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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Where’d You Go, Bernadette(어디 갔어, 버나뎃)>

by Jaime Chung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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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Where’d You Go, Bernadette(어디 갔어, 버나뎃)>

 

 

⚠️ 아래 영화 후기는 <Where’d You Go(어디 갔어, 버나뎃)>(2019)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

 

버나뎃(케이트 블란쳇 분)은 어렵게 얻은 딸 비(엠마 넬슨 분)를 아주 끔찍히 아끼는 사랑이 넘치는 엄마다. 그녀에게 단점이 있다면 딸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 동네 엄마들, 특히 옆집에 사는 오드리(크리스틴 위그 분)가 이래저래 말을 붙여도 쌀쌀맞게 넘긴다. 버나뎃이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느냐면, 사람들과 접촉하기 싫어서 만쥴라라는 이름의 인도인 비서와 오직 이메일로만 연락할 정도이다. 이렇게 보면 비사교적이고 신경질적인 이상한 아줌마 같지만 사실 버나뎃은 건축계의 천재로 불리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몇 년 전에 모종의 일로 실의에 빠져 건축 일을 그만두고 지금의 동네로 이사 와서 조용히 살고 있다. 하지만 비가 엄마아빠랑 같이 남극 여행을 가자고 하는 바람에 그녀의 조용하고 안락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마리아 셈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동명 소설은 나도 읽어 보고 싶었지만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아 읽지 못했다. 나중에 종이책을 사서 읽어야 할 듯. 어쨌거나 원작 소설은 한 쪽도 읽어 보지 못했기에 그걸 얼마나 잘 살렸는지는 내가 평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주목했던 건, 여성과 남성의 ‘비사교성’에 대한 태도의 차이였다. 극 중 버나뎃은 천재이다. 건축계의 스티브 잡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남들의 생각을 훨씬 앞서간 비전으로 ‘천재들의 상’이라 불리는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을 최연소로 수상했다는 설정인데, 자신이 몇 년간 애써서 작업한 건축물이 시시한 연예인 나부랭이에게 매입돼 주차장으로 쓰이는 걸 보고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 건축 일에 손을 놓은 걸로 그려진다. 그래서 딸과 남편 이외의 사람은 거의 만나지 않고 사는데 옆집에 사는 오드리는 자꾸 버나뎃을 알은체하고, 그래서 버나뎃은 그녀를 신경질적으로 피한다. 오드리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러 오는 모습을 보고 차를 급히 몰아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한다. 또한 비가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좋은 성적을 유지한 데 따른 보상으로 남극 여행을 가자고 하니까 ‘그럼 한 달간 모르는 사람들이랑 얼굴 맞대고 지내야 하는데 그건 너무 싫다’며 어떻게 하면 이 여행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화가 버나뎃이 얼마나 비사교적인지를 보여 준다.

물론 좋은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인물이 변화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화 속 시간이 흐를수록 버나뎃은 점점 타인들과 접촉이 많아지고, 점차 ‘괴팍한 천재’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시 사교성을 되찾으며 자신이 내려 놓고 있었던 재능, 즉 건축에 대한 열정도 다시 불태운다. 인간이란 원래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시 다른 이들과 정상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건 아주 긍정적이다. 하지만 버나뎃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 괴팍하고 비사교적인 모습이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받았다는 사실은 심지어 ‘천재’라도 여성은 자신의 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버나뎃의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 분)은 정신의학과 자넬 커츠 박사(주디 그리어 분)에게 버나뎃은 불안 증세와 불면증 때문에 다양한 처방 약을 복용한다고 털어놓고, 이에 박사는 그녀에게 정신 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비하면 버나뎃이 만쥴라라는 인도 비서에게 그들의 모든 개인 정보와 신용 카드 정보, 비밀 번호를 털어놓은 것, 그래서 만쥴라가 사실은 러시아 범죄 조직의 위장 간판일 뿐이라는 사실은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결국 FBI가 이 신원 도용을 저지르려는 범죄자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그래도 엘진은 아내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핵심은 여전히 버나뎃의 극도의 비사회성이나 신경질적인 성격이다.

 

<어디 갔어, 버나뎃> 원작 소설 표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버나뎃 정도의 천재성과 비사회성을 가진 허구의 인물들을 두엇 떠올릴 수 있었다. 예컨대 자폐 스펙트럼 상에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되는, 영화 <Don’t Look Up(돈 룩 업)>(2021)의 괴짜 천재 피터 이셔웰(마크 라이런스 분)이나 눈치 없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미드 <The Big Bang Theory(빅 백 이론)>(2007-2019)의 셸든 쿠퍼(짐 파슨스 분), 아니면 본인 입으로도 ‘고기능성 소시오패스’라 말하는 영드 <Sherlock(셜록)>(2010-2017)의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이들 모두 사회성과 눈치는 바닥을 기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은 정신과적 상담이나 치료를 강요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천재니까 오만하거나 비사회적일 수 있다고 용납받고, 그것이 그들의 천재성을 보여 주는 증거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이들과 <어디 갔어, 버나뎃>이 장르가 다르다고 해도, 버나뎃이 남성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까지 정신과 의사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의 이야기와 주제만 놓고 보면 그건 문제가 없다. 이 영화가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루는 것도, 버나뎃이 삶의 열정이던 예술(건축도 예술이니까)을 놓고 있다가 모종의 계기를 통해 다시 예술을 향한 열정이 불타올라 삶의 목표를 되찾는 것도 다 좋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 이야기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뎃이 여성이라 ‘비사회성’이 정신과적 문제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오해는 마시라. 원작자인 마리아 셈플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이 영화에서 그만큼 현대 사회에 여성에게 불리한 편견이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왜 그런 사소한 데에 집착하느냐고 하겠지만 어쩌랴. 백 명이 같은 영화를 본다고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냥 이 영화에서 그런 데 꽂혔을 뿐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볼만하고 괜찮은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은 정말 까딱했다가는 주인공을 미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수도 있는, 만쥴라를 상대로 하는 ‘혼잣말 중얼중얼’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연기해 낸다.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 했다면 혼자 어설프게 독백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보기 힘들었을 텐데, 케이트가 하니까 정말 고독한 천재가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 후반에 다시 건축에 대한 열정의 불씨가 되살아난 버나뎃이 남극 기지를 가기 위해 미친 짓도 감행하고 관계자에게 간절하게 부탁할 때는 정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이제 천재가 자기 작업에 몰입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케이트의 연기와 미모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언젠가는 원작 소설도 구해서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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