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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by Jaime Chung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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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나는 ‘신비롭다’라는 말을 사람에게 쓰지 않는다. 애초에 이 말은 여성이나 외국인(특히 동양인)을 타자화시키는 데 사용되 는느이기 때문이다. 남성 또는 서양인이 기준일 때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여성 또는 동양인, 또는 동양인 여성을 운운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너희들은 객관적으로 관찰될지언정 관찰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는 존재이며, 너희들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가 ‘신비한 동양의 매력’으로 호주에서 서양 남자들에게 어필할 거라는 지인의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임소연은 과학기술학 연구자로, 여성을 둘러싼 이 ‘신비’라는 불가해한 막을 떼어낸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과연 정말로 순수하게 여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지, 아니면 우리 사회와 문화가 가진 렌즈를 통해 오독하는지를 살펴본다.

예컨대, 우리는 수정(受精) 과정에서 정자는 열심히 헤엄쳐 제일 먼저 난자에게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난자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가장 빠른 정자를 받아들인다는 ‘과학적’ 설명을 많이 접해 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금까지 난자와 정자의 수정 과정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묘사되어 왔다. 정자는 자체적 추진력을 가진 능동적 존재로, 수정 과정은 이 능동적인 정자가 수동적인 난자를 포획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마치 적극적인 남성이 여성을 쟁취한다는 이야기 같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다.

거대한 정자 무리가 물결치듯 움직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때로는 벽에 부딪히고 때로는 끈끈한 점액 속에 허우적대면서. 무리의 일부가 난자 가까이 다가가 서성대면 난자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그중 하나를 끌어당긴다. 생명 탄생은 이렇게 까다로운 난자가 정자를 선택하며 시작되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과학의 이야기다. 2020년 6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난자는 정자들이 경쟁해 획득하는 목표물이 아니다. 난자는 화학 신호를 보내 스스로 선택한 정자를 끌어들인다. 정자가 난자의 여포액에 포함된 화학 물질에 반응해 이동하는 수동적 존재라면 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에 적합한 정자를 골라내는 능동적 존재다.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할 ‘경쟁적인 정자와 조신한 난자’ 이야기는 이미 1970년대부터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퇴출되기 시작했다. 실험실 밖 세상은 인간의 두 생식 세포에게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만 말이다.

 

저자는 ‘들어가며: 신비롭지 않은 모두를 위하여’에 이 책의 의도에 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여성의 관점에서 과학을 새롭게 바라보고, 과학의 관점에서 여성의 몸과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처럼 여성과 과학 양쪽에서 탐구하려면 개개인의 여성 과학자만이 아니라 과학의 안팎에 있는 이들이 함께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에 관심이 없었거나 심지어 싫어했어도 좋다. 반대로 당신이 과학을 잘 알고 좋아한다면, 현재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다면 더욱 좋다. 어느 쪽에 해당하든 조신하게 사회에서 기대하는 여성 또는 남성의 도리를 다하며 무언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거나,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 책의 완벽한 독자다. 나는 특히 과학과 불화를 겪었던 경험이 있는 이들, 그래서 과학책에는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는 독자들을 떠올리며 이 책을 썼다. 바로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롭고 공감했던 건, ‘제8장 비서 로봇은 여성이라는 착각’이었다. 이거야말로 과학이라는 순수 학문을 한다는 과학자들 자체가 얼마나 이 사회의 고정관념에 깊이 찌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 ‘비서형’ 로봇이나 인공 지능은 여성적인 특성(목소리나 외양)을 부여받는가? 도대체 왜 로봇을 인간 여성의 형태로 만들 때 그렇게 성애화된 모습으로 만드는가? 로봇이 해야 할 과제에 적절한 ‘성격’이 여성적인 것이라고 도대체 누가 그러는가? 다 인간이, 인간인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이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자는 과학자라는 이름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에버와 휴보의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로봇의 외형은 로봇이 수행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을 닮은 에버의 외형은 방문객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어린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에버의 임무를 반영한다. 애플의 시리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 개인 비서 인공지능 프로그램들 역시 처음에는 여성의 목소리로만 출시되었다.

