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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엘레나는 알고 있다>

by Jaime Chung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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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엘레나는 알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훌리오 코르타사르 이후 가장 많이 번역된 아르헨티나 작가라고 하는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스릴 넘치는 소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의 딸 리타는 성당 종탑에 목을 매어 사망한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엘레나는, 사건을 수사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경찰들 대신에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병든 몸뚱이 대신에 직접 움직이며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하기로 한다. 그녀가 떠올린 것은 이사벨, 약 20년 전에 리타가 도와준 여인이다. 엘레나는 파킨슨병의 증세를 완화해 주는 레보도파를 한 알 복용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를 가로질러 천천히 이사벨의 집으로 향하는데…

 

연초에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여한 ‘다양한 책 챌린지 2024’ 중에 ‘스페인/중남미 문학 읽기’ 항목이 있다. 원래는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읽으려고 했고, 실제로 조금 읽긴 했으나 아무래도 길어서 매주 세 편씩 책이나 영화의 후기를 써야 하는 내 빡빡한 스케쥴에 끼워 넣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두 권이나 되는 책은 빨리 읽기도 힘든데 후기도 두 편이 아니라 한 편에 불과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연말이 다가오기까지 하니 어떻게든 이 항목을 완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스페인/중남미 문학을 검색하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게 바로 이 책. 무려 2022년에 인터내셔널 부커상 파이널리스트였던 데다가 2023년에는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했다는 정보를 읽고 ‘이거다’ 싶었다. 그렇게 보관함에 넣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구입해 읽었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놀라운 책이다. 이 소설은 늙는다는 것, 육체가 병이 든다는 것뿐 아니라 엄마-딸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의 생식권에 대해서까지 폭 넓게 다룬다. 일단 어머니 엘레나와 딸 리타의 관계가 중점이 되는데, 리타는 이미 파킨슨병을 앓는 엘레나를 돌봐주는 걸 힘들어하고 있었다. 리타는 어릴 적부터 비가 내리는 걸 무서워했고, 따라서 엘레나는 리타가 비 오는 날에 제발로 걸어서 성당 종탑까지 가서 목을 매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리타의 아버지가 무심코 한 한마디, 즉 성당의 십자가가 마을의 피뢰침이라는 것, 이 한마디로 리타가 평생 비바람 치는 날이면 성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리타는 (그리고 엘레나 자신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해 주는 말을 거의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면서 자랐다. 그게 나중에 이 소설의 반전이자 생각의 전환에 대한 전조가 되기도 한다.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일단 이 점을 유의하시라. 또한, 정말로 어머니는 딸에 대해 다 알까? 어머니와 딸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가깝고 깊은 사이이지만 사실 사랑만큼 증오로 얼룩진 관계이기도 하다. 어머니라고 해도 자기 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때로 어머니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큰 값을 치르고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은 일상을 되풀이했다. 산책, 독설, 멀어지기, 그리고 마침내 침묵. 나누는 말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싸우는 이유도 늘 달랐다. 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와 말투, 일상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들은 유리 바다사자 인형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기념품과 조개 목걸이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던 중 엘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얘, 후안 신부님께 저 사제 와인 오프너를 선물해드리지 그러니? 하지만 리타는 엄마의 말이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엄마는 참 못됐어.

리타는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이미 숨진 상태로. 비가 내린 어느 날 저녁에. 그것, 그날 내린 비가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엘레나는 알고 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자살이었다고 말한다 해도. 친구와 친구가 아닌 이들 모두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들이 아무리 자살이라고 우기든,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 금방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두컴컴할 때 리타는 절대 성당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없다. 그 아이는 그 근처에 가지도, 거기서 죽지도 않았어요. 누군가 전에 물어봤다면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비가 내린 어느 날 저녁, 리타는 더는 그녀의 딸이 아닌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성당 종탑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갔는지 아무도 분명하게 밝힐 수 없지만 말이다. 리타는 어릴 때부터 번개를 무서워했다. 게다가 성당의 십자가가 번개를 끌어당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 오는 날 십자가 근처에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는 말이다. 항상, 늘, 변함없이. 엘레나는 리타가 죽던 날 갑자기 그녀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을 리 없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그녀의 딸이 비 오는 날 성당에서 발견되었다면 그건 누군가 그 아이를, 그 아이가 살아 있었든 아니든 간에, 거기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 아니면 어떤 것이요. 수사를 맡은 아베야네다 형사가 그렇게 대꾸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형사님? 어떤 것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아, 그건 저도 모르죠. 그냥 해본 말이에요. 모르면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녀가 나무라듯 말했다.

