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백설희, 홍수민, <마법 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소녀가 소비하는 문화, 그 알려지지 않은 이면 이해하기’라는 부제처럼 주로 소녀들이 소비하는 문화를 이모저모 뜯어보는 여성학 논픽션. 그 범위도 꽤 넓다. 만화, 장난감, 놀이, 게임, 마법 소녀물, 문학, 케이팝 아이돌 등등.
저자들이 알려 주는 ‘소녀’라는 단어의 역사부터 한번 살펴보자.
‘소녀’가 서양의 ‘소녀(girl)’에 해당하는 단어로 재탄생한 것은 1908년 11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남선이 열여덟 살의 나이로 잡지 《소년》 창간호를 발간하면서부터입니다. 창간사에서 그는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을 포함한 10대 남학생들을 그와 비슷한 의미의 영단어 ‘소년(boy)’으로 새롭게 지칭하면서 근대적 관념인 ‘소년’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소년’의 주체와 존재 의미는 최남선을 비롯한 개화기 남성 지식인들에게 정립되어 있었지만, ‘소녀’는 ‘소년’에 대응하는 상징적인 기표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를 개화기 여학생들이 즐겨 읽었던 번역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잔 다르크의 영웅 서사를 담은 『애국부인전』이 매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를 번역한 장지연은 서사의 말미에 17세 소녀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 필요로 하던 ‘애국부인’에 해당한다며 이 책을 읽은 여성들도 잔 다르크와 같은 ‘애국부인’이 되라고 권유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잔 다르크를 ‘부인’이라 칭하다니 무슨 오역인가 싶지요. 그러나 이 시기 남성 지식인들에게 여성이란 어린 ‘계집아이’와 결혼한 ‘부인’, 두 부류뿐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역자인 장지연이 독자로 상정한 대상은 ‘계집아이’에 해당했기에, 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 지점인 잔 다르크를 ‘부인’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부인’이 되지? 어린, 결혼하지 않은 ‘계집아이’ 아니면 결혼한 성인 ‘부인’ 두 부류로만 봤다니, 남성 지식인들 편협한 꼬라지 하고는.
그렇다면 이 시기 여학생들은 스스로를 소녀라고 칭했을까요? 앞서 말했듯, 이들은 웃어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춰 부를 때가 아니라면 ‘소녀’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이 없었습니다. ‘소녀’라는 한자어를 공유하여 사용하던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여자아이들은 ‘소녀’라는 한자어보다는 문자 그대로 여자아이를 의미하는 ‘온나노코(女の子)’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지칭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정황은 당시의 ‘소녀’라는 관념이 소녀 당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소녀라 이름 지은 제3자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정황은 당시의 ‘소녀’라는 관념이 소녀 당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소녀라 이름 지은 제3자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조차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그 언어조차 더럽게 쓰는 꼬라지가 너무 꼴 보기 싫다(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영화 제목을 ‘아가씨’로 지은 이유를 상기해 보시라(참고 기사)).
애니메이션에 관한 장에서는 ‘세일러 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장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소비력과 소비 욕구가 상업적인 영역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여권 신장 사이에는 얼마큼의 관계가 있는 걸까요? 물론 전무하지 않지요.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 소비자들의 시장가치와 사회적 입지는 철저히 분리되어 다루어졌습니다. 마케터들은 성평등을 구현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구매력 높은 별개의 소비 집단을 구축하려 했을 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행위가 여성주의적인 메시지와 결합되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장 페미니즘(Market Feminism)’이 탄생하게 됩니다.(주석:* 광범위하게 ‘Commodity feminism’ ‘Commodified feminism’ ‘Commer-cialization of Feminism’과도 통용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제품 광고에 이용하는 펨버타이징(Femvertising)이 있지요.) 시장 페미니즘이란 간단히 말해 시장이 제공하는, 대중에게 ‘잘 팔리는’ 여성주의적 메시지입니다. 가부장제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자본주의를 포함한 현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개인적인 성공, 권력, 자율성에 중점을 두지요. 쉽고 단순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페미니즘. 이것이 바로 대중 친화적인 시장 페미니즘의 특징입니다.
시장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누구나 소비할 수 있고, 소비해야만 하는 하나의 브랜드로 재구축합니다. 물론 여성주의적 메시지는 널리 퍼질수록 좋지요. 그러나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소비되려면 여성주의의 예쁘지 않고, 매력이 떨어지며, 친근하지 못한 메시지들은 소거되어야 합니다. 인기가 많으려면 모나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전 세계의 시청자들을 매료시킨 대히트작 〈세일러 문〉 시리즈는 여성주의적 메시지에 일면 부응함과 동시에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습니다. 〈세일러 문〉의 내용은 일본의 전통적인 성규범이나 가부장적 규범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비주얼과 내러티브, 여성주의적 메시지 모두가 대중의 눈과 귀에 한없이 긍정적이고 매력적일 뿐입니다. 분명 〈세일러 문〉 시리즈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긍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성됨과 소녀됨의 불편하고 부정적인 이면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장은 공범이 되어 이 사실을 조용히 숨겼고요. 당시 현실을 살아가던 소녀들이나 직장인 여성들이 부여받은 자유는 오로지 소비할 수 있는 자유뿐이었습니다. 모두가 〈세일러 문〉의 눈부신 성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일본 여성들이 직면한 불평등한 현실은 외면당했습니다.
맞는 말이다. 이것은 비단 ‘세일러 문’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프리 큐어’ 같은 다른 소녀용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여성’인 세일러 전사들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건 멋지지만, 그걸 꼭 미니 스커트를 입고 해야 하나? 그게 정말로 우리가 여자애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인가? 따지고 보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 안타까운 현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판매자들이 자기의 ‘타깃층’을 확실히 알아서 그쪽에 확실히 충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소비자들이 계속 더 나은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를 하면 바뀌겠지. 아니, 그래야 한다.
개인적으로 내용 자체는 좋은데 제목이 ‘마법 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라서 마법 소녀에 집중한 내용을 보여 줄 거라 (잘못) 기대하게 한 점이 조금 아쉽다. 마법 소녀가 메인은 아니고 저자들이 다루는 다양한 소재들 중 하나일 뿐이라서. 진짜로 ‘마법 소녀’라는 소재만을 다루는 책을 원한다면, 사이토 미나코의 <요술봉과 분홍 제복>을 추천한다. 또한 이 책에서도 게임을 다루긴 하지만 실제로 여성 게이머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 고난(성차별, 욕설, 성희롱적인 발언 등등)에 대해서는 딜루트의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라. 아무래도 ‘소녀들이 소비하는 문화’라는 넓은 의미의 개념을 다루는 것보다 한 가지만을 다루는 게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으니. 어쨌든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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