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곽미성, <언어의 위로>
⚠️ 아래 책 후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했습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의 곽미성 작가의 신작! 야호! 신나는 마음에 단숨에 읽었다. <외국어를 배워요>에서는 저자가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놀라운 일(!)에 관련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시간적으로는 그보다 이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프랑스어를 죽기 살기로 배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저자는 “올랄라(Oh là là!)”라고 외치는 이다 도시 씨(앗,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르려나… 🥲)를 볼 때마다 “프랑스 사람들은 진짜 저렇게 말해? 푸하하하 프랑스어 너무 웃기다”라고 했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언어를 본인이 배우게 될 줄은…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다른 언어의 세계에 던져진 후, 그 언어로 변해간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며, “외국어는 언어는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썼다.
저자도 인정하지만, 사실 외국어에는 완벽함이란 없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진 다 할 수 있으면 웬만큼 잘한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자도 말하지만 나 역시 때때로 모국어조차 출력이 제대로 안 되는걸. 저자는 자신의 외국어 ‘수준’에서 해탈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말한다. 아주 큰 공감.
외국어, 그러니까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과연 완벽해질 수 있을까. 스무 해 넘게 외국어 생활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 각자가 추구하는 ‘완벽’이 다를 테지만(사전을 찾지 않고 말하고, 듣고, 읽고, 쓰기가 가능한 수준을 말하는지, 고급 프랑스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수준을 말하는지), 자신의 모국어 수준을 한번 돌아보자. 참고로 내 경우엔 국어사전과 매의 눈을 가진 편집자의 도움 없이는 책을 쓸 수 없고, 말할 때는 정확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자주 버벅거리며, 말이 길어지면 주술 관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그런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 40년 넘게 쓴 모국어로 이런데, 외국어는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프랑스어 수준이 ‘해방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초급-중급-고급으로 이어지는 맨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초급이건 고급이건, 그게 뭐가 중요하죠?”와 같은, 해탈에 가까운 해방이다. 프랑스어든 러시아어든 아랍어든 상관없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모두에게 이 자세를 권유하고 싶다.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언제까지나 외국어일 뿐, 완벽해지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임을, 외국어에서 스트레스와 강박을 걷어내는 것이 가장 빨리 발전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그렇다고 해도 역시 사람들이 왜 외국어를 ‘마스터’하고 싶어 하는지 그 심정은 백번 이해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언어를 지능 또는 인지 능력의 척도라고 여기곤 하니까. 모국어든 외국어이든, 언어가 유창하지 않다고 해서 지능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닌데 말이다. 가장 좋은 예는 아마 이민자 또는 유학생들일 것이다. 내가 그곳의 언어(본인 입장에서 외국어)를 잘하지 못할 뿐이지,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데 (오히려 본인 모국어는 유창할 뿐 아니라 모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을 수도 것이다) 이로 인한 인종 차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저자는 어학원에서 막 왕초보반을 벗어났을 때 일어났던 일을 예시로 든다. 당시 왕초보반에 일본에서 온 요코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어학원 선생님이 ‘folle(궤도를 벗어난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말, 즉 미쳤다는 뜻)’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마치 요코처럼요(folle, comme Yoko)”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망발을 씨부린 어학원 선생이야말로 미친 거 아닌가? 🤬
지금, 그 일을 돌아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요코가 프랑스어로 자기 표현을 잘하는 고급반 학생이었대도, 선생님은 요코를 folle이라는 단어의 예로 사용했을까? 물론 요코의 정신 상태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그 자리에 없는 왕초보반 학생을 화제 삼아 놀리고 싶어 했던 프랑스인의 악의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건 요코만의 일이 아니므로. folle이라는 형용사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붙여질 수 있었던,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묘사였으니까.
성인이 되어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 어린 시절보다 힘든 이유는, 비단 감퇴한 기억력이나 감각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가 아닌데 아이의 수준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처지, 몸만 어른인 아이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는 상황이 성인으로서 외국어 배우기의 진짜 어려움이 아닌가 싶다. 특히 그 외국어로 당장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 있다면, 외국어는 쉽게 자존감 도둑이 된다.
프렌치가 키미코를 ‘mon coeur’라고 부르는 장면(시즌 1-2) 모음집
자, 이제는 분위기를 180도 반전시켜, 프랑스어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솔직히 나는 프랑스어가 딱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TV나 영화에 프랑스어(또는 프랑스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를 하는 남자가 나오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고서도 나는 별 생각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프랑스어(또는 프랑스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의 매력을 알려 준 인물이 있었으니, 아마존 프라임의 <The Boys(더 보이즈)>(2019-)에 등장하는 프렌치(토머 카포네 분)다! 프렌치가 키미코(카렌 후쿠하라 분)를 ‘mon coeur’, 즉 ‘내 심장’이라고 부르 게 너무 좋아서 들을 때마다 심장 살살 녹는다 🫠 프렌치×키미코 절대 지켜! 어쨌든 프랑스어 애칭은 정말 간질간질하다. 작가님도 프랑스의 애칭은 (한국 친구들이 부르는) “그런 장난기 어린 차원이 아니”라고 하셨다.
