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지원,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이 포스트에서 추천한 적 있는 뉴스레터 ‘인스피아’를 발행하는 김스피(김지원) 씨가 쓴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책 읽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읽으면 많이 공감할 만한 책이라 하겠다.
요즘은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들 한다. 동시에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많아 떨어졌다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예전과 비교해 사람들이 텍스트, 글을 읽는 비율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전만큼 사람들이 ‘종이책’을 읽지 않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글을 알아보고 좋아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하는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이제 절반 이상의 성인이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독서율은 거의 수십 년째 하락 일로를 밟고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온라인 텍스트 읽기 시간’이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의 수는 줄지만, 전자책 소비와 온라인 텍스트 읽기 시간은 계속 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기사 요약과 댓글·원고지 수십 매 분량의 나무위키 문서·메신저 대화 기록·각종 게시물·유튜브 댓글 등은 모두 텍스트다.
게다가 불과 백여 년 전인 1930년 기준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무려 80퍼센트에 달했다.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16일 자 기사에서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바삐 이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날까.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 바삐 띄어 볼까”라며 ‘글장님 없애기(문맹 퇴치) 운동’을 선언했다. 이렇게 보면 이토록 많은 대중이 일상적으로 글을 읽게 된 것이 유사 이래 처음인 것이다.
여러 텍스트 가운데 ‘기사’도 마찬가지다. 종이신문 구독자 수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기사를 여러 사람이 실시간으로 소비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일상적으로 접하는 유튜브 교양 콘텐츠나 인터뷰 등을 넓은 의미의 텍스트로 포함한다면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글을 읽는다. 즉 사람들은 읽지 않는 것이 아니고, 덜 읽는 것도 아니다. 종이신문이나 종이책이라는 19-20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매체를 멀리하게 되었을 뿐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텍스트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떤가. 사람들은 텍스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텍스트가 (영상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나쁜 텍스트’를 싫어하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와 자극적인 표현, 혐오와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글, 무의미한 광고 목적의 글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공들여 읽을 만한 텍스트를 마주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터넷에서 원하는 또는 만족할 만한 텍스트를 찾거나 읽지 못해 시무룩해진 경험은 누구나 해 보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검색하려다가도 의도치 않게 눈에 들어온 ‘낚시성’ 글 제목에 이끌려 몇 번이고 뒤로가기를 클릭하고, 불순물 범벅의 단순 ‘복붙’글(복사하기+붙여넣기를 반복해 생성한 글) 사이를 부유하다가 진절머리가 날 지경에야 머리를 흔들며 제정신을 차린다. 본래 찾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읽을 가치가 있는 텍스트로서 책의 진가가 발휘된다. 저자는 ‘가성비’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접근이어서 참 신선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책은 정말 훌륭하고 가성비가 넘치는 물건이다.
우선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 텍스트’인가에 대해서는 앞서 짧게 이야기했지만, 검증되고 많은 사람의 평가와 손을 거친 정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 슈피넨의 『책에 바침』은 얼핏 보면 책의 시대의 조종弔鐘을 울리는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는 어떤 사라진 종이책들에 대한 내용 외에도, 도저히 시대가 지나도 사라질 수 없는 종이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것은 바로 한 권의 생각이 ‘굳이’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번거로움이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모든 책은 텍스트가 인쇄되어 나오기까지 넘어야 했던 장애물들에 대한 감각을 전해 준다. 그때 그 시절 열세 살 소년이었던 나에게 『범선의 전성기』의 어마어마한 가격은 내가 그 주제에 침잠해서 화보들에 빠져들고 도해들을 펼쳐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정들이 필요했는지를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것은 유익한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번거로움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특히 참고 도서나 입문서·논픽션의 경우 빛을 발하는데, 정보 가공 및 생산자의 입장에 국한해 보더라도 책만큼 ‘대단한 가성비’를 지닌 매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부지런한 학자·기자 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거쳐 쓴 책을 보면 누가 나 대신 취재를 해서 ‘엑기스’만 추출해 담아 놓은, 분에 넘치는 선물꾸러미를 받아 안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히 그 책이 내가 오래도록 품었던 질문을 건드리고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감히 환산하기 어렵다.
