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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지음, <오색 찬란 실패담>

by Jaime Chung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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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지음, <오색 찬란 실패담>

 

 

내 블로그를 좀 오랫동안 보신 분이라면 내가 정지음 작가의 팬이라는 사실을 익히 아실 것이다. <젊은 ADHD의 슬픔>부터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그리고 <언럭키 스타트업>까지 모두 다 읽고 후기를 썼다. 최근에 정지음 작가의 신작 <오색 찬란 실패담>이 나와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친구들이 내 생일에 문화상품권을 많이 선물해 주었기 때문에 가벼운 손과 마음으로 구입했다.

이 책은 제목처럼 정지음 작가가 삶의 여러 면에서 ‘실패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책 중반쯤에 작가는 자신이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언어를 잃었고, 현재까지 그것들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다고 썼는데 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전부 회복하지 못했는데도 이런 미친 표현력이라고요? 도대체 그 이전에는 어땠길래…’

일단 운동 ‘실패담’을 한번 보시라. 이건 저자가 요가를 배우러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갈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임하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혹은 수업을 ‘수련’이라 칭하기 때문일까? 요가는 내가 아는 것 중 제일 정적인 운동이었다. 대망의 첫 수련 날, 10분이 지난 시점에만 해도 나는 “뭐야, 꽤 할 만하잖아?”라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분이 흐른 후 스마트워치에서 긴급 알림이 빗발쳤다. 분당 심박수가 치솟고 있으니 심호흡을 하든, 뭘 하든 주인놈은 재빨리 살 길을 찾으라는 신호였다.

“절대 숨 참지 마세요. 자,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숨을 쉬라는 메시지는 스마트워치뿐만 아니라 요가 선생님도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중이었다. 하지만 육지 포유류가 심심해서 숨을 참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 숨을 못 쉬고 있다면 해석의 여지는 하나였다. 지금 그가 죽기 직전으로 힘들다는 것…….

(…)

그날 수업의 클라이맥스는 ‘전갈 자세’였다. 엎드려뻗쳐 상태에서 한 발을 들어 전갈 꼬리처럼 반대쪽으로 넘기는 동작인데, 수련에 조금 익숙해진 내게도 쉽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와중에 나보다 더 위태롭던 그분이 결국 옆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왜인지 눈물이 찔끔 솟았다. 그분 얼굴에 새빨갛게 떠오른 수치심 또는 열패감이, 내가 줄곧 지니고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아서였다. 남들 다 하는 일을 나만 못할 때의 기분이라면, 나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즉시 부들대기를 멈추고 그분보다 더 요란하게 자빠져 버렸다. 스무 명 남짓의 수련생 중 전갈 자세에 실패한 건 우리 둘뿐이었다. 그분이 반사적으로 이쪽을 돌아보았고, 나는 헤헤헤 웃어 보였다. 원래라면 다시 도전했겠지만, 그날은 잠시 매트 위를 뒹굴며 딴짓을 했다. 그분께 말하고 싶었다. “당신만 못하는 게 아니니, 내일도 꼭 다시 만나요.” 이 말은, 첫 수업 때 자세 평가를 듣고 충격받은 내게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이기도 했다.

너만 잘 못하는 게 아니니 안심하라는 위로를 이렇게 온몸으로 보여 주는 친절함이라니. 이런 자세는 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PT를 받으러 간 일화도 너무 웃기다. 헬스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듯.

선생님은 늘 정성 들여 운동 기구의 이름을 알려주지만 그런 것이 머리에 남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리 운동 기구니까 ‘레그 헬’, ‘레그 지저스크라이스트’, ‘레그 엑소시즘’ 뭐 이런 이름들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운동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반드시 내가 선생님의 싸늘함을 넘어서고 마는데, 음성으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고 오로지 끄덕끄덕과 도리도리로만 의사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갯짓으로 의사 표현을 자주 했다. 이 행동으로 싸가지 없다는 지적을 여러 번 들은 이후로는 고치려는 노력도 많이 했다. 실제 싸가지를 고치는 건 어렵지만…… 가진 싸가지를 들킬 만한 행동을 고치는 건 그나마 쉬웠다.