얼마나 뜨끈뜨끈한지 듣고만 있어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내 심장(mon coeur), 내 보물(mon trésor), 내 벼륙(ma puce)(내가 보호해야 할 아주 작은 존재라는 의미), 내 귀염둥이(mon chou) 같은 간질간질한 단어로 천연덕스럽게 서로를 부른다. 예를 들어, 나의 시어머니는 함께 산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자신의 남편을 여전히 새끼 고양이(minou)라고 부르고, 아들은 벼룩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식이다. “내 새끼 고양이, 화장실 청소 좀 해”, “내 벼룩,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니? 저녁에 뭐 먹고 싶어?” 친구들 사이에서는, 라파엘은 라프로, 조제는 조조로, 스테판은 스테프로 이름을 줄여 부르거나, 내 형제(mon frère), 귀염둥이(chouchou), 우리 이쁜이(ma belle) 같은 애칭을 붙인다.
이미 호칭에서도 애정이 뚝뚝인데, 이들은 전화 통화에서도 문자에서도 메일에서도 끝에 “너에게 키스를 보내(Je t'embrasse)”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친구들도,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앞서 본 편지의 맺음말 같은 그저 헤어짐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친구들이, 시댁 가족들이 보내오는 키스를 받을 때마다, 지금도 1초 정도 말을 잃는다. 끓어오르는 그 다정함에 어떻게 화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들이 흔히 대답하는 것처럼 “나도 키스를 보내”라는 말을 ‘별 뜻 없이’는 하지 못하는 나를 자각할 때마다, 그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의 프랑스어는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구나 싶고 다정함은 피로 물려받는 재능인가 싶다.
그냥 하는 무엇도 아름답게 치장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과도하고 그저 형식일지언정 사랑이 겉으로 드러나야 행복한 사람들의 언어가 프랑스어다. 그리하여 알면 알수록 까다로운 외국어를 나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나라도 이런 뜨끈뜨끈한 애칭을 들으면 표정 관리 안 될 듯. 인용문 중에 언급된 ‘편지의 맺음말’ 이게 또 웃긴 부분인데,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저의 각별한 감정을 받아주십시오(Veuillez agréer l'expression de mes sentiments distingués)”라는 문장으로 편지를 끝맺는다고 한다. 문장 중간에 마담 혹은 무슈를 넣어서 쓰거나 “저의 각별한 존경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Veuillez agréer l’expression de mes hommages)”라고 변형할 수도 있다. 이 표현은 놀랍게도 진정으로 각별한 감정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편지를 끝맺는 (그것도 대체로 관공서 직원이 자주 쓰는) 관용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보면 착각하기 십상. 여기에 낚여든 유명인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가 있다. 쿤데라는 “프랑스인의 뜨거운 감성에 심쿵 했다가 그것이 형식에 불과함을 알고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고. 그는 소설 <불멸>에 대략 이렇게 썼다.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 문장(”친애하는 선생님, 부디 저의 각별한 감정을 받아주십시오”)이 쓰인 편지를 받고서 파리에 나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줄 알고 ‘뛰어오를 듯 기뻤’는데, 알고 보니 그게 그냥 서한 양식인 것을 알게 되어 실망했다고. ㅋㅋㅋㅋㅋㅋ 나라도 착각하고 실망했을 듯…
이 외에도 재미있는 일화와 외국어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이 많은데 다 소개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책의 1부는 저자가 프랑스에서 체류하며 프랑스어가 삶에 ‘스며드는’ 과정 이야기라면 2부는 그 외국어가 삶에 스며들어 일으킨 ‘파장의 순간들’을 담았다. 내가 느끼기엔 2부가 조금 더 영화, 즉 저자의 전공 분야 이야기가 많아서, 영화, 그중에서도 프랑스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읽으면 특히 좋아하실 듯.
이 책을 읽고 나서 인터넷 서점에서 곽미성 작가를 검색했더니 내가 못 읽은 책들이 많아서 당황했다. 게다가 작가님이 번역한 소설 <파노라마>는 밀리의 서재에 있었다. 훑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고도 괴롭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서 보관함에 넣지 않을 수가 없으니…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섭렵해 보리라는 마음을 담아, 오늘 책 리뷰는 내가 아는 프랑스어를 끌어모아 이 말로 끝맺고 싶다. “오 르부아(Au revior,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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