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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天気てんきの子(날씨의 아이)>(2019)

by Jaime Chung 2023.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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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天気てんきの子(날씨의 아이)>(2019)

 

 

⚠️ 아래 영화 후기는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의 소설 버전을 읽었으므로, 기왕 애니메이션을 보는 김에 <날씨의 아이>도 봤다. <언어의 정원>과 <너의 이름은>은 봤는데 <날씨의 아이>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필모그래피를 깨는 느낌으로 시도한 것. 사실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요약본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친구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길래 ‘무슨 소리인가’ 싶어 요약본을 2배로 빨리 감기 해서 대충 내용만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빨리 감기 하지 않고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는 뜻이다.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이러하다. 두 달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도쿄에 상경한 16세 소년 호다카. 호다카는 비가 그쳐서 어머니와 같이 푸른 하늘 아래에 서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신비한 신당에 기도를 올리러 갔다가 비를 (잠시나마) 그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소녀, 히나를 만난다. 히나는 동생 나기와 호다카와 같이 비가 그치길 바라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하게 쓰는 바람에 몸의 일부분이 비로 가득 찬 듯 투명해진다. 히나는 호다카를 위해 비를 완전히 그치도록 자신을 희생하기로 하고 실제로 비가 그치지만, 호다카는 날씨 따위 미쳐 있어도 상관이 없고, 푸른 하늘보다 히나가 더 좋다며 이 인신공양을 멈추어 버린다. 이런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도쿄는 다시 끊임없이 비가 계속 내리는 날씨로 바뀐다. 애초에 고향에서 도망쳐 나왔던 호다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온 후, 호다카가 히나를 다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자기 희생’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누가 히나에게 ‘제발 우리를 위해 네 한 몸 희생해 줘’ 한 것도 아니고 (히나와 호다카, 나기가 만나러 갔던 할머니도 호다카가 재방문했을 때 도쿄는 원래 바다였다며, 지금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도 비정상이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케이와 나츠미가 만나러 간 할아버지도 800년 전에도 이렇게 비가 많이 왔었다고 하면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기록’과 ‘정상-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함을 짚어냈다), 히나 본인이 호다카에게 “비가 그쳤으면 좋겠어?”하고 애매하게 물어봤을 뿐이다. 비가 그치는 대가가 히나의 희생이라면 호다카가 그걸 원했을 리 없다(만에 하나 원했다면 그런 놈과는 당장 헤어져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나는 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니, 누가 ‘히나 한 명을 희생해서 도쿄의 날씨를 바꿉시다!’ 하고 히나에게 스스로를 포기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렇게 강요를 했다 하더라도 고작 15살(히나는 18살이라고 속였지만 실제로 15살이었다)짜리 여자애 하나에게 도쿄 전체의 운명을 맡겨 버리는 짓에 찬성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른들이 되어서 고작 15살짜리를 이용해 먹으려 들어? 안 될 말이다. 본인이 하고 싶다 해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라면 애를 말릴 것이다. 게다가 영화 후반에 (그 일이 다 일어나고 난 후에) 케이도 말하지 않는가. 너희들이 날씨를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런 착각 말라고. 케이가 진짜로 호다카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지만, 믿는다 하더라도 호다카가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히나의 희생하기로 한 일을 호다카가 뒤짚어 버렸으니까) 굳이 그렇게 말한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가 어쨌든 간에 히나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상황이 더 나아졌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비는 그쳤을지 몰라도 나기와 호다카는 히나를 잃어서 슬퍼했고, 호다카는 경찰에 붙잡힌 상태에서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와 히나를 만나러 간다. 본인이 없어지면 본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할 거라는 생각을 히나는 안 해 본 걸까? ‘내가 없으면 모든 게 더 나아질 거야’라는 건 정말 본인의 망상, 착각에 불과하다(나는 굳이 ‘히나’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히나뿐 아니라 그런 자기 희생적 태도를 가진 모든 이들이 이걸 자신에게 대입해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뭐가 나아졌단 말인가. 비가 그쳤어도 다른 사람들이나 좋아하겠지, 자신을 좋아해 주는 동생과 남자 친구는 절망에 빠졌는데. 그래도 희생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갠 날씨에 기뻐하지 않겠나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사람들은 히나가 희생해서 날씨가 바뀌었다는 걸 모른다. 따라서 히나가 자기 한 몸 바쳐 날씨가 바뀌었다는 사람들에게는 히나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 다수는 그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믿든 믿지 않든, 자신이 얻는 이득이 남의 희생에 따른 대가라면 오히려 찝찝해하고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혹자는 ‘누가 너한테 그런 거 해 달래?’라며 히나에게 따지고 들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나기와 호다카뿐 아니라 도쿄의 다른 이들에게도 딱히 좋은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희생’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내가 조금 희생하면 상대는 더 행복할 거야.’ 무슨 소리. 상대가 바라지도 않았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자기를 희생하며 살다가는 고맙다는 말도 못 들을 거고, 상대방도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 후회가 막심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를 남보다 못한 존재로 끊임없이 비하할 테니까. ‘희생’과 ‘사랑’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날씨의 아이> 덕분에 나는 절대 자기 희생하며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라든지 전체주의, 공리주의 등 철학적으로 파고들어가자면 이야기할 거리가 끝이 없을 이 논점을, 이 진리를 이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한 게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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