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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고우리 외, <요즘 사는 맛 2>

by Jaime Chung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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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고우리 외, <요즘 사는 맛 2>

 

 

얼마 전에 서평을 쓴, 김겨울 외 여러 작가들의 <요즘 사는 맛> 후속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배달의 민족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에 실린 작가들의 ‘요즘 사는 이야기’ 에세이를 모았다.

저번 서평에도 썼지만 나는 이런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책은 내가 모르는 작가들 중 내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는 재미로 읽는다. 이번에는 한 명 건졌다. 정문정 작가의 글이 흥미롭게 읽혔는데, 특히 ‘밥에 진심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정말 밥에 진심인 사람이 맞네요. 여럿이 밥을 먹고 있을 땐 전화받지 않는다, 아무리 짜증나도 일단 밥은 먹는다, 메뉴를 고를 땐 입장을 빨리 밝힌다, 같은 원칙을 소중히 여기니까요. 그러고 보니 저보다 열 배는 더 먹는 데 진심이던 교수님이 해준 말이 생각나요. 대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저는 눈물보다 빠르게 흐르는 콧물을 휴지로 틀어막으며 울고 있었어요.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 답답했겠지요. 원래 그 시기는 근거 없는 정신 승리와 근거 있는 현실 부정을 반복하다가 과도한 자기혐오로 괴로워하는 때잖아요. 교수님이 갑 티슈를 통째로 건네주시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 내용은 기억 안 나고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만 선명히 남아 있어요.

“일단 밥 먹으러 나가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봐. 너, 먹고 싶은 건 항시 있어야 한다. 먹고 싶은 게 있는 거 자체가 아직 살고 싶다는 거니까. 그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물론 내가 기존에 알고 좋아하던 작가님들도 빼먹을 수 없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쓰신 정지우 작가님은 이번 글에서 의외로 귀여운 면모를 보았고(내가 그분의 책에서 보았던 심각하고 무게 잡는 분위기가 이번 글에는 주제 덕분인지 덜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게 만든 정지음 작가님의 글은 역시나 내 기대 이상이었다! (참고로, 작가님들 글이 나오기 전에 짧게 작가 소개가 나오는데, 그걸 통해 정지음이 ‘정⃝⃝이 지음’의 줄임말이자 필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박적!

정지음 작가님은 빵을 좋아하는 친구가 만들어 준 빵을 먹으며 먹을 것을 만드는 데 얼마나 큰 사랑과 정성에 들어가는지 새삼 느끼고 감동과 존경심을 느낀 이야기, 식탐왕인 친구에게 먹을 것을 빼앗겨 억울한 이야기, 수영장에서 추로스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야기, 학교에 일찍 등교해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던 이야기, 그리고 한 달간 만두만 먹은 ‘올드보이 걸’ 이야기를 나눈다. 진짜 하나하나 다 주옥같이 웃긴데 개중에 각 에피소드에서 내가 제일 빵 터졌던 부분만 조금 보여 드리자면 이렇다.

오늘 그중에서도 빵에 제일 진심인 친구 ‘만두’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만두는 별명이 만두인데도 만두만 먹으면 속이 뒤집히는 허탈한 체질을 가진 아이였다. 그의 모순된 위장을 달래주는 건 오로지 빵. 어릴 때부터 빵을 너무 좋아해 온갖 ID에 ‘bbang’이라는 단어를 삽입할 정도였다.
그런 만두가 장성하여 직업인이 되었을 때는 어찌하여 제빵사가 아니냐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만두에게 묻자 “너도 1년의 반은 취해 살면서 술집 차릴 생각 없잖아”라는 현답이 따라왔다. 나는 한 방에 납득했다. 만드는 것과 즐기는 것, 파는 마음과 사는 마음, 생산하는 일과 소비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극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나, 꿀돼지를 넘어 야생 멧돼지 퀸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멧돼지 퀸에 맘모스 퀸까지 넘어선다면 궁극적으론 나도 식탐왕이 될지 몰랐다.

