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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Rosaline(로잘린)>(2022)

by Jaime Chung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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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Rosaline(로잘린)>(2022)

 

 

⚠️ 아래 후기는 영화 <Rosaline(로잘린)>(202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때 사랑을 위해 죽는 게 아름답고 로맨틱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손 꼭 잡고 같이 다니는 어르신들을 보면 그렇게 흐뭇하고 부러울 수가 없다. 사랑을 위해 죽는 것보다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같이 사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될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사랑을 위해 죽는다고 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을 향한 로미오의 사랑이, 그리고 로미오를 향한 줄리엣의 사랑이 정말 그렇게나 대단하고 숭고한가? 흔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절절한 사랑, 열정적인 사랑의 대표격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원래 희곡을 읽어 보면 로미오는 줄리엣을 만나기 전 로잘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에게 퇴짜를 맞아 슬퍼하던 상태였다. 줄리엣에게 반하는 건, 로미오의 사촌이자 친구인 벤볼리오가 그런 여자는 잊어 버리라며 데려간 캐풀렛 집안 연회에서였다(혹시 내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1막 1장부터 4장까지를 직접 읽어 보시라). 그 이후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다.

로잘린은 자신에게 목을 매던 로미오가 줄리엣이라는 여자애에게 반해 마음이 확 바뀐 걸 알았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었을 때 그들을 기리는 조각상을 세울 거라는 캐풀렛과 몬터규의 말로 보아 아마 알기는 알았을 거다. 그녀는 슬퍼했을까? 아니면 애초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로미오를 거절했으니 그다지 상처 받지도,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았을까?

그거야 어디까지나 상상 속 희곡의 이야기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와 그 원작 소설 버전에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작 소설이라 함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몇 번 언급된 게 전부인 로잘린에게 상상력을 가미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쓴, 레베카 설(Rebecca Serle)의 <When You Were Mine>을 말한다(국내 번역 정발은 되지 않았다). 자신을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며 칭송하고 자신에게 푹 빠져 있던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 그녀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버리자 이 버전의 로잘린은 크게 상처를 받고 배신감을 느낀다.

영화는 이런 로잘린을 주인공으로 세워, 어떻게든 로미오를 되찾으려 애쓰다가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들이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 자체가 조금 민망한데, 이야기가 너무나 예측 가능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일단 로잘린(케이틀린 디버 분)은 아버지에게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으며, 다리오(션 틸 분)라는 남자와 강제로 선을 보게 된다. 물론 로잘린은 이때 로미오(카일 앨런 분)와 아직까지 알콩달콩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거절하지만, 다리오와 선을 보는 사이 캐풀렛 가의 연회에 가지 못하게 된다. 이 연회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사벨라 모너 분)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문제는 줄리엣이 로잘린의 사촌 ‘언니’로서 그 애를 잘 돌봐야 하는 의무 비슷한 게 있다는 것. 로잘린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이를 떼어 놓고 다시 로미오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지만 소용은 전혀 없다. 여차저차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는데 솔직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다 가져 보았을 만한 의문(예컨대 ”아니, 줄리엣 쟤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을 먹을 거면서 로미오에게 뭐 언질 한마디를 안 주냐? 그러다가 진짜 네가 죽은 거라고 착각하면 어떡해!”)을 착실히 따라가 어찌저찌 수습을 하고, 너무나 예측 가능한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 시작한 지 30분쯤 되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나머지 1시간가량을 보든 보지 않든, 여러분이 가진 지식 및 정보의 양은 동일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원본 텍스트의 담화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다 보고 나서는 이렇게나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 거면 도대체 왜 ‘굳이’ 레베카 설의 소설 판권을 가져와 영화화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판권 비용을 그냥 좋은 창작 각본을 사는 데 보태면 안 될까? 그 편이 조금 더 저렴하게 먹히지 않을까? ‘굳이’ 이 소설과 이 영화일 이유가 무엇인가? 이 정도 되면 순결을 위해 로잘린이 로미오를 거절했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 내용에서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거 아닌가.

정말 ‘굳이’ 이 영화의 장점을 찾아보자면 몇 가지를 착즙해 낼 수 있겠다. 첫째, 캐풀렛과 몬터규 가 인물들이 전부 같은 인종(백인)이어서 한쪽 가문을 흑인으로 만든 모 프로덕션 같은 ‘원작 곡해’는 없다는 것. 오해하지 마시라. 나도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는 캐스트를 참 좋아하고 그게 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좀 이야기가 다르다. 애초에 두 가문은 “해묵은 원한으로 새 싸움을 일으키”는 가문인데, 포인트는 이 ‘해묵은 원한’이다. 오래전 원한인데 정확히 무슨 사건인지도 언급되지 않아 캐풀렛과 몬터규 두 쪽 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 두 가문 중 한쪽의 인종을 바꾸어 버리면 그 이유가 너무나 가시적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핵심은 ‘별로 싸울 만한 이유도 없는 두 가문이 싸우고 있었는데 이 연인들의 희생으로 두 가문이 화해하고 화합한다’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장점이라면 패리스(영주의 친척이자 줄리엣이 약혼한 상대)가 이 영화에서는 로잘린의 게이 친구(스펜서 스티븐슨 분)로 등장한다는 것 정도? 이 담화에 나름대로 어떻게 성 소수자를 끼워 넣었다는 걸 좋게 봐 줄 수도 있겠다. 근데 그거 말고 또 딱히 칭찬할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별 3개짜리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에 미니 드라이버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를 로잘린의 유모 역으로 캐스팅했다는 건 배우 낭비로 봐서 단점에 들어가는 게 아닌지.

너무 실망하지 마시라. 이 영화에 큰 아쉬움을 느꼈을 (또는 느낄) 여러분을 위해 몇 가지 좋은 작품을 추천해 드리고 싶으니까. 일단 기존 작품의 의미를 반전시키고 담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다시 쓰기(re-writing)’에 흥미를 느끼신다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추천한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속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의 삶 이야기를 상상해 생명력을 불어넣은 소설이다. 정말 기가 막히다. 로체스터 씨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비판과 여성주의적 서사까지 다 갖췄다. 단연코 최고. 그리고 그다음은 나도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책을 주문해 놓긴 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현대적으로 잘 각색했다는 평을 받는, 제인 스마일리의 **<천 에이커의 땅에서>**이다. 미국 아이오와 주를 배경으로 <리어 왕>을 현대화할 기가 막힌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원작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면서 재미와 귀여움 모두 갖춘 작품을 찾는다면 역시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0 Things I Hate About You)>(1999)**를 제일 먼저 꼽겠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불쾌하지 않게, 귀엽고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로 탈바꿈시켰다.

https://blog.naver.com/eatsleepandread/222953586720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0 Things I Hate About You)>(1999)

나는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편은 아니다. 아마 영화든 소설이든 내용을 알게 되는 게 제일의 목적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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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현대화한 **<클루리스(Clueless)>(1995)**도 빼놓을 수 없다. 셰어(Cher)라는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은 단연코 1990년대의 ‘엠마’라 할 수 있다. 안야-테일러 조이가 연기한 2020년 버전의 **<엠마.(Emma.)>**도 좋지만 그건 현대적 각색은 아니고 고전 그대로를 영상으로 옮기려고 한 작품이니까 여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분명 원작에 충실하게 잘 만들긴 했다.

이 정도 추천이면 이 뻔하디 뻔한 영화 때문에 느낀 안타까움은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 터. 이제 여러분이 하실 일은 이 좋은 작품들을 즐기는 것뿐이다. 모쪼록 이 추천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오늘은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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