엘레나는 딸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른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살해 동기를 찾을 수가 없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자살이라는 판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자살이라는 아베야네다 형사의 말을. 자살이라는 로베르토 알마다의 말을. 자기를 보면서 입을 열지는 못하지만 속으로 자살이라고 수군거리는 모든 이들의 말을. 그렇지만 비가 내렸다. 그녀는 엄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그것이 그녀를 구해줄 것이고 모든 것을 바꿔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 혼자 힘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그녀 혼자서는 도저히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그건 지금 그녀에게 몸이 없기 때문이지 왕이 쫓겨나고, 그 여자가 명령을 내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자기를 도와줄 다른 육체를 찾지 못한다면, 가능한 한 모든 조롱과 속임수를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사건의 진실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를 대신해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다른 이의 몸. 그녀 대신 필요한 것을 조사하고, 물어보고, 걷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타인의 몸. 엘레나가 명령을 내리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 엘레나 자신의 육체가 아닌, 다른 이의 육체.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끼는 누군가의 육체. 이사벨의 육체. 그래서 그녀는 이 기차에 오른 것이다. 다른 육체, 지난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느 여자의 육체가 그녀를 도와 자신의 몸으로는 늘 거부당하는 진실을 밝혀내게 하기 위해서. 그녀 혼자 힘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실을 밝혀내게 하기 위해서. 비록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고 할지라도. 비록 약효가 떨어졌을 때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시간이 멈춰버린 몸속에 갇힌 채 다시 거리와 역, 왕, 매춘부, 벌거벗은 임금님, 거꾸로 또 앞으로, 임금님, 매춘부, 왕, 역, 거리를 세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와, 반전을 밝히지 않으면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참 어렵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위해 입이 근질근질하더라도 일단 말은 아껴야지. 하지만 이 세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해 두고 싶다.

첫 번째,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의 임신 중단권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저자의 신념과도 연결돼 있다. 피녜이로는 (’추천의 말’을 쓴 정보라 작가의 표현대로) “임신중단권 운동의 선두에 선 여성인권 운동가이며 페미니스트이고 노동자로서 작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 소설은 엘레나가 오전, 정오, 오후에 각각 한 번씩 약을 먹으면서 그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 (및 엘레나의 과거 회상) 순서로 구성돼 있는데, 마지막 3장 ‘오후 네 번째 알약’은 꼭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으시길 권한다. 아니, 내가 권하지 않아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여기가 진짜 최고로 스릴 넘치는 부분이라 흥미진진해서 얼른 다음 내용을 읽고 싶어질 테니까.

마지막 세 번째,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적당히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라면, 제목과 달리 “엘레나는 모른다(알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읽고 나서 한번 이 점을 생각해 보시라.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지만 색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일단 엘레나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으므로 스스로 여기저기 다니며 직접 정보를 모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엘레나가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줄 이사벨을 만나러 가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 점은 리타가 저지르는 ‘일’과도 관련이 있는데,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말해 보자면, 엘레나가 이사벨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 또한 리타가 저지른 일과 같은 의미에서 여성의 몸에 관한 권리를 짓밟는 일이다(위에 있는 네 번째 인용문을 참고하시라). 무얼 근거로 이사벨이 엘레나를 대신해 ‘빚’을 갚으면서 그녀의 다리가 되어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또한 엘레나가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딸 리타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 이 애초에 ‘엘레나 탐정’의 수사가 필요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길지 않으면서 (종이책 기준 272쪽인데 ‘옮긴이의 말’과 ‘추천의 말’, 그리고 ‘주(註)’까지 합친 분량이다) 시종일관 긴장감이 넘치고 마지막에 놀라운 반전으로 머리 위에 느낌표를 세 개쯤 띄우게 하는 소설을 찾는다면 이 소설을 강력 추천한다. 스페인/중남미 문학은 아무래도 영미 문학보다 조금 더 심적인 거리감이 있는 느낌인데 이 기회에 한 번 접해 보면 좋겠다.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문학도 재미있다고요!

🐍 뱀발: 넷플릭스에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Elena Knows(엘레나는 알고 있다)>(2023)는 역시 원작만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반전이 밝혀질 때의 스릴과 충격을 잘 담아내지 못했다는 느낌. 지금까지 빌드업해 온 걸 팍 터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푸쉬식 하고 식는 느낌이었다. 실망스러운 엔딩. 그냥 원작 소설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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