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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이야기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문화] 빨간 머리 사람에게 이 말 조심하세요!

by Jaime Chung 201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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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호주 문화] 빨간 머리 사람에게 이 말 조심하세요!

 

어제 한 유머 게시판에서 '세계의 기괴한 욕 20가지'라는 글을 봤다.

스페인에서는 '너는 양파가 울고 갈 만큼 못생겼어!'라고 욕한단다(이건 욕이 창의적이다 못해 너무한 거 아니냐, 진짜).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는 빨간 머리 사람을 '랭아(ranga)'라고 부른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었다.

 

 

'랭아'는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오랑우탄(orang-utan)'을 줄인 말인데, 빨간 머리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처음 쓰이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임을 호주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4년부터 학생들이 빨간 머리를 놀리는 데, 그리고 빨간 머리의 풋볼 선수들을 지칭하는 데 '랭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이로써 이 단어는 분명히 욕(term of abuse)임을 알 수 있다.

 

2007년에 <Summer Heights High>라는 인기 TV 시리즈에서 '랭어'라는 단어가 한 에피소드에 등장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왜 그 애를 괴롭혔니?' 하고 묻자 '왜냐하면 걔가 랭어니까요' 하고 대답한다.

선생님이 다시 '랭어'가 뭐냐고 묻자 '오랑우탄처럼 머리가 빨갛다고요.'라고 의미를 설명한다.

물론 선생님은 그렇다고 해서 그 애를 괴롭혀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 학생을 타이른다.

TV에 등장하자 이 단어는 더 널리 알려졌다(머리색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선생님의 훈계도 사람들이 같이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전(前) 호주 총리 줄리아 길러드(Julia Gillard)도 빨간 머리이다.

 

2010년에는 당시 호주 부총리였던 줄리아 길러드가 공식적으로 빨간 머리인 사람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줄리아 길라드는 그녀의 유명한 머리 색깔 덕분에 '랭어의 아이콘'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어 기쁘다고 한다.

라디오 진행자인 스티브 비자드(Steve Vizard)는 부총리에게 자신의 딸이 빨간 머리인데 '그녀가 당신을 랭어의 아이콘으로 여깁니다. 그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길러드 부총리는 '아, 랭어의 아이콘이 되어 기쁩니다. 다른 랭어들을 지지해야죠.'라고 대답했다.

(본 출처는 <멜버른 헤럴드 선(Melbourne Herald-Sun)> 2010년 4월 20일 자, 다음 링크에서 재인용함. https://blogs.crikey.com.au/fullysic/2012/12/07/ranga/)

 

그러고 나서 2개월 후 줄리아 길러드 부총리는 총리가 되었고 랭어라는 단어는 그 어느 때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2012년에 이 단어는 옥스퍼드 호주 사전(Oxford Australia Dictionary)은 '랭어: (명사)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정의를 추가 되었다.

이제 이 단어를 모르는 호주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고 줄리아 길러드가 빨간 머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해서 '랭어'가 욕이 아니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글쎄, 그거야 빨간 머리의 소유자 개인들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다.

'랭어'라는 말이 그냥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만 있다 해도 유래를 보면 분명히 비하적인 말이 맞는 데다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무난한 단어라고 해도 어감이 조금 좋지 않으면 욕처럼 들릴 수 있으니 빨간 머리가 쉽게 괴롭힘, 놀림의 대상이 되는 이 문화권에서는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본 글을 통해 '랭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고 해서 무작정 쓰지는 마시라는 이야기이다.

그럼 빨간 머리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글쎄, 제일 좋은 건 그냥 그 사람 이름으로 부르는 거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쉬운 해결책인가!

우리는 유치하게 머리 색으로 놀리고 차별하고 그러지 맙시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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