패턴이고 나발이고 처음엔 너무나 두려웠다. 나는 평소 ‘불의 요정’이라는 조롱에 시달릴 만큼 조리에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놀이 손님들은 추로스 맛이나 비주얼에 까다롭지 않았다. 탄 것을 주든 날 것을 주든 토끼 간을 본 용왕처럼 감격하며 우적우적 먹어치울 뿐이었다.
이럴 수가…! 우리 부모님도 내가 만든 음식을 꺼리는데 물의 왕국에선 백만 대중이 나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곧 내 파트타임 잡을 사랑하게 되었다. 평화가 깨지기 전까진 참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소박하던 파티는 날이 갈수록 화려해졌다. 공교롭게도 나 이외의 친구들은 모두 이쪽 계열(?) 귀족이었던 것이다. 애들은 제각기 마트, 정육점, 빵집 가문의 영애였고, 어느샌가 우리는 아침부터 등갈비나 삼겹살, 생망고, 케이크 같은 걸 양껏 먹어대고 있었다. 다 같이 힘을 준 날의 메뉴는 흡사 출장 뷔페 같았다.
광란의 조식 파티가 입소문을 타면서 파티원도 늘어갔다. 처음엔 우리 반 친구들, 나중에는 다른 반 친구들까지 집에서 음식을 집어 와 펼쳐놓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아빠 안주인 쥐포나 땅콩, 오징어 따위를 들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신설이라 매점이나 자판기가 없던 우리 학교에선 먹거리가 일종의 우정 화폐 역할을 했다. 친구에게 한입을 얻어먹으면 다음 날 나도 한입으로 갚는 것이 암묵적 규칙이자 친밀감의 표시였던 셈이다.

나는 아기 때부터 타고난 먹보였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보다 ‘더 줘’ ‘맛있다’는 말을 더 빨리 익힐 정도였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입맛이 없다는 감각 자체를 느껴본 적 없었다. 당시엔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욕부터 잃어버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 친구들은 대체로 깡마른 편이었고, 나는 작은 여자애들이 풍기는 특유의 연약미를 남몰래 동경했다.
나도 실은 툭 치면 풀썩 쓰러질 것 같은 여고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와 어깨라도 부딪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멀쩡한데 상대방만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바닥에 자빠진 이가 아파서 부들부들 떨 때에도 나는 딱히 아무렇지 않았다. 몇 번의 우연한 충돌로써 내가 유달리 튼튼하고 기골이 장대한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밥을 많이 먹어야만 하는 이유도 명확해졌다. 승용차보다는 덤프트럭이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나는 곧 커다랗고 통통한 소녀의 삶을 받아들였다. 1년 365일 24시간, 늘 먹성이 좋았으므로 과체중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읽고 나니까 역시 여러 작가들을 한번에 만나 볼 수 있어 좋았고, 나는 무엇보다 음식보다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걸 느꼈다. 애초에 음식이라는 게 백번 묘사를 읽는 것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직접 먹어 보아야 그 맛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니 나는 음식이나 레스토랑 리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맛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것도 있고. 하지만 음식을 소재로 하되 결국엔 그 음식에 얽힌 기억이나 이야기가 주가 되는 글이라면 나는 언제나 환영이다. 음식은 육신을 채워 주지만 글은 마음을 채워 주니까. 사람은 빵만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요즘 사는 맛> 1권과 2권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기회에 아예 <주간 배짱이>도 구독 신청했다(구독 신청은 요기에서 할 수 있고, 지난 뉴스레터는 여기에서 보실 수 있다). 운이 좋아 바로 다음 날(목요일)에 첫 뉴스레터를 받게 되었다. 이제 매주 새로운 작가님들의 글을 받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더 많은 작가님들을 만나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여러분도 저처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일을 좋아하신다면 이 책뿐 아니라 뉴스레터도 권할 만하다.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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