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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보영, 김성일, 김인정, 김철곤, 전삼혜, <엔딩 보게 해 주세요>

by Jaime Chung 202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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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보영, 김성일, 김인정, 김철곤, 전삼혜, <엔딩 보게 해 주세요>

 

 

⚠️ 아래 책 후기는 김보영, 김성일, 김인정, 김철곤, 전삼혜의 <엔딩 보게 해 주세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을 개발해 본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 쓴 게임 단편 소설 모음집.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여러 종류의 게임 형태를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소설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웠고, 나머지 네 편은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편씩 조금씩 더 자세히 얘기해 본다면, 일단 김보영 작가의 <저예산 프로젝트>는 저예산으로 게임을 만드는데, 이 소설 속 게임은 AR(Augmented Reality), 즉 증강현실을 사용한다. 포켓몬고를 생각하면 쉽다. 허공에서 게임 속 인물이 등장해 움직이고, 소리가 들리며, 플레이어는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행동할 수 있다. 나는 특별히 이 작품이랑 이 다음에 나오는 작품에서 게임을 만드는 철학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여자가 주인공인 게임은 여성향일까, 남성향일까? 게임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하는 대상인가? 누구에게 어느 쪽이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정석은 두 성별을 다 내놓는 것이다. 초창기 게임들은 모두 이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한 명밖에 구현할 수 없다면 어느 성별이어야 하나?

이세연은 게임 시나리오는 늘 전 인류를 독자로 가정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구닥다리가 된 게임이 10년이나 20년 뒤, 이제 막 증강현실이 보급되기 시작한 어느 작은 나라의 무슨 종교를 가진 어떤 성별의 아이가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게임은 성별과 인종과 국적을 초월하여 편견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며, 게임 주인공은 고루하다고 해도 좋을 법한 무난하고 보편적인 윤리관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팀장도 사장도 투자자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 혼자 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더해서 시나리오 작가가 그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 게임은 어느 이상 팔리지도 않고 수출도 되지 않지만 어떤 팀장도 사장도 투자자도 그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한가한 소리다. 게임이 그런 종류의 무엇이 아닌 지는 오래되었다. 이제 게임은 헐벗은 여자 그림 하나 얻겠다고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부어대는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극소수의 VIP를 대상으로 하는 질척한 사업이 되었는걸.

 

넥슨 사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이 인용문을 읽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마지막엔 감동도 쪼끔 있는 좋은 단편 소설이었다.

두 번째는 전삼혜 작가의 <당신이 나의 히어로>. 판타지풍 RPG를 리메이크하는데 전체 감각, 즉 오감을 다 이용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게임으로 만드는 게임 회사 이야기이다. 리메이크 버전을 만들기 위해 기존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최종 챕터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도 하차하게 된 게임 속 캐릭터 ‘미스트리스’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플레이 로그까지 만든 한 마이너한 플레이어 ‘젤소미나’를 기리는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쓸쓸하고 아쉬운데 미스트리스를 향한 젤소미나의 사랑이 절절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건 알겠는데, 소설 끝마무리가 약간 부족하다 해야 할까, 뒷심이 모자라다 해야 할까. ‘엥? 여기서 끝이야?’ 싶다. 뭔가 조금 더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게 아쉬웠다.

그다음은 김성일 작가의 <성전사 마리드의 슬픔>으로, TRPG,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직접 캐릭터가 되어 선택을 하고 게임 마스터가 진행하는 테이블 게임 형태로 진행된다. 정확히는, 인간 플레이어들과 마스터가 있고, 그런 인간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정한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 속 캐릭터들이 있어서, 후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접근은 참 신선하고 아이디어도 좋았는데 역시나 결말이 조금 아쉽다. 단순히 ‘퀘스트’라고 할 만한 사건에 서만족스럽게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고 나서 게임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진행될 수 있었는데 그냥 서둘러 끝내 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퀘스트를 성공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캐릭터는 자기들만의 생각과 감정이 있고, 플레이어가 내린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이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퀘스트가 끝나고 플레이어들이 밥 먹으러 가면 이런 조재들의 세계도 끝이 나나?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들은 게임을 끝내고 가 버려도 캐릭터들은 남아서 고뇌한다든가 슬퍼한다든가, 아니면 자기네들끼리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플레이어들이 가 버리는 데서 이야기도 끝이 나다니. 플레이어가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답지 않은 말투로 대사를 하는 걸 보여 주는 장면, 즉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캐릭터는 그보다 더욱 풍부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줘 놓고, 플레이어들이 사라졌다고 이 캐릭터들의 세계,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서술이 끝나야 하나. 조금 더 다듬으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네 번째는 김인정 작가의 <앱솔루트 퀘스트>인데 이게 제일 모호하다. 흔한 판타지풍 RPG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배경인데, 소설 속 등장인물들 이름이 김고래, 박개굴, 윤잉어 등인 건 신선하고 귀엽고 재미있다. 그런데 주인공 김고래의 꿈에 등장하는 나비 언니의 정체는 도대체 뭔지, 둘이 무슨 관계이길래 고래의 꿈에 이 언니가 등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래가 나비를 선배로서 따르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혹시 언니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든가…? 뭔가 떡밥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안 풀린 것 같다. 게다가 이 단편 소설은 게임을 만드는 과정, 정확히는 게임 스토리를 (이런저런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 말이 되게 이어가기 위해 끝없는 회의와 수정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무척 ‘리얼’하지만, 그래서 그거 말고 이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김철곤 작가의 <즉위식>은 정말 ‘환상’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주인공네 회사가 만든 게임은 전설적인 존재이나, 이제는 ‘민속촌’으로 불릴 정도로 그 ‘전설’은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느 날, 존재했는지도 모를 한 왕국의 왕자(이제 곧 왕으로 즉위할 예정)가 ‘그 게임 속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싶다’라며, 모바일 버전으로 게임을 다시 만들어 최소한 즉위식 날에는 그 나라 국민들이 접속해 (게임 속) 즉위식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돈이 궁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주인공은 자신 주위에 있는 능력자들을 모아 ‘드림팀’을 구성해 이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아, 그 즉위식까지의 기간이 한 달이라고 내가 얘기했던가? 어쨌든 말이 안 되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야기에서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진짜 큰 위기가 찾아오는데, ‘와,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하고 두근두근 설레며 보게 되기는커녕, 그렇게까지 긴장감이 없었다. 분명 큰 위기인 것 같은데 ‘음, 이런 일이 생겼네(어떻게 해결하는지 내 알 바 아님)’ 하는 마음으로 무심하게 읽었다. 위기면 위기답게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들어 줘야지! 갑자기 무슨 왕국의 왕자가 등장하고 능력자 사천왕이 모여서 일을 해결한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고, 그냥 이렇게 긴장감 없는 글이 문제다.

그래도 다섯 편 중에서 한 편이 마음에 들었으니 이 정도면 20%의 성공률이다. 주식 수익률보다 낫다(내가 주식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진짜로 게임을 만들어 본 작가들이 쓰는 게임 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이 단편집을 한번 살펴보시라. 책보다 게임이 더 친근하고 익숙한 이들이 봐도 부담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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