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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폴 블룸, <최선의 고통>

by Jaime Chung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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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폴 블룸, <최선의 고통>

 

 

사람들은 자의로 고통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쫄보라서 공포 영화를 보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공포 영화가 무서울수록 더 짜릿하고 재미있다고들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여기 해당할 텐데) 매운 음식을 즐긴다. 사실 맵다는 건 맛이라기보다는 통각, 그러니까 고통에 가까운데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겨운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하고,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오르며, 전쟁터에 자원입대하고, 타인을 돕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은 전부 마조히스트인 걸까?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이자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폴 블룸은 인간이 ‘고통’과 ‘쾌락’ 사이 최적의 지점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여러분께 보여 드리기 위해 서문의 문단 몇 군데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우리가 이런 경험에서 쾌락을 얻는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적당한 고통은 이후에 더 나은 쾌락을 얻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즉, 더 큰 미래의 보상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고통은 불안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심지어 자아를 초월하도록 도와준다. 사회적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고난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얼마나 강인한지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노력, 고생, 난관은 숙달과 몰입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흥미로우면서도 구체적인 의문을 다룬다. 왜 어떤 사람들은 호러 영화를 좋아할까? 왜 어떤 청소년들은 자해를 일삼을까? BSDM의 매력은 무엇일까? 비선택적 고난(가령 자녀의 죽음)은 아픔을 극복하는 능력을 키워줄까? 아이를 갖는 일은 삶의 의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또한 이 책은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점을 변호한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타고난 쾌락주의자로 오직 쾌락만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욕구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설득하려 한다. 사실 우리는 보다 깊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주장을 하려는 걸까? 이 책은 서로 연관되는 세 가지 생각을 변호한다. 첫째, 특정한 유형의 선택적 고난(고통, 공포, 슬픔을 포함하는)은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둘째, 잘 살아낸 삶을 쾌락적 삶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셋째, 고생과 난관을 거쳐야 하는 고난은 고귀한 목적을 이루는 한편 완전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이나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왜 그럴까요? A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A 이론은 이러이러한 점을 잘 설명하지만, 요러요러한 면은 대답하기 어렵죠. 그래서 B 학파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설득력이 있지만, 저러저러한 것 또한 인간에게 중요한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C라는 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식이다. 어떤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으로 모든 걸 완벽히 설명할 수 없기에 다양한 주장과 이론을 모두 살펴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이 모든 걸 다 생각을 해 놓고 책을 썼을까 하고 감탄했다. 어떠어떠한 이론들을 다 살펴보겠다는 뼈대를 대략적으로 정해 놓아야 이렇게 탄탄한 구조의 책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 가지 논의로 시작한 글이 또 다른 논의를 불러오는 식으로 계속되다 보니 마치 <천일야화> 속 셰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호기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비교적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논픽션이고 다소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나름대로의 유머가 담겨 있어 절대 지루하지 않다. 점잖고 학문적인 유머라고 할까? 예시를 보여 드리자면 이런 느낌이다(아래 인용문들에서 굵은 글씨로 내가 강조한 부분이 내가 생각하는 유머 포인트다.)

내가 생각하는 근친상간 관련 검색어가 많은 이유는 약간 다르다. 상상 속의 쾌락은 안전하다. 그러나 안전한 것은 지루할 위험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사무실로 들어와 내 앞에서 권총을 흔든다면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군가가 총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 무덤덤하다. 우리는 그 모습에 익숙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심히 폭력적일 수 있다. 포르노의 경우에도 같은 습관화가 일어난다. 십 대 동정남들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 입술에 키스하면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르노를 너무 많이 본 나머지 극단적인 묘사가 담긴 것들을 즐겨 찾는다. 그 내용은 내가 가족 친화적인 책이라고 여기고 싶은 이 책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픽션과 현실 세계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복수를 바라는 욕구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과 가족에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에 가해자가 고통받기를 바라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잘못인 경우도 많다. 피에 덜 굶주린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욕구를 느낀다. 지금 우리 예일대 연구실에서 일하는 한 연구자는 누가 죽거나 고통받기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에 내게 특정 인물들이 까다로운 질환, 특히 미약한 요실금으로 고생하는 상상을 즐겼다고 고백했다.

