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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마거릿 애트우드, <먹을 수 있는 여자>

by Jaime Chung 2025.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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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마거릿 애트우드, <먹을 수 있는 여자>

 

 

페미니즘 문학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첫 장편소설. 마거릿 애트우드는 미드로도 제작된 <시녀 이야기>와 부커상을 받은 <눈먼 암살자>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목부터 너무 흥미로워서 끌렸는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피터라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약속한 메리언은 어느 날부터 먹을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어서 그것만 빼고 먹었는데, 날이 갈수록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줄어든다. 피터와의 결혼이 다가오고 있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에 덩컨이라는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과연 이 메리언은 결혼이라는 운명에 굴복할 것인가.

1960년대에 쓰인 소설이지만 아직까지도 읽힐 만한 게, 서두에도 썼지만 페미니즘 문학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지금 읽어도 여성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 본인은 페미니즘보다는 프로토페미니즘,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시기에 쓰인 (처음으로 쓰인 것은 1965년, 출간은 1869년) 문학이라고 평가한다. 지금 페미니즘의 시류에는 조금 뒤떨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이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저자 말대로 “착각의 늪에 빠져 있거나 페미니즘 자체를 고민하는 데 신물이 났거나 둘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놀랐던 건, 지루할 수 있는 순문학인데 곳곳에 소소한 유머가 깃들어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저자 서문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1965년 11월에 《먹을 수 있는 여자》를 탈고하고 전작에 조금 관심을 보였던 출판사로 송고했다. 처음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지만 이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는 박사학위 구술시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냥 묻어두었다가 1년 반이 지난 뒤에 알아보니 출판사에서 내 원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 무렵 나는 시로 상을 하나 받고 미미하게나마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참이었기 때문에 출판사 사장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 나를 불렀다. “선생님 작품을 출간할까 합니다.” 그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원고 읽어보셨어요?” 내가 물었다. “아뇨, 하지만 출간하려고요.” 그가 그냥 미안한 마음에 출간한 작품이 《먹을 수 있는 여자》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의 <시녀 이야기>를 n년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애트우드 여사님이 이렇게 웃긴 줄 몰랐다. 아래는 본문 중에서 웃겼던 부분들이다. 참고로 바로 아래 인용문은 관계 후에 피터가 메리언에게 묻는 것이다(말 안 해도 대충 맥락상 아시겠지만서도).

“어땠어?” 그는 내 어깨에 입을 대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그는 항상 이걸 물었다.

“끝내줬어.” 나는 중얼거렸다.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시시했어”라고 대답하고 그의 반응을 살펴야겠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축축한 머리칼을 쓰다듬고 그의 목덜미를 긁었다. 그러면 그는 적당히 좋아했다.

(…) 빨랫감을 빨래 가방에 넣고 있는데 에인슬리가 어슬렁어슬렁 등장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뭔지 모를 흑마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분명 최음제를 제조하거나 레너드를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알맞은 지점에 핀을 꽂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직감을 느낀 것이었다.

“어? 빨래방 가?” 그녀가 무심한 척 물었다.

“아니.” 나는 말했다. “피터를 토막 살인 했거든. 빨래로 위장해서 산골짜기에 묻으려고.”

에인슬리는 썰렁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지 않았다. “저기 있잖아, 가는 김에 내 것도 몇 벌만 같이 빨아다 주면 안 될까? 기본적인 것만.”

아래 인용문은 설문 조사원은 빙자해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속옷과 관련해 성적인 질문을 하는 변태 이야기를 들은 메리언이 하는 생각이다.

그녀는 외투를 입고 사무실에서 나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라는 감압(減壓)실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에도 계속 속옷맨에 대해 생각했다. 지적인 얼굴, 보험 영업 사원 아니면 장의사처럼 깍듯하고 세심한 태도를 그려보았다. 어떤 사적인 질문을 했을지, 만약 그녀가 그의 전화를 받는다면 뭐라고 할지 상상해보았다. (아, 속옷맨이로군요. 말씀 정말 많이 들었어요. 우리 둘이 아는 친구가 좀 겹치나 봐요.) 양복을 입고, 갈색과 고동색으로 줄무늬가 그려진 상당히 점잖은 넥타이를 하고, 깨끗하게 반짝반짝 닦은 구두를 신고 있을까.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버스에 실린 거들 광고를 보면 광란 상태로 바뀌는 것일지 몰랐다. 그는 이 사회의 피해자였다. 이 사회가 고무로 몸을 조인, 웃는 얼굴의 늘씬한 여자들을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며 나긋나긋한 감언이설로 꼬드기고 사실상 구매를 강요해놓고 나 몰라라 한 것이다. 상점에서 문제의 그 옷을 사보았지만 약속한 물품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별 소득 없이 화를 내고 씩씩거리는 대신 조용히, 어른스럽게 실망감을 달랬고, 지각 있는 사람답게 그가 열렬히 갈망했던 속옷을 입은 이미지를 체계적으로 찾아 나서되 이 사회에서 제공한 간편한 통신네트워크를 활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순한 맞교환이었다. 사회에서 그에게 진 빚이 있지 않은가.

 

대놓고 빵 터지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 문학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실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서 예나 지금이나 ‘개념녀’라는 칭찬을 이용해 여자를 제멋대로 이용하려 드는 남자는 있게 마련이다. 메리언과 결혼을 약속한 피터가 그렇다.

“있잖아.” 그가 말했다. “어젯밤에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작정하고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신이 트리거를 두고 한 말이 맞는다고 봐. 그리고 어쩌면 내가 무의식중에 작정하고 있었을지 몰라. 언젠가는 정착해야 하는데 내 나이도 벌써 스물여섯이잖아.”

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젊고 생각 없는 미혼남이었던 그가 이 부엌에서 혼돈의 구조자, 안정감의 제공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시모어 서베이스의 금고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서명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결정하고 나니까 앞으로 훨씬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달릴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장기적으로 보면 내 일에도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결혼했다고 하면 의뢰인들이 좋아할 테니까.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 동성애자나 뭐 그런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고.”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어, 메리언. 나는 항상 당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걸 알아. 대부분의 여자들은 천방지축인데 당신은 참 현명하거든. 당신은 그런 줄 몰랐을지 몰라도 나는 전부터 아내를 선택할 때 그걸 가장 먼저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현명하다는 생각은 별로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다소곳이 시선을 떨구고, 식탁을 닦았는데도 남아 있는 토스트 부스러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도 현명한 사람이야”라고 하는 건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또한 여자가 결혼하면 어차피 회사를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은 그대로다.

하지만 약혼을 하고 언젠가는 이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고 피터는 아내를 부양할 능력도 안 되면서 결혼을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결혼 후에도 원하면 당연히 당분간이나마 직장 생활을 계속 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자에 기대앉아서 그들을 무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기가 막힌 구절들이 많은데 다 소개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읽으면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났는데, 몇 군데 겹쳐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표절이라는 말 아닌 거 아시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만해 보이는 여자를 휘두르려고 하는 남자들은 언제나 있구나. 이런 남자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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