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서수진, <올리앤더>
내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서수진 작가의 <코리안 티처> 이후 장편으로는 두 번째 작품(<코리안 티처>와 이 <올리앤더> 사이에 소설집 <골드러시>가 나왔다). 호주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한국인 유학생 해솔과 그 홈스테이 집 주인의 딸인 클로이, 그리고 클로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문제아 엘리, 이렇게 세 여자애가 주인공이다. 이 셋은 호주 시드니 ‘썸머힐 하이 스쿨’에 다닌다.
해솔은 엄마가 재혼하면서 호주로 ‘유학’을 오게 되었는데, 호주에 버려졌다고 느낀다. 클로이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서 피할 수 없는 트랙,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도 큰 보수를 받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자신이 의대에 가고 싶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엘리는 이곳 호주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지만 적법한 비자가 없는 불법 체류자 상태이고, 클로이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학교 내에서 은밀하게 마리화나를 팔아 돈을 벌며, 10학년(우리나라로 치면 고1. 호주에서는 10학년까지가 의무 교육 기간이고, 이 이후로는 자퇴할 수 있다)이 끝나자마자 자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해솔이나 클로이나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해솔은 클로이에게 수학 과외를 해 주는 노아(주 랭킹 1위인 셀렉티브 스쿨,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좋은 대학에 학생을 많이 보내는 고오급 고등학교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졸업해 시드니대 의대에 합격한 학생)에게 (클로이와 같이) 과외를 받는데, 수학은 클로이보다 더 잘해서 클로이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다. 해솔은 호주에 와서 한국와 상당히 다른 학교의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일단 첫 번째는 교복이 상상 이상으로 촌스럽다는 것. 둘째는 선생님들이 배우지 않은 것을 질문한다는 것(앞으로 배울 내용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선생님들도 국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 다양한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고, 그래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넷째는 지우개도, 교실도, 짝 혹은 친구도 없다는 것이다. 호주 학교에서는 연필과 지우개 대신에 펜으로만 쓰게 하고, 반마다 지정된 교실도 없다. 따라서 쉬는 시간에는 제 나름대로 친구를 구해서 알아서 어울려야 한다. 다섯째가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인종차별보다 인종 내 차별이 심하다는 것이다.
학생이 다인종인 데다 유색인이 절대다수인 만큼 인종차별은 딱히 없었다. 다만 인종끼리의 구분이 분명했고, 다른 인종에 관심이 없었다. ‘오지’라고 불리는 백인은 백인끼리, 중국인은 중국인끼리, 한국인은 한국인끼리 어울렸다.
같은 인종이라고 해서 모두 어울려 지내는 건 아니었다. 한국인만 봐도 그랬다. 해솔은 썸머힐 하이스쿨 내 한국계 애들이 세 부류로 나뉘어 있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 한국어를 쓰는 유학생 부류와 영어를 쓰는 교포 부류,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중간 부류.
한국계 애들은 다른 인종과 어울리지 않는 것보다 더 극명하게 다른 한국 애들 부류와 섞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를 아주 싫어했다. 교포들은 유학생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괴롭히기도 했고, 유학생들은 한국인이 아닌 척하는 교포들을 경멸했다. 중간 무리 애들은 양쪽을 다 싫어하고,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미움을 받았다.
해솔이 미리 익혀 온 아시아인 비하 표현은 전혀 듣지 못해서 금세 잊어버렸다. 그 대신 한국계 애들이 서로의 그룹에 붙인 비하 표현을 배우게 되었다. FOB(Fresh Off the Boat)나 ABG(Asian Baby Girl) 따위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해솔 같은 유학생은 배에서 막 내린 FOB였고, FOB를 조롱하며 스모키 메이크업을 하고 짧은 티셔츠를 입는 애들은 ABG였다. 그리고 클로이는 FOB와 ABG가 모두 싫어하는 중간 무리에 있었다.
FOB는 ‘Fresh Off the Boat’의 약자로 “이제 막 배에서 내렸다는 뜻으로 난민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유학생을 지칭할 때 쓰였다. 해솔이 조인트를 모르자 엘리가 FOB라고 비아냥댔듯이 호주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호주 사회에 섞여 들지 못하는 외국인을 묶어서 무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호주에서 한국 스타일로 입고 다니는 애들. 호주에서 K-POP을 듣는 애들. 호주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애들. 호주에서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는 애들. 호주의 한인 타운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노래방에 가는 애들. 호주에서 한국을 사는 애들. 부적응자. 외부인. 이방인. 찐따.” 반면에 ABG는 ‘Asian Baby Girl’의 약자로,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고 자신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지만 누가 한국인이냐고 물으면 불쾌한 표정을 짓는 애들.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애들.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걸 찐따 같다고 생각하는 애들. 한국 유학생들을 FOB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조롱하는 애들. 부모가 원하는 대로 공부 잘하고 순종적인 아시안이 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애들. 백인과 어울리면서 자신도 백인이라고 착각하는 애들. 자기부정에 빠진 불쌍한 애들.”
