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서평은 정지음의 <언러키 스타트업>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실 예정인 분들은 독서의 재미를 위해 책을 먼저 읽으신 후에 이 서평을 읽으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이 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하고 싶다.
첫째, 내가 이번 달, 아니 올해 읽은 책들 중 제일 웃기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데 웃음이 끊기지 않는다.
둘째, 5인 미만 사업장이나 5인 이상이더라도 ㅈ소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에겐 PTSD를 유발할 수 있다. 그만큼 ㅈ 같은 기업에서 구르는 이들의 경험이 아주 잘 묘사돼 있다.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있다. 그래서 이걸 읽으면서 폭소함과 동시에 내 경험이 떠올라 종종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이렇게 하이퍼리얼리즘으로 ㅈ 같은 기업을 묘사할 수 있다니, 작가님의 솜씨에 감탄했다. 물론 그러면서 작가님도 이런 거지 같은 곳에서 일해 보신 경험이 있는 걸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 작가님 절대 지켜 ✊
이 책은 이번 주 화요일 아침, 내가 받아 보는 한 뉴스레터를 통해 알게 됐다(’어거스트’). ‘시트콤 소설’이라니, 뭐지? 하고 책 소개를 후루룩 읽어 봤는데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바로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찾아보았고, 다행히 바로 다운로드가 가능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다 끝내 버렸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진짜 ‘시트콤’처럼 시즌제로 계속 내주시면 안 될까요, 작가님?
소설은 ‘SGC Test’라는, 일종의 직장인 번아웃 지수 테스트로 시작한다. “본 테스트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의 자문 없이, 몇몇 회사원들의 불평불만에서 고안되었습니다.”라는 주의 사항이 딸린 이 테스트는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기 충분하다. 특히 내가 공감한 건 이 부분이다.
- 귀하가 재직 중인 회사의 최근 퇴사자 수는 몇 명입니까? ① 0명 ② 1~3명 ③ 4~6명 ④ 애초에 정원이 5명 미만 ⑤ 퇴사자 수보다, 나가야 할 인간이 절대 안 나가고 있는 것이 제일 큰 문제
5번에 극공감!
그리고 내가 ㅈ소 기업에 다녔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내 테스트 결과는 5번과 6번 사이 어딘가인 것 같다.
5. 완성된 불행형(40~49점)
이 유형에 다다르면 언어와 사고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욕설이나 비속어 없이는 무언가를 설명하기 힘들어지며, 표정이 사라지고, 냉소와 염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 무언가를 부숴 버리고 싶다, 다 함께 망했으면 좋겠다 등, 범죄에 가까운 상상을 자주 합니다. 본인의 기세가 너무 흉흉해져 지인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일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식의 조언이 들어올 것입니다. 당신의 신체와 정신, 감각이 끊임없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병원 치료나 주변의 격려, 염려는 임시방편일 뿐, 별 개선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미 좋은 것들로 나쁜 것들을 상쇄할 수 있는 정도를 지나친 유형입니다.
6. 절대 불행형(50점 이상)이 유형에 다다르면, 퇴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당신의 감정, 언어, 일상 모든 것이 비정상의 영역으로 편입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실존 가치를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 경우, 기계처럼 무감각해지거나 별다른 자극 없이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상태로 치닫습니다. 1분 1초 빠짐없이 슬프거나, 슬픔을 아예 인식할 수 없습니다. 당장 도망치십시오. 이 유형은 퇴사 후에도 요양에 가까운 휴식을 취하며 천천히 본래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쉬는 법을 잊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인, (소설 속 화자 김다정 주임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답 없는 회사”인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의 세 직원들, 즉 김다정 주임, 이수진 대리, 오지구 대리는 소설이 시작할 때 모두 6번 상태다. 1화는 ‘김다정 DJ 주임의 폭발’이라는 제목인데, 김다정 주임이 ‘DJ’가 된 연유는 이러하다.
(…) 캡틴 박은 이 꼬라지가 우습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이 놀린다는 이유로 돌연 영어 닉네임 제도를 도입했다. 명함의 ‘대표 박국제’를 ‘CEO James’ 정도로 뭉개려는 시도였다.
말 같지도 않은 변덕 때문에 ‘김다정 주임’으로 살던 나는 뜬금없이 ‘DJ’가 되었다. 정확히는 ‘DJ 주임’이었다. 오지구가 ‘Earth 대리’로 변한 것은 안 웃겼는데 이수진 언니를 ‘Susan 과장’이라 부르자니 그것은 웃겼다. 어찌 보면 세 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직급 체계를 만든 대표가 제일 웃길지 몰랐다. 그러나 미소조차 나오지 않는 사실이 더 있었다. 우리끼리는 팀도전부 달랐다. 각자가 1인 팀의 유일한 팀원이자 팀장이었다.— 요즘 세상에 사장님이 이름을 정해 주는 회사라니……. 그리고 닉네임 쓸 거면 직급은 빼야 할 거 아니야. 가뜩이나 깡통 직급이라 창피해 죽겠는데. 명예와 긍지를 중시하는 수진 언니, 아니 수장 과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그가 진저리 치며 건넨 새 명함을 받아 들었다.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디지털전략총괄기획팀 과장 수잔 이수진’이라는 글자들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서로를 다닥다닥 끌어안고 있었다. 이따위 명함을 가진 인간이라면 응당 무능하겠거니 선입견이 생기는 물건이었다.
— 친구들 단톡에 보넀더니 사기꾼 명함 같대. — 난 미국에서 쓰던 이름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Earth’로 정해졌다고. 유학 시절 내내 ‘Mia’로 살았던 지구도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우리는 뭐랄까, 사기꾼 같다기보단 사기꾼 축에도 끼지 못할 오합지졸이었다. 각자의 업무 능력과 품성은 훌륭하였으나 박국제라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흔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우리 회사는 ‘하이 리스크 노 리턴’이었다.
