인공이 된 느낌, 짜릿한 기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흥분을 느꼈을지 모르나 이건 현실이다.
현실에서는 그들은 멋진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이며, FBI(에릭이 FBI가 되고 싶어 했다고 내가 말했던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또한 피해자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베티 진 말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은 거다. 몇 개월이고 범죄를 위해 준비하고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건, 베티 진의 인터뷰가 나오기 전까지 한 최소 1시간 반 정도 우리가 이 넷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 몰입했기에 이 당연하게 맞는 말을 한 베티 진을 보면서 '맞아요. 그렇지만 그래도 걔들이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들은 아니라고요.' 하고 반박하고 싶어진다는 거다.
인터뷰 부분에서 실제 네 주인공들이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보여 주는 이 영화를 보러 와서 또 이 진리를 까먹고 앉아 베티 진을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영화가 네 명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점'은 강력하다. 자신의 시점에서 자기 버전으로 하는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가 영화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주인공들에게 이입한다.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 남녀 주인공이 이어지기를, 범죄물을 보면 범죄자가 경찰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바란다.
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렀건 그건 상관없다. 다소 '나쁜 남자' 또는 '나쁜 여자'가 나와도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못한다.
왜냐, 우리는 거의 1시간 반 내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니까. 우리가 곧 그들이니까.
그래, 좋다 이거다. 그건 그냥 영화고, 그래서 실제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 바보 같은 범죄로 인해 7년 이상을 교도소에서 살다 나왔다.
피해자가 버젓이 그들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어, 그래도 걔들이 뭐 악의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고...' 이러고 싶어 한다니, 참 놀랍지 않은가.
물론 우리도 어떤 악의를 가지고서 베티 진에게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 헤롱헤롱해서 제대로 생각을 못 하는 거지.
나는 이런 점을 영화관에서 느끼고 조금 놀랐다. '시점'의 힘이라는 건 정말로 강력하구나.
그나마 다행인 건, 베티 진이 이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이 있다는 것.
감독 말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범죄자라기보다는 멍청이들에 가까워서 (베티 진은) 그들을 향한 용서를 느끼기 시작할 수 있었다(The thing that she realised was that she could start to feel forgiveness for the guys because they weren’t criminals so much as idiots)"라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말 웃지 못할 일이다.
나름대로 '완벽한' 계획을 세웠던 이들은 책을 훔치고 나서 뉴욕으로 가 크리스티(Christie's)에서 책을 감정받는 데 쓴 이메일 주소 때문에 들통이 난다.
문제의 이메일 주소는 야후(Yahoo!) 이메일로, 이전에 도서관에 오두본의 그림책을 열람하기 위해 예약을 잡을 때 썼던 이메일이었던 것.
사실 이게 아니었어도 FBI는 전문가니 어떻게든 그들을 찾아냈을 테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는 그 이메일에 발목을 잡혀 그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7년간 형을 살고 나왔고(영화 끝에 이들이 현재는 어떻게 사는지 에필로그로 조금 보여 준다).
실제 주인공들이 FBI에게 연행되던 당시의 모습
실제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서 기사를 읽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https://people.com/movies/true-story-behind-american-animals/
http://www.vulture.com/2018/06/the-real-life-heist-caper-behind-american-animals.html
실화의 주인공들과 각 배우가 나란히 선 모습.
왼쪽 맨 끝부터 '워렌' 역의 에반 피터스, 실제 워렌(빨강-검정 체크 셔츠), 에릭 역의 자레드 아브라함슨과 실제 에릭(갈색 재킷), 그 옆이자 가운데에 실제 스펜서(옅은 하늘색 셔츠)와 스펜서 역의 배리 케오간, 그리고 맨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가 채즈 역의 블레이크 제너, 맨 오른쪽 끝이 실제 채즈(어두운 색 재킷).
영화와 실제 주인공들의 인터뷰를 적절히 배분하고, 또 끝에 그걸 마무리 짓는 방식이 무척 신선하고 흥미롭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를 꿈꿔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이 네 사람은 극단적으로 현실을 영화로 착각한 경우라 정말 결국 영화의 주인공이 되시었다(생각해 보니 자기 인생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데 동의하는 것도 돈을 꽤 받지 않나? 적어도 할리우드에서는 그렇던데).
포스트 제목에도 썼듯이,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를 영화로 만든다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이걸 보고도 설마 또 따라 하시는 분들은 없겠지. '위험하니 따라 하지 마세요'는 정말 괜히 붙이는 문구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영화.
신선한 맛에 추천 도장 꽝 찍어 드리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