여성으로 인식되는 로봇이 맡는 안내, 교육, 가사, 반려 등의 돌봄 노동은 흔히 사회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이라 여겨진다. 여성 로봇의 일은 인간을 대신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나 고도의 계산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과 달리,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교감하는 사회적 로봇(소셜 로봇)이 하는 일과 겹친다. 사회적 로봇은 인간 사용자의 의도나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적합한 행위를 학습·판단해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회적 로봇에 부여된 여성의 특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돌보는 일의 가치가 저평가되면서 이러한 일을 주로 여자가 맡게 되고, 로봇 개발에 그런 현실이 다시 반영되면서 사회적 로봇이 여성의 외양을 띠게 된 것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존재했던 전화 교환원 사례를 보자. 발신국과 착신국 사이에서 걸려 온 전화를 수동으로 교환해 주는 전화 교환원 일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여성이 하는 일로 재현된다. 마치 오늘날 콜센터 일자리 대다수를 여성이 맡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전화 산업이 도입된 초기에 이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전화기가 값싸게 보급되기 전까지 전화는 부유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전문 서비스였다. 전화 교환원의 주된 업무도 부유층의 요구에 대응해 전화기 사용과 관련한 전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여느 가정에서나 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기술을 설명하기보다 친절하게 응대할 인력이 더 필요해졌고, 그렇게 전화 교환원은 여성의 일이 되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상냥하다는 인식이 강했을뿐더러 여성에게는 임금을 적게 줘도 되는 배경이 있었다. 전화 교환원을 여성의 일로 짐작하는 것은 그 일이 원래부터 여성의 몫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이 그 일을 맡도록 한 사회문화적 전환의 결과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여성의 형상과 목소리를 가진 안내 로봇이 여성 안내원을 대신해 더 낮은 비용과 더 친절한 태도로 우리 인간을 맞이하고 있다.

돌봄이 여성의 일로 여겨지면 로봇공학자가 돌봄 로봇을 여성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 고정관념이 로봇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훨씬 매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 로봇의 문제는 로봇이 여성이라는 사실보다 그 로봇이 어떤 여성을 구현하는가에 있다. 로봇이 모방하는 여성은 대개 가상의 20대 여성이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성애화된 존재다. 반면 가상의 20대 남성을 재현하는 로봇은 전무하다. ‘딱 보니 남자’라고 할 만한 안드로이드 로봇에 흔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전문가 남성을 모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의 로봇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는 여성 안드로이드 로봇인 에리카 그리고 유를 섹스돌을 연상시키는 외관으로 개발했는데, 남성 로봇은 중년 남성인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친절한 여성 로봇 여성은 이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여성스러운 외모로 방문객을 맞이하며,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된 에버에게 사람들이 품는 기대는 사실상 여성이 오랫동안 강요받은 사회적 기대와 비슷하다. 영국 드몽포트대학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의 문화와 윤리를 연구하는 캐슬린 리처드슨 교수는 여성 로봇이 여성의 일을 대신하는 현상이 여성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여성에 대한 기대와 성 고정관념을 더욱 강화한다고 지적한다.61) 여성 비서 로봇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비서 업무를 여성의 일로 보는 현상은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비서, 간호사,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왜곡된 성 고정관념에 분노하고 대응 방법을 마련하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 로봇은 설계된 그대로의 목표를 수행하며 여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현실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여성은 심지어 로봇일지라도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벗어날 수가 없나 보다. 만약에 SF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로 인간이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정도로 완벽하게 지성을 갖추고 또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로봇이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그 로봇에 ‘여성성’이 입혀진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로봇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여성 혐오를 인지하고 환멸을 느낄까? ‘남성’으로 여겨지는 로봇들도 이를 인지할까? 그렇지만 자기네들이 혐오당하는 것은 아니니 모른 척할까, 아니면 공정성과 정의를 위해 그들도 이의를 제기할까? 쓰고 나니 SF 소설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내가 다음과 같은 (8장에 대한) 저자의 결론을 읽었을 때 얼마나 공감했을지 상상이 되실는지.

비서 로봇을 항상 젊고 상냥한 여성으로 만드는 공학은 사회에 해로울 뿐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흥미롭지 않다. 그것이 로봇공학자의 일이라면 인간–로봇 상호 작용이라는 분야는 차라리 불필요할지 모른다.

비서 로봇이 여성을 닮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로봇이 인간을 닮아야 한다는 전제까지 깨지고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기능에 최적화한 새로운 형태의 로봇을 만드는 작업은 안전하지도 쉽지도 않지만, 이런 도전이야말로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 진짜 혁신이다. 조신하지 않은 공학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과학은 우리 주변과 이 지상의 모든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들 한다. 과학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며, 또 과학에는 성별도, 국적도, 나이 등의 구별도 없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과학을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인간이 문제인 거다. 우리는 여성 혐오라는 렌즈를 즉각 폐기해야 한다. 이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오랫동안 여성의 적이었던 과학의 역사다. 여성의 신체를 왜곡하고 배제하며, 여성 학자의 존재를 지우는 지식 체계와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여성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과학의 비판자 역할을 자처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의 입장에 선 이들은 과학에 드리워진 객관성과 보편성, 가치중립성이라는 신비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과학에 조금 더 다가가 여성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또한 과학을 비롯해 ‘객관적’이어야 하는 많은 분야에서 성별에 따른 차이를 고려하지 못해 데이터가 불공정하게 수집되는 사례들을 다룬,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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