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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서라미, <번역하는 마음>

by Jaime Chung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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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서라미, <번역하는 마음>

 

 

서라미 작가님은 <아무튼, 뜨개>로 처음 만났다. 할머니나 하는 취미라고 생각했던 (죄송) 뜨개에 이렇게 풍부한 문화가 있구나 깨닫게 해 주었던 이 에세이 덕분에 작가님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러던 차에, 며칠 전 리디셀렉트에서 <번역하는 마음>을 보고 ‘엇, 이거 그 작가님인데!’ 하고 눈길이 갔다. 게다가 내가 늘 관심 있었던 번역에 관한 책이라니! 다운로드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통번역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 열 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솔직히 나는 원래 인터뷰 모음집은 안 좋아하는데,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명을 만나 보더라도 거기에서 얻는 대답들이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결국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결론이 나지 않나 싶어 좀 심통이 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잘나가는 빵집 열 곳을 방문해 주인을 인터뷰하더라도 성공 요인은 각각 다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내 빵집을 인기 빵집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사고방식이 단순한 편).

인터뷰 모음집을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다. 통번역이라는 주제 하나로 엮였는데 그 안에 정말 내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수어 통역사’나 (’미얀마어’가 다소 드문 언어이긴 해도) ‘(외국어) 통번역사’, ‘영화 통역사’, ‘출판 번역가’, ‘영화 번역가’는 흔히 들어 보았지만, 내가 어딜 가서 ‘수어 통역사’나 ‘법률 통번역사’, ‘군사 통번역사’, 또는 ‘음악 점역사’를 만나기는커녕 그에 대해 읽어 보겠는가? 정말 통번역의 세상은 넓구나 하고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아마 샤론 최(<기생충>의 미국 홍보 때 봉준호 감독을 통역하신 그분!)나 달시 파켓(<기생충>의 영자막을 만드신 그분!)의 이름은 들어 보셨을 텐데, 특히 샤론 최는 인터뷰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던데 어떻게 모시게 되었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작가님이 남편분의 인맥을 총동원해 물어물어 연락처를 구하셨다고).

나도 나름대로 번역 업계에 발을 조금, 애들 물장난 하는 수준으로, 담아 보았기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꼭지에서 나온 이 부분.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번역가의 자질을 말하며 “번역은 완벽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감내할 수 있는 성격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작가에게는 완벽하지 않은 원고를 세상에 내보일 용기가 필요하다든지.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원래 대사를 바꾸기도 하고 뒤집기도 해야 하는 번역의 시간이 그에게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겨내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완벽주의 성향이 어느 정도 있어요. 그런데 번역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번역 안에서 계속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렇게 강제로라도 자꾸 타협하고 절충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제 성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설명충이라 과제로 리포트를 써도 거기에 각주를 달기 참 좋아한다. 이런 나에게 영상 번역(한 줄이 12~16자로 제한, 최대 두 줄 가능)이란 정말 많은 것을 쳐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구구절절 옮기고 싶은데! 대사 중에 그 나라만의 문화를 담고 있다거나 무엇을 인용하는 (예컨대 유명한 노래의 한 소절이라든지) 일이 있다면 그걸 줄줄 설명하고 싶어서 아주 좀이 쑤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영상 번역이 아니라 출판 번역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기피할 거다. 이놈의 설명충 성향! 그래도 달시 파켓 말대로 번역을 하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다 된 게 완벽한 것보다 낫다(Done is better than perfect)’라는 정신을 함양하는 법을 배우긴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줄이지 않고, 적당히 매끄럽게 윤문하지 않고 정확히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하는 통번역 분야가 있단다. 바로 법률 통번역사.

이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 형사사법절차상 사법통역의 개선방안 연구』라는 보고서에는 캘리포니아 법원이 발행한 「 미국 각 주의 사법 통역인 관련 규범 및 매뉴얼」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증인이 “나, 나, 나는 못 봤습니다”라고 말을 더듬었다면 통역사는 “나는 못 봤습니다”라고 줄이지 말고 증인이 더듬은 말을 모두 그대로 옮겨야 한다거나, “이제”, “글쎄요”처럼 의미 없이 하는 말조차 다른 표현으로 바꾸거나 생략하지 말고 최대한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 변호사가 의뢰인의 이름을 잘못 부르거나 날짜를 잘못 말하더라도 정정해서 통역하거나 변호사에게 오류에 대해 알려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 또 피고인이 통역사에게 “증인의 증언은 통역하지 말라”는 요구를 했다면 통역사는 이에 응하지 말고 그러한 요구를 받았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판사에게 알려야 한다는 내용 등 하나같이 출판 번역에 적용되는 암묵적인 규칙과는 결이 다른 지침들이었다. 출판 번역을 하듯 법률 통역을 한다면, 허위 통역을 했다거나 통역인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형법의 심판 아래에 놓일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가를 배운다. 그게 중요하다.