이 사이에 끼인 클로이 같은 애들도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란 애들. 한국인도 호주인도 아닌 애들.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호주 문화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닌 애들.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하지만 영어가 더 편한 애들. 한국어를 할 때 실수할까 두려워하면서 영어 역시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는 애들. 한국어로 떠드는 FOB와 자신을 구분 지으면서도 호주인과 친해지지 못하는 애들. 결국 한국 애들끼리 영어로 이야기하며 지내는 애들. 한국인 이민자 1.5세대. 한국을 고국이라 부르는 1세대 이민자도 아니고, 호주에서 태어나 호주인으로 살아가는 2세대 교포도 아니었다. 1.5세대는 1세대의 기대에 부응해서 명문대에 진학한다.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오페라하우스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에 취직한다. 공부 잘하는 동양인, 찌질한 너드. 그 편견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애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이렇다.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공교육 체계와 반드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 해솔의 경우, 호주에 와서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클로이는 이민 1.5세대로서 부모의 은혜,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의대에 반드시 가는 것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았다. 한국 공교육이 과열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호주가 천국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엘리가 그러듯이 호주 학교 내에도 문제아는 있기 때문이다(엘리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학교 내에서 마리화나를 비롯한 약물을 파는 걸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도 엘리처럼 공부에 손놓고 문제를 일으키는 애들이 있고, 문화 차이 때문이겠지만 한국인이 보기에 그 애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한국에서 보는 것보다 더 커 보인다. 완벽한 공교육 체계는 한국에도, 호주에도 없고, 아마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클로이 같은 애들이 호주가 아니라 예컨대 한국에 있다면 좀 편하게, 의대에 가기 위해 자신을 갈아넣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해솔이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비슷한 의미에서 엘리 같은 애들은 시민권이 있거나 자기가 있는 곳에서 얼마든 머무를 수 있는 비자가 있었다면 어느 나라를 가서든 딱히 좋은 대학에 집착하지 않고 제 성격대로 살았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어떤 인터뷰가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게 정말 하나도 없어서 민망할 정도인데, 대충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가족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린 딸을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고 했나,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딱 이것만은 기억난다. 딸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인터뷰이는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어느 곳에 있든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말이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라고 느꼈다. 한국에 있든, 호주에 있든, 분명히 각각 장단점이 있다(어느 한 곳이 다른 곳보다 장점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지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느 곳에 있든 행복이란 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극 중 노아가 후반에 고백하듯이, 그렇게 대단한 성취를 이룬 노아도 지쳐서 의대를 자퇴한다. 의대에 정말로 가고 싶어 했다 해도, 의대에 진학하는 것만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시민권이나 영주권, 비자에 달려 있지 않고, 대학에 달린 것도 아니며, 오직 개인의 마음속에만 있다. 현재 한국, 호주, 또는 미국, 자신이 있는 곳에서 행복한 사람은 물론 좋지만, 그 사람이 지금 행복한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 새로운 곳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서든 행복한 사람이다. 뭔가 굉장히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제 생각이고 소설의 주제가 아니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제목으로 쓰인 ‘올리앤더’는 네리움이라고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협죽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협죽도는 독성이 강해서 가로수나 조경수로 심어진 경우 지방자치단체에서 베어낼 정도다(위키 백과). 클로이네 집 뒷마당에 이 올리앤더 나무가 있는데, 소설에서 초반에 한 번, 후반에 딱 한 번씩 언급된다. 아래는 초반에 언급되는 부분이다.
뒷마당 구석 덩굴처럼 얽힌 올리앤더 나무에 진분홍색 꽃이 잔뜩 달려 있었다. 엄마는 올리앤더 꽃에 독소가 있다며 만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꺼리며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여름이면 끈질기게 꽃을 피웠다. 그 나무가 다였다. 작은 뒷마당에는 독이 있는 꽃을 피워내는 올리앤더 나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누렇게 바랜 잔디가 듬성듬성 벗겨지면서 군데군데 흙이 드러나 있었으니까. 아주 보기 싫은 모양으로.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잘 읽긴 했지만, 서수진 작가의 작품만 놓고 보자면 여전히 <코리안 티처>가 내 마음속에서는 일등이라고 말하고 싶다. <골드러시>도 곧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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