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e.e. 커밍스, <E. E. 커밍스 시 선집>
e.e. 커밍스는 독특한 시인이다.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시를 전부 소문자로 썼고, 시각적인 언어의 배열을 실험했다(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래에서 예시를 통해 보여 드리겠다). 그의 출신지인 미국에서는 그래도 알려진 시인이지만, 로버트 프로스트나 에밀리 디킨슨처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정도까지는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안 알려져 있는 듯하다. 영미 문학 전공자나 시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정도는 되어야 알 듯? 나는 이 시인을 대학 시절,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이 친구는 당시 영드 <The Hour(디 아워)>(2011-2012)의 애청자였는데, 그중 한 에피소드에서(내 검색 결과에 따르면 1시즌 3화) 주요 등장인물인 프레디(벤 휘쇼 분)가 e.e. 커밍스의 시 “somewhere i have never travelled,gladly beyond”(이 시는 곧 보여 드리겠다) 마지막 4행을 읊조린다. 나는 이 영드는 여태껏 안 봤지만 어째서인지 이 친구가 열렬하게 이 장면을 칭찬하던 기억만은 남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5년에 나는 밴드 fun.(펀.)의 보컬인 네이트 루스가 자신의 솔로 앨범 <Grand Romantic> 중 한 곡 “AhHa”에서 이 시를 낭송하는(네이트 루스의 유튜브 채널 공식 가사 비디오) 걸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몰랐지만 우디 앨런의 영화 <Hannah and Her Sisters(한나와 그 자매들)>(1986)에서 일종의 러브 레터로도 인용됐다고 한다.) 이 시는 이렇다(번역은 물론 내가 읽은 이 시 선집에서 가져왔다).
somewhere I have never travelled,gladly beyond any experience,your eyes have their silence: in your most frail gesture are things which enclose me or which I cannot touch because they are too near your slightest look easily will unclose me though I have closed myself as fingers you open always petal by petal myself as Spring opens (touching skilfully,mysteriously)her first rose or if your wish be to close me, I and my life will shut very beautifully,suddenly, as when the heart of this flower imagines the snow carefully everywhere descending; nothing which we are to perceive in this world equals the power of your intense fragility:whose texture compels me with the color of its countries rendering death and forever with each breathing (i do not know what it is about you that closes and opens;only something in me understands the voice of your eyes is deeper than all roses) nobody,not even the rain,has such small hands |
내가 한 번도 여행해 본 적 없는 어딘가,어떤 경험 너머에 있는 그곳,당신의 눈은 그곳의 고요를 지녔다: 당신의 가장 유약한 몸짓 속에는 나를 에워싸는 것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신이 잠깐 주고 가는 시선이 나를 쉽게 열어젖힌다 비록 나는 나 자신을 손가락들처럼 닫아 버렸지만, 당신은 나의 꽃잎을 하나하나 열어 낼 것이다 마치 봄이 (능숙하게,신비롭게 만져서)봄의 첫 장미를 틔우듯이 혹은 당신의 소원이 나를 닫아 버리는 거라면,나와 나의 삶은 매우 아름답게,갑작스럽게 닫힐 것이다, 이 꽃의 심장이 조심스럽게 어느 곳에서나 내리는 눈을 상상할 때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해하게 되는 어느 것도 당신의 강렬한 취약함이 지닌 힘에 비할 수 없다:그 감촉이 그 나라들의 색감으로 나를 압도하며, 죽음을 만들어 낸다 영원히 숨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이 닫아 내고 또 열어 내는지 알지 못한다;내 안의 무언가가 이해할 뿐이다 당신 눈의 목소리가 모든 장미보다 깊다는 것을) 아무도,비조차도,그렇게나 작은 손을 갖지 못했다 |
옆의 해석을 봐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것이다. e.e. 커밍스의 시가 그렇다. 머리로 이해하려 들면 안 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세상에는 딱 봐도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은 시가 있고 ‘도대체 이게 뭔 형이상학적인 소리지?’ 싶은 시가 있는데, e.e. 커밍스의 시는 단연코 후자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 이 시는 이렇다. 이 시에서 묘사되는 존재, 말하기 쉽게 ‘연인’이라고 하자. 이 시점에서 봤을 때 둘이 사귀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자가 이 연인에게 낭만적인 관심이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한 것 같으니. 연인은 말을 꺼내지 않아도 화자, ‘나’를 압도하는 매력이 있다. 이 화자의 마음속에서 이 연인과 화자의 심적 거리는 아주 가까워서 ‘너무 가까이 있어’ 손댈 수조차 없다. 연인이 살짝 쳐다보기만 해도 이 화자의 마음은 활짝 열린다. 원래 이 화자는 마음이 닫힌(무뚝뚝한, 또는 무심한?) 사람이지만(손가락들처럼 닫아 버렸다는 건 손깍지를 낀 모습을 상상하시라. 이러면 손을 풀기 어렵다), 이 연인은 봄이 첫 장미를 틔우듯 화자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든다. 화자가 연인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 이 연인은 화자의 마음과 삶을 닫히게 할 수 있다. 여기서 닫힌다는 건 화자가 연인에게 거절당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 좌절감 등을 말하는 것 같다. 눈이 내릴 정도의 추위에 피어 있을 수 있는 꽃은 없기에, 그의 삶도 닫힌다(앞에 나온 장미의 이미지가 이어짐). ‘그 나라들의 색감’이란, 지도에서 근방 국가들을 구분하기 위해 각각 다른 색깔로 칠하는 관습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연인이 가진 힘(즉 매력)은 온 나라를 다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영원히 숨마다 죽음을 만들어 낸다는 건, 숨은 매 순간 인간이 자연히 쉬는 것인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것인데 그렇게 언제든 마음을 바꿔 이 화자를 거절할 수(’죽음을 만들어 낸다’) 있다는 것이다. 거절당했을 때의 고통이 곧 죽음이다. 화자는 연인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어서 제 마음을 그렇게 열고 닫게 만드는지 알지 못한다. 그 연인의 눈길이 무척 매력적이어서(역시나 장미의 이미지가 이어진다) 그렇다 생각할 뿐. 비는 아주 조그만 물방울이라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젖게 마련인데(부피가 적으니 피하기 어렵다. 골프공을 피하는 것과 훌라후프만 한 크기의 공을 피하는 걸 비교해 보시라), 그 비조차도 작은 손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자기 마음을 구석구석 다 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약돌과 고운 모래를 어떤 통에 채운다고 할 때, 조약돌들 사이사이를 곱디고운 모래 입자가 채우듯이. 작으니까 어디든 접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시가 아리송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나마 ‘말이 되는’ 편에 속한다. 이것보다 더 실험적인 시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것.