(…) 1890년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의문을 제기했다.

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딱딱한 마루가 아니라 푹신한 침대에 누울까? 왜 추운 날 난로 주위에 앉을까? 왜 방에 있을 때 99퍼센트의 경우 얼굴을 벽이 아닌 중앙으로 향할까? 왜 딱딱한 음식과 구정물보다 양고기 등심과 샴페인을 선호할까?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지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자연스러운 것을 이상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이행하려면 버클리(Berkeley)가 말하는 ‘학문으로 방탕해진 정신’이 필요하다. 이런 정신은 심지어 인간의 모든 본능적인 행위가 이뤄지는 이유를 따진다. 형이상학자만 해도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왜 우리는 기쁠 때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웃을까? 왜 한 명의 친구에게 말할 때처럼 군중 앞에서 말하지 못할까?

이제 학문으로 정신이 방탕해진 형이상학자가 되어 보자. 지금부터 우리는 이상한 것들도 돌아가기 전에, 양고기 등심을 씹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진부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위에 인용한 세 문단 중에서 특히 ‘학문으로 정신이 방탕해진 형이상학자’ 드립은 올해 내가 논픽션 서적에서 본 최고의 학문적 드립상(賞)을 드리고 싶을 정도다. 내 안에선 이미 마이붐이 된 드립. 어쨌거나 이렇게 유머가 은은하게 배어 있어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꼭지 중 하나는 우리가 ‘혐오성 픽션’(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고난이나 불행 등 부정적 일이 일어나는 내용의 픽션. 예컨대 호러 영화)에 즐기는 이유를 ‘놀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꼭지였다. 싸움을 잘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고, 싸움을 잘하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을 경험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싸움을 잘하지 못할 때 무턱대고 싸움을 벌였다간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 놀이’를 하는 것이다. 레슬링이나 유도 등의 ‘스파링’을 떠올려 보시라. 다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규칙을 세워 놓거나 글러브, 헬멧, 마우스가드 같은 도구들의 도움을 받아 싸움을 연습하면 훨씬 안전하다. 우리가 혐오성 픽션을 즐기는 것도, 곤란한 일과 고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 놓고 싶기 때문이다.

싸움 놀이는 실제라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자신을 밀어넣는다. 마찬가지로 상상 놀이는 실제로 경험하면 불쾌하거나 때로 끔찍할 수도 있는 상황으로 자신을 데려간다. “우리는 실제 공포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가상의 공포를 꾸며낸다”는 스티븐 킹의 말은 그 요지를 잘 정리한다. 이는 ‘강인한 정신이 끔찍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극과 공포에 이끌리는 이유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창의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가령 낯선 사람에게 공격당하거나, 친구에게 배신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시나리오 말이다.

물론, 우리가 접하는 픽션이 반드시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일들은 아니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절대 반지를 모르도르로 가져갈 일은 없을 것이고,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서 우리가 좀비와 싸워야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 말마따나 “그보다 좀비 영화는 ‘사회가 붕괴하고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매우 밀접한 걱정을 비현실적인 무대에서 다룬다(좀비 영화에서 진짜 위험한 대상은 거의 예외 없이 좀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다).” 권투선수들은 훈련할 때 스피드 백을 치면서 연습하는데 그게 링에서 하는 진짜 권투랑은 똑같지 않다 해도 그 훈련이 여전히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꼭 모르도르에 가거나 좀비 사태를 맞이할 리는 없다고 해도, 그런 픽션을 접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종류의 고난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연습이 된다. 나는 스토리텔링이나 작법에 관한 책들도 여럿 읽었지만 이런 관점은 처음 접해서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이런 관점으로 픽션을 이해할 수도 있구나!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책은 정말 기가 막히다. ‘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짓을 자처하나?’라는 물음에 답을 찾고 싶을 때, 교양 심리학에서 조금 더 나아가 철학에 가까운 내용을 맛보고 싶을 때, 논픽션도 유쾌하고 재미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이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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