우선 책의 접근성을 보자. 도서관에 가면 오랜 전통을 지닌 문헌 분류법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분야의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책의 서문·제목·차례는 그 안에 무슨 정보가 담겨 있는지를 깔끔하게 알려 주며, 중요한 대목엔 그 정보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려 주는 출처가 촘촘하게 달려 있다. 거기다가 그 책을 읽으며 해당 주제의 책을 더 찾아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참고 문헌’에서 수많은 책을 소개하기까지 한다! 해당 책(정보 묶음)에 대한 메타 평가(서평)도 손쉽게 참고할 수 있다. 독자와 저자라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다리를 놓는 편집자 덕에 가독성마저 좋은 데다가, 혹 그런 책이 다른 언어로 쓰인 경우 출판사와 번역가는 훌훌 읽기 쉽게 한국어로 번역까지 해 낸다. (꼭 읽고 싶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더듬더듬 원서를 읽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것이다.) 또한 책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 수백년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고민의 정수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책의 훌륭함이 이 정도라면 대만 작가 탕누어가 “책만큼 저렴한 매체는 또 없다”라며 한탄한 것이 괜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기사를 쓰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뉴스레터를 취미로 발행하는 저자답게, 그는 (종이)책에 관한 여러 가지 측면을 해찰해 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좋은 글, 좋은 텍스트란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의 글쓰기이고, “이는 단순히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려 읽은 대부분의 책 속 텍스트는 이처럼 나를 향해 똑바로 눈을 맞춘 채 서문부터 확 멱살을 잡았다. 저자의 절실한 고민과 진정성이 녹아 있는 글이었다. 설령 난해하더라도 이런 글들엔 왠지 모르게 계속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읽게 되는 힘이 있다.
또한 ‘읽을 맛’도 중요한 문제다. 진지한 책 속에 숨겨진, 잔잔하게 웃긴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 역시 인간이었음을 느끼고 매력을 느낀다.
20세기 미국의 전설적인 기자 이지 스톤은 시대를 앞서간 1인 뉴스레터 발행인이기도 했는데, 그는 결코 자신의 글에서 읽는 재미를 빼놓지 않았다. 급진적인 성향으로 인해 평생 FBI의 감시를 받았던 그는 생전 공산당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공산당원이었는데 너무 지겨워서 탈당했다고 말하는 편이 채색되지 않은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10분의 1만큼이라도 매력적이었다면 그들은 벌써 국회의원을 배출했을 것이고 기관지인 『데일리 워커』 직원들에게 월급도 잘 주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예상치 못한 ‘킬링 포인트’를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 저자 입장에선 상대를 웃기게 하려는 의도 없이 그냥 담담하게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게 의외로 웃기면 그 글의 매력은 배로 증가한다.
개인적으로 또 내가 이 책에서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는 이거다.
내가 종이책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모든 종이책이 대대손손 받들 정도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층위와 용도의 다양성·직관성, 이에 따른 차별 가능성 때문이다.
종이책은 ‘읽지 않기’라는 종류의 독서마저
가능하게 한다
종이책은 내가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지, 어떤 것은 손쉽게 읽고 버려도 될지, 어떤 정보는 읽지 않고 그냥 지근거리에 두어도 될지를 위계적으로 판단해 정리해 둘 수 있게 한다. 오히려 이 때문에 당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정보에도 적정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사 두고 안 보면 된다.) 어떤 책은 오랜 세월 두고두고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서가에 꽂힌 채 나를 노려보”다가, 결과적으로는 먼 훗날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내 인생의 책”이 되기도 한다. 다카다 아키노리는 이처럼 어렵지만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 책을 당장 읽지 않고 일단 서가에 꽂아 두는 것을 ‘책 재우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책을 사랑하고 자주 읽는 이라면 많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분량도 200쪽이 살짝 안 되는 정도(198쪽)니까, ‘그래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데?’라는 의문을 가진 이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도 딱이다. 학생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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