l(a le af fa ll s) one l iness |
ㅇ(잎 이 떨 어 진 다) ㅚ 로 움 |
이게 바로 내가 제일 e.e. 커밍스다운 시, 대표적으로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 주는 시라고 생각하는 시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대충 잎이 떨어지는 모양으로 보이는 것도 같다. 괄호에 든 ‘a leaf falls(잎이 떨어진다)‘를 제외하면 남은 부분은 ‘loneliness’라는 한 단어인데 이걸 자음 ㅇ을 떼어 ‘ㅚ로움’이라고 옮기신 박선아 교수님께 존경심을 표합니다… 이건 쓴 사람도, 옮긴 사람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낸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연코 이 시인의 최애 시는 이것이다(물론 내가 “내가 한 번도 여행해 본 적 없는 어딘가,어떤”을 외우고 다니긴 하지만). 이 시는 본 시 선집에 없어서 내가 최선을 다해 번역해 보겠으니 이해해 주시길. 참고로 e.e. 커밍스 시는 대체로 제목이 딱히 없어서 첫 행을 제목 대신으로 삼는데, 이건 제목도 있다.
This Is Just To Say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
단지 이 말만 할게요 아이스박스 안에 있던 자두들 내가 먹었어요 아마도 당신이 아침으로 먹으려고 놔두었던 것들일 텐데 용서해 줘요 자두는 맛있었어요 아주 달고 아주 차가웠어요 |
딱 봐도 알겠지만, 배우자가 아침으로 먹으려고 남겨 둔 자두를 자기가 먹고 나서 용서를 비는 내용이다. 그것도 쪽지에 쓴. 아니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이 아저씨가 매일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시만 쓰면 좋을 텐데…
하지만 e.e. 커밍스 시의 태반은 ‘정말 이게 무슨 헛소리지?’ 싶은 것들이다. 그런 시들로 이 리뷰를 읽어 주시는 소중한 분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 내가 좋아하는 e.e. 커밍스의 시 하나만 더 소개하고 이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이 시 정말 너무 건전하게 야하고 관능적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두 행은 내게 “I like the thrill of you (who is 또는 when you’re) under me/(and it feels) so quite new”처럼 읽히는데, 아이고 야하다 😆 진짜 언어를 가지고 노는 이 시인의 시들을 ‘한국어로’ ‘말이 되게’ 번역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i like my body when it is with your body. It is so quite new a thing. Muscles better and nerves more. i like your body. i like what it does, i like its hows. i like to feel the spine of your body and its bones,and the trembling -firm-smooth ness and which i will again and again and again kiss, i like kissing this and that of you, i like, slowly stroking the,shocking fuzz of your electric furr,and what-is-it comes over parting flesh…… And eyes big love-crumbs, and possibly i like the thrill of under me you so quite new |
나는 내 몸을 좋아한다 그게 당신의 몸과 함께 있을 때면. 그건 꽤나 새로운 무언가다. 더 좋은 근육들 더 민감한 신경들. 나는 당신의 몸을 좋아한다. 나는 그 몸이 하는 일을 좋아하고, 나는 그 몸이 어떻게 하는지도 좋아한다. 나는 당신 몸의 척추와 뼈를,그리고 그-단단하고-부드러운 떨림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거기에 나는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다시 입 맞추고, 나는 당신의 여기에 저기에 입 맞추는 걸 좋아하고 나는 좋아한다,천천히 쓰다듬는 걸,당신의 찌릿한 털의 전율하는 솜털을, 그리고 그건-뭐-였지 하는 순간은 몸이 떨어지는 순간에 온다….. 그러면 눈은 커다란 사랑의-부스러기들, 그리고 나는 좋아한다 내 아래에서 꽤나 새로워진 당신의 황홀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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