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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현이랑, <레모네이드 할머니>

by Jaime Chung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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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현이랑, <레모네이드 할머니>

 

 

⚠️ 아래 서평은 현이랑의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이런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렇게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책 겉표지에 “가진 건 돈뿐인 성격 파탄 치매 탐정 등장! 완벽한 고급 요양 병원의 비리를 파헤친다!”라고 되어 있는데, 줄거리를 정말 간략하게 잘 요약했다.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이렇다. ‘도란마을’이라고 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한 고급 요양 병원에서 지내는 한 괴팍한 할머니가 있다. 치매가 아직까지는 가벼운 편이라 다른 노인들과는 다르게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해서 요양소 노인들이나 직원들 중에 친구랄 사람도 없다. 이 할머니에게 즐거움이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선베드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것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도란마을의 쓰레기장에서 아기의 시체가 발견된다. 할머니는 조용하고 심신한 도란마을에서의 삶에 지루해하던 차에 이 사건에 흥미를 가지고 파헤쳐 보기로 한다. 한편, 요양 병원의 의사들 중 한 명인 서이수 씨의 아들 ‘꼬마’는 엄마를 따라 도란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같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몰려와 자신을 괴롭히지 않도록, 아이들을 싫어하고 또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을 괴팍한 레모네이드 할머니 곁에 붙어 다니기로 한다.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처음엔 이 꼬마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잘 보니 이 녀석, 어려도 눈치 하나는 빠르다. 그래서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이 꼬마를 조수 삼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나서기 시작하는데…

일단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진 건 돈뿐인 성격 파탄’ 할머니라는 설정이 마음에 쏙 들었고,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BBC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뺨치는 성격 파탄자 탐정의 등장인가?’ 싶어서 설렜고, 바로 다운 받아서 (리디 셀렉트에서 이용 가능) 읽어 보았다. 읽다 보니까 정말로 이런 여성 등장인물은 주인공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엑스트라로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라는 존재는 거의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니까 말이다. 손주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고 한 푼이라도 더 용돈을 주고 싶어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할머니 마음 아닌가. 그런데 이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아이들을 싫어하고, 자식도 없다고 한다. 책 중후반에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할머니는 한국 전쟁 시절 무려 군인이었고, 그 이후 자수성가해서 ‘천 회장’이 될 정도로 재산도 꽤 모았다. 도란마을을 운영하는 원장도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르기 꺼리는데, 이 도란마을이 지어진 부지가 바로 레모네이드 할머니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이 요양 병원에서 지낼 수 있게 받아들여 주는 것이 원장에게 땅을 팔아넘긴 조건이었다. 회장답게 전담 비서도 있고, 자기 일을 맡아 주는 변호사도 따로 있다. 와, 이 할머니 완전 멋진데! 나는 이 할머니에게 반해서 소설을 홀린 듯이 읽었다.

이 소설의 매력은, 보기 드문 파격적인 설정의 주인공 외에도, 시점을 참 잘 이용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맨 첫 장과 마지막 장은 흔히 소설에서 볼 수 있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도란마을을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소개한다. 동시에 이 전지적인 화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별난 괴짜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아주 교묘한 술수이다. 왜냐하면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서술되며 진행될수록, 진짜로 수상하고 못 믿을 존재는 할머니가 아니라 이 도란마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도란마을의 원장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아 보이지만 사실 마약을 거래하는 ‘꾼’이었다! 와, 세상에! 이런 반전이라니! 반전의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첫 장을 그렇게 순진한 척하는 3인칭 전지적 작가로 썼구나 하는 걸 깨닫자 정말 작가의 솜씨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런데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요양 병원의 원장이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이었다는 반전 자체는 좋지만 마약 밀매와 십 대의 임신 같은 소재는 좀 막장스럽지 않나 싶다. 뭐, 이제는 우리나라도 마약 청정 국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거 하나만 해도 강렬한 소재가 될 텐데 십 대의 임신 문제까지 덧붙여서 그 죽은 아기를 버린 게 알고 보니 원장의 딸이었다, 하는 반전은 좀 너무 과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또 후반에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병이 갑자기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게 어색했다. 치매 증세가 심해지는 건 그래도 천천히 일어나는 일일 텐데 분명 시간상 같은 날을 묘사하는데 그날 후반이 되면서 갑자기 ‘꼬마’의 얼굴도 못 알아본다거나, 자기 핸드폰을 어디 놨었는지 까먹는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좀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물론 정해진 시간 내에 사건을 진행시켜야 하니까 압축적으로 보여 줘야 해서 그런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 이전에 ‘전조 증상’을 보여 준다면 좋았겠다. 치매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처음엔 그냥 ‘건망증이 심해지셨네’ 정도로 생각하는 일화가 일어나다가 어느 순간 치매를 의심하게 하는 좀 더 중한 증상을 보이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후반에 꼬마를 더 성장하며 활약시키기 위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야 하는 것도 알겠는데 역시나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할머니 팔목에 낀 팔찌가 맥박을 탐지해 일정 시간 동안 맥박이 없으면 구조 신호를 보낸다고 하길래 ‘아, 팔찌를 잠시 빼놨거나 뭘 어떤 수를 써서 할머니가 사망하신 척한 거구나’라고 추리했는데 아니었어… 정말로 돌아가시다니! 흑흑, 이건 너무하다고요!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만족스러운 독서였고, 이 정도면 정말 재밌고 읽을 만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2021년 9월에 이미 영상화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하는데 영화인지 TV 드라마인지,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너무 기대된다. 이렇게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물을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니! 미디어에서 노인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은 매우 한정적인데 이건 그런 틀을 벗어나니 배우들도 너무 설레고 앞다투어 연기하고 싶을 것 같다. 영상화된 <레모네이드 할머니>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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