처음엔 우리들도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세 명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밤낮없이 일하고, 의기투합하는 것으로는 박국제라는 구멍이 메워지지 않았다. 직원들이 모종삽이라면 대표는 싱크홀이었다. 하루 종일 삽질만 하다 의미 없는 야근을 할 때면 이런 시궁창이 어째서 회사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건지 아득해지곤 했다.
오오, 벌써 느껴지지 않는가. 이게 1화의 첫 시작 부분인데 벌써부터 대박의 조짐이 풍긴다! 나는 표현을 이렇게 웃기게, 신선하게 하는 작가는 처음 봤다. 진짜 감탄을 내두르며 읽었다. 내가 전자책을 읽으며 남긴 메모에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ㅋㅋㅋㅋㅋㅋㅋ’ ‘개공감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 등등이 가득하다.
내가 특히 웃었던 표현 몇 가지만 인용해 보자면,
11시. 사람 모양의 똥통 박국제가 사무실에 출몰하는 시각이다. 보통 그 행위를 ‘출근’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놈은 종일 팽팽 노는데 출근이란 명명이 옳을지는 모르겠다. (2화)
지저귀는 꼬라지를 보니 이번 일도 그르칠 모양이었다. 된다고 우겨서 진짜 되면, 우리 모두 부자나 마법사, 아이돌이나 우주비행사, 대통령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어째서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 가능성들이 대표의 단춧구멍 눈깔 앞에서만 반짝이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런 걸 물었다간 제 혈압을 이기지 못한 박국제가 응급실로 이송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병원보다는 감옥에 가길 바라서 매일 할 말을 참는 중이었다.(4화)
나는 무교지만 가끔씩은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저 자식이 제발 입 좀 닥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다이소에서 CEO용 입마개를 살 수 있게 해 주시든가요. 어떤 신도 답하지 않는 가운데 지루한 월, 화, 수, 목, 금 들이 반복되었다. (…)
언젠가부터 내 장래 희망은 간사한 박국제를 쥐어팬 후 깽값을 물지도 감옥에 가지도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또한 모든 신께 번갈아 빌고 또 빈 사항이었지만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많이 빈 것에 비해 성과가 없는 걸 보니 신들의 세계에도 방관자 심리가 있어 ‘나 말고 쟤가 들어주겠지.’ 미루는 것만 같았다. (7화)
나도 거지 같은 회사를 다니며 대표와 실장(대표가 남편, 아내가 실장인 가ㅈ 회사였다!) 욕으로 직원들이 대동단결하며 친해지는 경험을 해 보았기에 세 직원들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다녔던 곳은 직원들이 (나 포함) 5명이어서 5인 미만 사업장은 간신히 면했는데, 팀이 딱 두 개 있었고 작은 오피스텔이 사무실이었다. 그 안에만 들어가면 저절로 눈이 침침해져 오탈자도 잘 안 보이고 기분도 다운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리고 고소를 예방하기 위해 이 회사를 자세히 묘사할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모든 직원들이 대표와 실장을 욕하며 단체 퇴사를 감행했다는 것. 정확히는 내가 제일 먼저 탈주했고 (그래도 그곳에서 1년 반 넘게 있었다), 그다음 달에 두 개 팀에 속하는 세 명이 나왔다. 그 세 명이 단체 퇴사를 하는 날, 나까지 넷이 모여 그곳에서 보았던 더럽고 치사한 꼴을 입이 닳도록 욕하고 그치들을 저주했다. 내가 살면서 제일 저열하고 거친 언어를 쓰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회사 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다정이가 친구 지원이와의 약속에 늦고 (물론 대표가 일찍 퇴근을 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착해서도 친구 앞에서 회사 욕만 늘어놓으니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도 진짜 너무너무 하이퍼리얼리즘이다. ㅈ 같은 회사에 다닐 때는 누굴 만나도 회사 욕만 하고 싶은데 이것도 ㅈ 같은 데에 다녀 본 사람만이 그 답답함을 알지,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뭐 좋은 얘기도 아닌데 이 얘기만 줄창 한다면 당연히 듣기 싫어질 것이고, 그러면 인간관계는 바이바이… 하, 이게 다 ㅈ 같은 회사 때문이다. 여튼 이 점을 정확하게 캐치해 묘사하신 작가님, 다시 한 번 이런 곳에서 일하신 경험이 있나 걱정하게 된다. 제가 그 심정을 압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소설은 하이퍼리얼리즘이다. 이런 거지 같은 회사를 안 다녀보신 분들은 이 소설을 읽고도 ‘하하, 좀 웃기네. 근데 작가가 웃기려고 좀 오버한 거 아냐?’ 싶으실 수도 있다. 100% 단언하건대 이 소설에 과장이나 허구가 들어간 곳은 전혀 없다. 조금 픽션이다 싶은 부분은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갑을전쟁>이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다는 것 정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갈등 과정이나 이유, 직원들이 이에 대처하는 태도가 너무나 현실적이라 나는 요 <갑을전쟁> 부분만 빼면 나머지는 픽션이 아니라 다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팍팍한 삶에 웃음이 필요하다 하시는 분은 이 소설을 적극 추천한다. 물론, 이런 ㅈ 같은 직장에 다녀 보신 분들은 PTSD가 올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그 점만 유의하면 직장에서 일하는 1년간 웃을 웃음을 이 소설을 읽으며 다 웃으실 수 있다. 재미는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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