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Renfield(렌필드)>(2023)
⚠️ 아래 영화 후기는 <Renfield(렌필드)>(2023)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크리스 맥케이(Chris McKay)
렌필드(니콜라스 홀트 분)는 드라큘라(니콜라스 케이지 분)의 부하로서, 드라큘라의 힘을 조금 나눠받고 그에게 먹잇감을 조달하는 일을 한다. 드라큘라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던 성직자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드라큘라는 힘이 약해져서 도망쳐 온 새 도시, 뉴올리언즈에서 숨어 살며 힘을 키워야 하는 처지다. 렌필드는 관계 속에서 학대받는 이들의 자조 그룹(support group)에 참여해,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두었다가 그들을 학대하는 이들을 찾아가 죽이고, 그 학대범을 드라큘라에게 먹잇감으로 가져다 바친다. 그런데 어느 날, 뉴올리언즈를 꽉 잡고 있는 범죄 조직 가문 로보(Lobo)의 젊은 우두머리인 테드 로보(벤 슈워츠 분)는 렌필드가 자신의 마약을 훔치려던 한 학대범을 죽이는 모습을 보게 되고, 겁에 질려 달아나다가 레베카(아콰피나 분)라는 열혈 경찰에게 붙잡히고 만다. 경찰 내부까지 손을 뻗친 로보 가문의 힘 때문에 그는 쉽게 풀려나지만, 레베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테드 로보를 어떻게든 다시 잡아넣을 생각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한 레스토랑에서 레베카는 테드 로보의 협박을 받게 되고, 드라큘라의 명을 받아 ‘순수한’ 먹잇감을 찾으러 마침 같은 레스토랑에 온 렌필드는 테드 로보의 수하들을 처치한다. 얼떨결에 레베카와 시민들을 지킨 렌필드는 영웅이 되고, 자신에게 감사하는 이 열혈 경찰에게 반하고 마는데…
니콜라스 홀트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하는 뱀파이어 영화가 개봉할 거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건 봐야 한다!’ 싶었는데, 드디어 봤다. 한국보다 한 달쯤 늦은 (왜 호주는 영화 개봉일이 다른 나라들보다 느린가에 관한 이 포스트 참고) 이 시점에! 늦게라도 보게 해 주셔서 아주 고오맙습니다 호주 배급사 놈들아 😡
시놉시스를 약간 정리가 안 되게 쓴 것 같은데, 아주 간단하게 이 영화를 요약하자면 ‘렌필드의 자존감 되찾기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1800년경에 드라큘라의 꼬임에 넘어가 아내와 딸을 버리고 드라큘라를 위해 일해 온 렌필드는, 자존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카프카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이다.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그를 정서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학대해 온 그의 상사 드라큘라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학습된 무기력감을 느낀다. 하긴, 일단 인간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드라큘라에 대적하는 게 일단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표면적으로는 드라큘라의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관계 속에서 학대받는 이들의 자조 그룹에 들어간 것 자체가 자신과 드라큘라의 관계가 아주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다가 우연히 레베카와 시민을 구하며 영웅 대접을 받게 되고, 레베카의 순수하고 강인한 영혼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을 것이다.
나약함과 강인함 같은 성격적 특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이런 남-녀 주인공 조합은 처음이라 아주 신선했다. 남자 쪽이 자존감 바닥이고 여자 쪽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인하며 올곧아서 남자에게 영감을 주고 남자의 존경을 받는 그런 관계라니! 강인한 여자 캐릭터를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수요는 늘 있어 왔으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렇게 대놓고 떠먹여 주시면 제가 너무 감사하죠. 게다가 그런 여성 인물이 동양계이기까지 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심지어 아콰피나의 캐릭터 레베카는 언니인지 동생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여자 형제(케이트; 카미유 첸 분)가 있고, 그도 FBI로서 아버지를 죽인 로보 가문을 일망타진하려 한다. 둘이 처음으로 같이 등장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동양계 여자 배우가 둘이나? 세상에 감사합니다!’ 하고 내적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할리우드 일 잘하네!
어떤 이들은 드라큘라 역의 니콜라스 케이지 분량이 적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엔 딱 적당한 것 같다. 너무 적다고 하기엔 그의 비중이 상당하다. 렌필드를 굴리는 게 드라큘라니까, 드라큘라가 없으면 이야기가 안 되긴 하지만 그가 주인공은 아니니까 딱 그 정도가 맞는 것 같다(니콜라스 케이지가 유명 배우이긴 하고 자신이 주연이 아닌 영화는 애초에 거절한다고 하지만, 이건 드라큘라는 전설적 인물 역이기도 하고 본인이 드라큘라의 팬이어서 승낙했다고). 이 영화는 제목부터 렌필드라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렌필드>라고요! 렌필드가 폭력적이고 학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이 영화의 핵심이자 주요 사건인 건데, 드라큘라가 너무 많이 나오면 안 되지 않을까. 나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각본 자체에서 드라큘라 캐릭터가 원탑일 수가 없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어쨌거나, 심약한 남자 주인공과 열혈 경찰인 멋진 여자 주인공의 합이 너무너무 좋았고, 영화 안에 여기저기 배치된 유머도 마음에 들었다. 렌필드가 적의 양 팔을 뚝 떼어서 피가 솟는 등 다소 고어한 장면이 있긴 한데, 아무렴 뱀파이어 영화인데 피가 안 나오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이 정도는 이해 가능하다. 피 하나 안 흘리는 뱀파이어 영화는 만들 수 없을 테고, 사실 그렇게까지 막 엄청 징그러운 건 아니다. 너무 과장되어서 비현실적인 게 확실히 느껴지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와, 너무 아프겠다’ 싶은 그런 느낌을 아득히 넘어서기 때문에. 그래도 몸통에서 팔을 뜯거나 눈을 찌르거나 하는 걸 전혀 못 보신다면 다소 조심하실 필요가 있겠다. 나도 잔인한 건 못 보지만 니콜라스 홀트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했다. 그의 얼굴은 단연코 그럴 가치가 있다. 기존 뱀파이어 영화들의 팬이라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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