말을 더듬는 것이나 실수까지 모조리 옮기라니, 이건 뭐 통번역가에게 로봇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용한 아래 문단처럼 온갖 세세한 것까지 모두 고려해 통번역을 하려면 경험과 인간의 판단력이 필요한데, 어떻게 고작 AI 따위를 믿고 맡길 수가 있을 것인가. 인간에게 로봇이 될 것을 요구하는데 실상 로봇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형법상의 살인죄를 영어로 옮길 때 단순히 murder라고 옮겨서는 일이 어긋나기 십상이다. 코넬대 로스쿨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법률 용어 사전에 따르면, 살인을 뜻하는 murder라고 해도 범행 동기와 의도 유무에 따라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흉기를 휘두르며 심각한 신체적 해를 입히기 위해 공격적으로 사람을 죽인 행위는 Grievous-bodily-harm murder, 강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에 사람을 죽인 경우는 Felony-murder, 총기 난사처럼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Depraved heart murder라고 써야 한다. 법률 번역의 어려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범죄자의 진술이 담긴 문서를 번역하려면 범죄자가 쓰는 은어까지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이인 정다혜는 이런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지키며 복잡한 퍼즐을 맞춰야만 완성되는 법률 번역이 재미있다고 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소개하겠다. 김유진 군사 통번역사의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정말 한마디 한마디 버릴 데가 없다 (근데 이건 직접 실무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듯). 참고로 이분은 HBO사의 드라마 <체르노빌>을 국내에 들여올 때 이 드라마에 삽입된 러시아 시를 번역하신 분이다.

“언어를 아는 것과 통번역을 할 줄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인데, 군 안에서도 그렇고 제가 봤을 때 한국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통번역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외국에서 살다 왔으면 이 정도는 쉬운 일 아닌가?’라고 생각하세요. 특히 군대에서는 일단 명령이 내려오면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보니까 통번역을 시킬 때 고민을 잘 안 하시고 간단한 거라는 말을 정말 자주 쓰세요. ‘간단한 거야.’ ‘금방 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면 직접 하셔도 되는데요. (웃음) 번역이나 통역하는 사람이 판단하기도 어려울 텐데 쉽다는 판단을 감히 누가… 또 정반대로, 제가 통역하는 걸 보시고 ‘너 러시아에서 살다 왔어?’ 이렇게 묻는 분도 계세요. 교환학생 한 학기 다녀왔다고 대답하면 금방 불신을 가지세요. 살다 오지도 않았는데 네가 하는 러시아어가 맞는다고 어떻게 신뢰할 수 있냐. 저쪽이 못 알아들으면 어쩌냐. 혹은 네가 우리 말을 못 전하면 어쩌냐. 이렇게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적이 많아요.”

번역가라는 직업의 여러 단면 중 하나를 이름으로 짓는다면 ‘경시와 불신 사이의 연옥에서 고통받는 자’가 적당할지 모른다. 세상에 번역보다 숭고한 일은 많지만, 그렇다고 번역이 누구나 별거 아니라고 잘라 말해도 될 만큼 느슨한 일일 리도 없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기나 할까. 그럼에도 번역에 대한 평가는 투박하기 그지없다. 누군가 번역을 경시 아니면 불신의 태도로 대한다면, 그는 이해와 번역을 혼동할 확률이 높다. 이해는 입력이지만 번역은 출력이다. 혼자만 알면 되는 것이 이해라면, 때로는 특정한 타인을 때로는 특정할 수 없는 대중까지도 납득시켜야 하는 번역에는 이해만 할 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많은 단계가 필요하다. 수첩에 끼적인 낙서가 초상화로 발전하기까지 긴 과정이 필요하듯 이해가 번역이 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영원히 고통받는 통번역가... 🥲

 

저자가 책의 서문에도 썼듯이, 번역은 우리 일상에 언제나 존재하고,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번역을 한다. 오늘 점심에 디저트로 먹은 과자의 성분은 5개 국어로 적혀 있고,잠들기 전에는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작품의 한국어판을 읽는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새 기저귀를 준비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상사의 말에 직원은 보고서의 분량을 3분의 2로 줄인다. “자니?”라는 누군가의 문자를 덮어두지 못하는 이유도, “비가 오려나”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무릎을 걱정하는 이유도 우리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번역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수많은 번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통번역을 낯설게 여기지 말고 조금 관심을 기울여 주면 좋겠다. 통번역에는 이렇게나 넓고 다양한 분야가 있답니다, 여러분! 사실 통번역을 잘 몰라도, 큰 관심이 없어도 각 인물의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독특하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추천!

➕ 서라미 작가님의 <아무튼, 뜨개>에 대해 내가 쓴 서평은 요기 아래 링크로 확인하시라.

https://readingwritingandrevolution.tistory.com/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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