헬스장에서 제일 싫은 공간은 의외로 스트레칭 존이다. 얼핏 보면 기구 운동‘보다는’ 맨몸 운동이 수월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운동을 해야 했는데, 난 그것이 정말 싫었다. 대걸레마냥 갈래갈래 나부끼는 머리털과 팥죽 같은 안색을 한 나와 눈을 맞추고 스쾃을 하고 있으면, 없던 외모 자격지심도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왜 보고 싶지 않은 내 얼굴을 보며 운동해야 하냐고 물었다. “정면을 봐야만 축이 틀어지지 않으니까요.”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은 외모 자격지심을 박멸하는 방법을 몸소 가르쳐 주기도 했다. 방금 한 동작을 두 세트만 더 해보면, 애초에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게 될 거라고 했다.

실제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다다르면 눈앞에 얼굴은 어느덧 날아가고, 그동안 내가 휩쓸고 다닌 배달 음식들이 원죄 목록처럼 좌르르 지나갔다. 죽을 것 같다는 심정이 들기에, 어쩌면 그 신기루를 일종의 주마등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한번은 선생님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내가 본 장면들을 읊어주기도 했다.

“방금… 제가 근래에 먹었던 모든 음식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어요. 아무래도 임종이 다가온 모양이에요…….” “회원님께는 그게 왜 이렇게 자주 오나요? 일단 일어나세요.” “그때 내가 그렇게 먹어대서 이 고통을 겪고 있나 하는 생각만…….” “에이, 그래도 먹을 땐 진심으로 행복했잖아요. 그럼 된 거죠.” “헉헉헉…….” “그 정도 행복했음 이 정도 고생해도 괜찮죠. 안 그래요?”

하지만 먹는 게 더 행복한걸요 선생님…

 

명상에 대한 꼭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삼십 평생 명상이라는 행위가 성인들 사이의 재미없는 농담인 줄 알았다. 모두 함께 조용히 딴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기가 민망하니까, 대충 얼버무리는 신호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요가 수업을 받고 나오는 길에 의문스러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야, 너는 명상 타임에 무슨 생각 하냐?” “무슨 생각을 해. 아무 생각도 안 하지.” “웃기지 마.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안 해?” “무슨 소리야? 그럼 너는 온종일 생각하며 살아?” “응. 나는 요가 시작하기 전에 오늘 명상 타임엔 뭔 생각을 할지 안건도 정해오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하는 건 제육볶음 생각, 쇼핑 앱으로 쇼핑할 생각, 랩 가사 생각, 라자냐와 라니뇨의 차이점 생각……” “그런 생각이 왜 드는 거야?” “나도 몰라. 모든 것이 그냥이야.” “그게 무슨 명상이냐? 넌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거잖아.”

나는 그제야 명상을 명상답게 해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상 리더가 “잡생각을 비웁니다”라고 말하면 실제로 잡생각을 비우고, “머릿속을 시원한 물로 헹궈내는 상상을 해봅니다”라고 말하면 딱 그 생각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태어난 이래 내 머릿속은 늘 쓰레기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한 무한의 생각들로 꽉 차 있었고, 나에게는 생각을 억누르거나 분류할 만큼의 통제력이 주어진 적도 없었다. 모든 생각이 뚜껑 없이 튀겨지는 팝콘처럼 아무렇게나 튀다가 불현듯 사라지기 일쑤였다. 나는 한시도 ADHD가 아닌 적이 없었기 때문에, ADHD가 아닌 남들의 머릿속이 어떠할는지는 그저 막연히 떠올려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MBTI N과 S의 차이 같기도 한데, N의 시점을 기가 막히게 표현을 한다는 데 감탄했다.

 

남의 실패담을 읽는데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지만, 작가님 역시 ‘그래 보이나요? 심각한 건 아닙니다’라며 쿨하게 웃어넘기시니까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님의 실패담 덕분에 이렇게 사소한 실패를 겪는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이래도 괜찮구나, 하고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내 인생이 너무 엉망 같다고 생각한다면 <오색 찬란 실패담>을 읽으며 실패도 찬란하게 아름다울 수 있고 소중할 수 있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느껴 보심이 어떤지. 그리고 잊지 마시라.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우는 존재라는걸. 실수는 무의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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